41. 실수
(41/121)
41. 실수
(41/121)
#41. 실수
2022.10.20.
승원은 선뜻 주원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팔짱을 끼고 도발적으로 바라보는 형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 이내 경악이 번졌다.
“설마…… 에이, 형, 장난치지 마.”
승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뇌리를 스치는 몇몇 장면이 그를 혼란하게 했다.
“……아니지?”
당연히 아니어야 하는데, 이건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주원의 귀국 날, 오피스텔에서 맞닥뜨렸던 장면이 딱 떠올랐다. 고백송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자 사색이 되었던 혜주의 얼굴, 혜주를 스토커 취급하던 주원, 그럼에도 그녀를 걱정해 경찰에 신고까지 했던 주원의 선 넘은 걱정까지.
“나야. 오혜주랑 사귀는 사람.”
주원은 덤덤하게 승원에게 선언했다. 몇 글자 되지도 않는 그 말이 승원에게 비수처럼 꽂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형이랑 혜주가……!”
승원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십 톤짜리 트럭이 뒤에서 치받았어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 같다. 눈에 핏발이 서고 목소리는 갈라졌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가 있어!”
“뒤통수?”
주원이 싸늘하게 반문했다.
“지금 뒤통수 치고 있는 게 누군데.”
“형…….”
“힘들게 마음 정리한 애한테 찾아가 들쑤신 건 너 아니고?”
한 배에서 태어나 누구보다 아끼는 피붙이지만, 지금 이 순간 주원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
누가 먼저 혜주를 좋아했든, 혜주가 누굴 선택하든 지금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막말로 혜주가 끝내 승원에게 가버린다 해도 붙잡을 권리는 없었다.
혜주의 마음을 존중한다면 그녀의 선택 역시 존중해야 했으므로.
그런데…… 왜 네가 혜주를 원망하는데.
“너랑 다희가 사귄다고 했을 때 혜주도 똑같은 심정이었을 거야. 네게 고백하려고 준비한 선물을 쓰레기통에 처넣으면서 얼마나 울었을지 생각이나 해봤어?”
“난 아무것도 몰랐잖아! 혜주가 그날 고백하려던 사람이 나였다는 걸 알았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거라고!”
“혜주 마음을 몰라준 건 너고, 네 마음을 몰랐던 것도 너야.”
혜주를 좋아한다는 승원의 말을 듣는 순간 주원은 최악을 가정했다. 뒤늦게 깨달은 서로를 향한 진심에 혜주가 흔들리는 상상이었다.
끔찍했다. 그저 상상일 뿐인데도 가슴이 겹겹이 찢어졌다.
그럼에도 주원은 그 최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게 온 걸 후회하느니 차라리 나를 버리고 가는 게 맞다.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지 못하고 질질 끌어봤자 끝은 지옥일 테니.
“타이밍이 개 같았다는 건 인정하는데, 승원아.”
아둔한 동생을 타이르듯 주원이 말했다.
“여기서 혜주 잘못은 없는 것 같다.”
승원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주원의 나직한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호된 질책처럼 느껴졌다.
잘못 선택한 것도 너고, 상처를 준 것도 너잖아. 그러니까 결과를 감당하는 것도 네 몫이라고.
“형은 정말 몰랐어? 내가 사실은 혜주를 좋아한다는 거.”
승원은 어떻게서든 밖에서 이유를 찾아내려 발버둥 쳤다. 한심스러운 모습에 주원은 화가 나려 했다.
“너도 몰랐던 네 마음을 왜 나한테서 찾냐.”
“지난번에 둘이 술 마셨을 때 조금 이상하긴 했어. 다희랑 계속 사귄다고 하니까 형 되게 안심했었잖아. 삼각관계 운운한 것도 날 떠보려던 거 아니야?”
“몰랐어.”
정말 몰랐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는 대답이었다. 혜주가 짝사랑했던 상대가 승원이라는 게 불안했던 거지, 승원의 마음을 지레짐작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알았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야.”
주원은 맥주캔을 쓰레기통에 골인시키며 일어났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정신 차려. 어리광 받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까.”
오늘따라 술이 참 썼다.
*
옛날 어떤 용은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커다란 동굴을 파서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 꽉 껴안아 몸에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고.
승원을 사랑하는 다희의 마음이 딱 그랬다.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동굴을 둘러싼 담벼락은 높아졌다. 혼자만 간직하기 위해 참 많이 애를 썼었지. 커다래진 동굴이 이리도 자신을 외롭게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동굴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다희는 불행했다. 텅 빈 주위를 둘러보면 외로움보단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더 끔찍한 건 언젠가 이 동굴이 우르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끝없이 매몰되는 기분에 다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이 막혔다.
“다희 씨, 밥 안 먹어?”
욱 팀장이 말을 걸었다. 그제야 점심시간임을 깨달은 다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전 속이 안 좋아서…… 먼저 드세요.”
“요새 점심 자주 거르네. 들어오면서 뭐 사다 줘?”
“괜찮습니다. 감사해요.”
혜주와 어색해진 후 혼자 밥을 먹는 날이 늘었다.
지난번 옥상에서 들킨 건 일부러 사진을 흘렸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진짜로 그녀가 들켜버린 건 혜주에 대한 경계, 의심, 그리고 질투였다.
-나 요새 미친 거 같아. 승원이한텐 나밖에 없다는 거 아는데, 그런데도 불안해 미치겠어.
-뭐 때문에?
-너. 혜주 너 때문에.
7년이나 꾹꾹 숨겨온 못난 마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순간, 혜주는 몹시 충격을 받은 듯했다.
굳은 얼굴로 옥상을 나선 혜주는 그날 이후 다희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다희는 그런 혜주에게 무척 섭섭했다.
‘예전의 혜주는 이러지 않았는데.’
본래 성격이 착하긴 했지만 혜주는 유독 다희에게 호구처럼 굴었었다. 혜주의 강의 시간표를 고대로 베껴 수강 신청을 하던 날, 다희 혼자 수강 신청에 성공했을 때도 웃으며 축하해주던 애였다.
‘석 달 치 용돈을 모아 겨우겨우 마련했다는 노트북을 똑같이 따라 사도, 널 따라 나간 자리에서 만난 네 친구들과 내가 더 친해져도 이해해준 너였잖아. 그럼 이번에도 이해해줬어야지!’
다희는 너무 속이 상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대부분의 직원이 자리를 비운 사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잡담 소리를 제외하면 사무실은 적막할 정도로 조용했다. 다희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참 앉아 있다가 커피라도 한 잔 내려 먹으려고 일어났다.
탕비실로 향하던 그녀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승원아……?’
습관적으로 쳐다본 자리에 승원이 있었다. 책상에 엎드린 채 멍하니 눈만 끔뻑거리는 그의 모습에 다희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너…… 왜 그러고 있어?’
나라 잃은 표정을 하고 축 늘어져 있는 꼴을 보는데, 가슴이 아픈 동시에 울화통이 터졌다.
‘지금 울고 싶은 사람이 누군데 네가 그러고 있어? 누가 보면 실연당한 사람인 줄 알겠…….’
문득 다희의 눈매가 가늘게 경련했다.
이제 보니 승원의 시선이 닿은 곳은 혜주의 자리였다.
*
“하아…….”
하루를 한숨으로 채운다는 게 어떤 건지 승원은 오늘 똑똑히 알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터질 것 같아서 온종일 한숨을 내쉬었더니, 나중엔 온몸에서 기력이 빠졌다.
할 일은 산더민데 집중은 안 되고, 더 있어봤자 시간만 축낼 게 뻔했다.
“내일 하자, 내일…….”
승원은 아직 다 끝내지 못한 업무를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야. 오혜주랑 사귀는 사람.
청천벽력과도 같던 주원의 선언은 선뜻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밤늦게 집에 돌아온 후에야 느꼈던 지독한 패배감.
‘난 왜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을까. 왜 이제야 알아버린 걸까. 이럴 거면…… 차라리 끝까지 모르고 지나가게 해주지.’
자기혐오는 스스로를 갉아먹고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묻고 싶었다. 형이 한 얘기가 진짜냐고, 나에 대한 마음은 손톱만큼도 남아 있지 않는 거냐고.
그러나 혜주를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형의 연인이 된 그녀를 보고 더 욕심이 나버리면 어떡해. 이제 와서 붙잡고 싶어지면 정말 어떡하냐고.
하루 종일 혜주의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퇴근하는 길.
승원은 삼총사가 늘 어울렸던 꼬칫집으로 향했다.
“어이쿠, 승원 씨 오랜만이네?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
머리에 흰 두건을 쓴 사장님이 격하게 그를 반겼다. 얼굴이 말랐다는 둥, 일이 힘드냐는 둥 친근하게 물어오는 사장에게 대충 대답해주고 승원은 자리에 앉았다.
혼자 다 먹지 못할 걸 알면서 셋이서 늘 함께 먹던 꼬치 세트를 주문했다. 사케와 소주를 한 병씩 주문해놓고 빈 잔에 번갈아 가며 따라 마셨다.
“하아…….”
또다시 저도 모르게 흐른 한숨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형의 말이 맞았다. 너무 괴로운데, 이 모든 게 제 잘못이라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개 같은 타이밍.
그래,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정신줄 놓고 있던 게 누군데.
“강승원…… 병신 같은 놈.”
승원은 자조하며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한 승원은 평소보다 빨리 취했다. 점차 시야가 흐려지고 졸음이 밀려왔다.
“승원 씨, 괜찮아? 정신 차릴 수 있겠어?”
어깨를 흔드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진다. 고개를 들 힘도 없어서 승원은 그대로 다찌 위에 얼굴을 기대고 잠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던 승원은 누군가 자신을 부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
처음엔 사장님일 거라 생각했는데 체격이 현저히 작았다. 가물가물한 눈을 부릅떠 봤지만 시야가 흐렸다.
“승원아. 집에 다 왔어. 정신 좀 차려봐.”
“……오혜주? 혜주 너 맞아?”
익숙한 목소리에 낯익은 체구.
승원은 필사적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여기 혜주가 왜 와 있는 거지?’
얼떨떨한 그의 눈에 뒤돌아선 채 도어록을 열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혜주한테 비밀번호를 알려줬던가? 하긴 아지트 비밀번호랑 똑같으니까…… 사장님이 연락한 걸까? 왜 혜주한테…….’
여러 생각이 물밀 듯이 범람했다.
작은 어깨와 보드라운 머리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는데 가슴이 울컥 진동했다.
너무도 그리웠던 그녀가 눈앞에 있다.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것 같았다.
디리릭-
도어락이 열리자마자 승원은 혜주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캄캄한 집 안, 개미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엔 오로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왜 이제야 왔어. 내가 얼마나…… 얼마나 기다렸는데.”
혜주의 두 손을 벽에 찍어누른 채 승원은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딴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이성이 휘발된 자리에 남은 것은 오로지 혜주에 대한 절박함 뿐이었다.
“그렇게 많이 기다렸어?”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너한테 다희는 뭐였는데?”
“실수…….”
놀란 듯 숨을 멈춘 혜주를 향해 승원은 다시 한번 뱉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
혜주의 눈동자가 얼핏 일렁인다 생각했다. 그대로 돌아선 그녀를 승원은 뒤에서 껴안았다.
“나 한 번만 용서해주라, 혜주야…… 내가 잘못했어.”
혜주는 돌아선 채 말이 없었다. 울고 있는 듯 그녀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부터는 고의야. 알아?”
“응, 절대 실수 안 해. 내가 다 책임질게. 내가 더 잘할게.”
한참 후에야 돌아선 혜주의 눈매가 빨갰다.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동자를 본 승원은 끓어오르는 욕심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흐읍……!”
승원은 찢어발기듯 혜주의 입술을 헤집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격렬하게 섞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