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얄미운 강주원! 못된 강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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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얄미운 강주원! 못된 강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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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얄미운 강주원! 못된 강주원!
2022.10.30.
“오옷, 잠깐만요! 막창 나갑니다!”
다다다다, 탁!
전자레인지에서 막창을 데워오던 루비가 불쑥 승원의 옆자리를 파고들었다. 거의 빛의 속도로 달려온 그녀가 뜨거운 손을 귓불에 대고 천연덕스럽게 헤헤 웃었다.
“손이 너무 뜨거워서 제일 가까운 자리로 왔어요. 자리 바꿔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혜주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제일 끝자리에 앉았다. 승원과 한 공간에 있는 것도 불편한데 바로 옆자리라니, 생각만 해도 부담스럽던 차에 고마울 따름이다.
‘오늘 두 번이나 루비 씨한테 도움을 받네.’
루비의 깜찍한 착각에 대해 짐작도 하지 못한 혜주는 루비의 거듭된 방해가 반갑기만 했다.
뒤풀이는 시끌벅적하게 이어졌다. 올라운드 미팅의 노곤함을 털어내려는 듯 남은 사람들은 신나게 술잔을 비워댔고, 혜주 역시 간밤의 피로를 잊은 채 분위기에 취했다.
치킨에 편의점표 불막창. 단출한 안주에도 술자리는 잘도 무르익었다. 두 박스 쟁여두었던 알코올이 똑 떨어지자 얼큰하게 취한 명환이 젓가락으로 굿거리장단을 치며 물었다.
“술 다 떨어졌다. 막내 누구야?”
마침 루비가 화장실에 간 터라 모든 시선이 혜주에게 쏠렸다. 대충 분위기를 읽은 혜주가 빠릿빠릿하게 엉덩이를 들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안 그래도 술기운이 올라오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혜주는 명환에게서 법인 카드를 받아들고 얼른 신발을 꿰었다.
그때 승원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여기 막내 한 명 더 있는데요.”
존재감 없이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터라 그가 자리에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들이 그제야 한마디씩 보탰다.
“어어, 그러네. 입사 연차로 따지면 승원 씨가 더 뒤지?”
“같이 다녀와요. 술병 무거울 테니 잘 들어주고.”
혜주는 휘적휘적 걸어와 운동화를 신는 승원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 혼자 다녀와도 되는데.”
“무거운 걸 어떻게 혼자 들어. 아무 말 안 할 테니 그냥 같이 가.”
“알았어.”
혜주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어?”
문을 열자마자 보인 커다란 실루엣에 혜주가 흠칫 놀라 한걸음 물러섰다. 때마침 밖에서 들어오고 있던 주원이었다.
이제 막 임원 회의를 끝낸 그가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보고 무표정하게 물었다.
“어디 가는 중입니까?”
“아, 술이 떨어져서 사러 나가던 참이었어요.”
혜주는 잘못하다 걸린 아이처럼 변명 조로 말했다. 주원은 두 사람을 보고 잠시 말이 없었다.
“저기…….”
어색함을 참지 못한 혜주가 막 입을 떼었을 때였다.
“내가 데려다주죠. 음주 운전할 생각이 아니라면.”
“네?”
“호텔 편의점 문 닫았습니다. 차로 5분 정도 가면 마트 있어요.”
“그럼 저도 같이…….”
다급히 끼어드는 승원을 주원이 힐끗 바라보았다.
“강승원 씨는 CFO한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지금요?”
“개발팀 예산 관련해서 논의할 게 있다고 합니다.”
아주 철저하게 사무적인 눈빛으로 주원이 턱짓했다.
“옆 방으로 가보세요.”
주원이 이렇게 나오니 승원도 할 말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동시에 721호를 나왔다.
그러곤 양쪽 방향으로 찢어져 걷기 시작했다.
*
차 안은 숨 막히게 어색했다.
같이 마트에 가자기에 화해의 제스춰인 줄 알았더니, 착각이었나 보다.
‘아니, 뭘 잘했다고 저렇게 입 꾹 닫고 운전만 하는 거야? 자기가 운전기사야, 뭐야?’
주원이 먼저 말을 걸면 모르는 척 화해하려 했던 혜주는 빈정이 상했다.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하다! 사과 한마디면 끝날 일이잖아. 어지간하면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이 오빠.’
상황이 이쯤 되니 이젠 자존심 싸움이다. 혜주는 주원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다가 이내 포기하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미처 몰랐다. 친구 사이엔 토라져도 금세 화해가 되는데 연인 사이엔 그게 참 어렵다. 특히나 시작한 지 열흘밖에 되지 않은 초보 연인에겐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마트에 도착한 후로도 두 사람은 냉랭했다. 혜주가 앞서 걸으면 주원이 뒤를 따랐다.
꿀맛 같은 일탈의 시간, 손을 잡고 걸어도 모자랄 그 시간에 두 사람은 따로국밥처럼 겉돌았다. 아까운 시간은 흘러만 갔고, 혜주는 점점 화가 치밀었다.
‘아니, 내가 뭔 대역죄인이야? 왜 저렇게 사람을 불편하게 해?’
화해 의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자존심만 남았다.
혜주는 일부러 걸음을 빨리하며 주원과 떨어지려 애썼다.
소주 한 박스를 계산하고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주원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줘.”
카트를 막 반납하고 돌아서던 혜주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들 수 있어요.”
한눈에 보기에도 무거운 박스였다. 주원은 성큼성큼 걸어가 다시 한번 말했다.
“달라고.”
혜주는 그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혜주는 무거운 소주 박스를 혼자서 낑낑대며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 주원은 한 번 더 권하는 배려 따위는 발휘하지 않았다. 치졸한 걸 알지만 그 역시 무척이나 화가 치민 상태였다.
‘먼저 말실수를 한 게 누군데 사과 한마디 없이 내빼려고 해? 뭘 잘했다고 툴툴거리냐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팽팽한 기 싸움에 애꿎은 구둣발만 거세게 바닥을 퉁탕거렸다.
“아씨, 무거워 죽겠네.”
기분이 상해 쿵쿵거리며 주차장을 가로지르던 혜주가 무릎 위에 소주 박스를 놓고 한 번 끌어올렸다. 소주병 무거운 거야 익히 알지만 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무거웠다. 주차장이 좁기라도 하면 괜찮을 텐데 하필 주원이 차를 댄 곳은 마트 입구에서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얄미운 강주원! 못된 강주원!’
혜주는 속으로 욕을 욕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퍽!
차량 사이를 가로지르던 혜주의 팔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앗!”
혜주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다시 보니 주차된 차에 소주 박스 모서리가 부딪쳐 백미러가 접혀 있었다.
‘헉.’
뜨끔한 혜주가 소주 박스를 내려놓았다. 접힌 백미러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원상태로 복구하고 살펴보니 다행히 특별한 이상은 없어 보였다. 혜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주 박스를 들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때였다.
“뭐야? 정신 나갔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차량의 보조석 문이 벌컥 열렸다. 혜주는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상식적으로 컴컴한 주차장에, 그것도 주차된 차에 사람이 타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을 하겠는가!
“남의 차를 망가트려 놓고 튀겠다는 거야? 이거 뺑소니야, 알아?”
조수석을 젖혀 잠을 자고 있던 남자가 뒷목을 문지르며 윽박을 질렀다. 입에서 나는 시큼털털한 냄새로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술에 취한 듯했다.
“죄송합니다. 지나가다가 조금 부딪혔어요. 다행히 망가진 곳은 없는 것 같더라고요.”
“망가진 곳이 있는지 없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부딪힐 때 거의 천둥소리가 나던데!”
“안에 계셔서 더 크게 들린 모양인데 정말 살살 스친 정도예요. 지금이라도 작동해보시고 만약 문제가 있다면 제가 어떻게든 해결을…….”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도! 스크래치 난 거 안 보여?”
“그건 그냥 생활 기스 같은데요.”
“무슨 헛소리야? 내가 차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데. 차에 기스 날까 봐 자동 세차도 안 하는 사람이라고!”
자동 세차를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세차를 안 하시는 거 아닌가요.
뽑은 지 이십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차량의 남루한 상태에 혜주는 그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아무튼 죄송합니다. 부딪힌 건 제 잘못이 맞으니 사과드릴게요.”
“이게 사과 한마디로 끝날 일이야?”
“원하는 게 뭔데요, 그럼.”
혜주는 슬슬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까치집이 된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긁적이던 남자가 손을 척 내밀었다.
“수리비 내놔.”
역시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릴 땐 돈으로 귀결되는 법이구나.
혜주는 실소하며 되물었다.
“백미러에 기스 난 건 얼마로 계산되는데요?”
“대충 계산이 안 서? 이 정도 기스면 통째로 갈아야 하잖아! 요새 백미러 하나가 얼만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대여섯 장만 챙겨주슈!”
대여섯 장이라는 게 오, 육천 원을 말하는 건 아닐 거다.
얼토당토않은 금액에 혜주는 한숨을 쉬며 지갑을 꺼냈다. 물론 돈을 주려는 건 아니었다. 명함을 건네고 보험사에 접수 후 연락 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때 성큼성큼 다가온 발소리가 바로 뒤에서 멈췄다.
“지갑 넣어, 오혜주.”
기다란 그림자가 정수리를 덮었다.
“뭐, 뭐야, 당신은?”
느닷없이 등장한 주원을 보고 취객이 뜨끔하여 목을 움츠렸다. 여자 앞이라고 큰소리 떵떵 칠 땐 언제고 저보다 머리통이 두 개는 큰 남자가 나타나니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왜 끼어들어? 이 여자 일행이야?”
주원은 고개를 숙여 백미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곤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고작 백미러 한 번 접힌 걸로 통째로 교체하시겠다? 이거 순 도둑놈이네.”
“뭐? 도둑놈? 이봐요, 자기 차 아니라고 말 함부로 하지 마쇼! 여기 잔기스 안 보여요?”
“원래 있던 기스인지 지금 접촉으로 생긴 건지 증명할 수나 있고?”
“소리가 엄청 컸다고요. 진짜 천둥이라도 친 줄 알았다니까!”
귓불이 벌게진 남자가 과장된 몸짓으로 고함쳤다. 주원은 힐끗 차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충 보아하니 연식이 이십 년은 된 것 같은데. 당장 폐차장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차 백미러 한 번 접혔다고 대여섯 장 운운하는 게 제정신입니까?”
“폐차는 무슨 폐차! 연식은 오래됐지만 아직 이십만 키로도 안 타서 쌩쌩하다고! 아니, 생각할수록 열 뻗치네. 당신이 뭔데 내 차를 폐차하라 마라 해? 낡은 차면 뭐 아무나 와서 꽝 부딪히고 가도 되는 거야? 에이, 몰라! 법대로 해! 법대로!”
주원은 낮게 실소했다. 사실 가까이서 살펴보고 정말 기스가 난 거면 당연히 보상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세월의 흔적이 묻은 잔기스밖에 보이지 않는데 무슨 돈을 달라는 건지. 순 억지가 따로 없었다.
‘아무래도 여자 혼자 있다고 만만히 보고 덤빈 모양이지.’
주원은 그게 화가 났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제 여자를 낮잡아 보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법대로 해도 쫄릴 건 없는데 내가 지금 화 풀 대상이 좀 필요해서.”
주원이 성큼 한 발을 내디뎠다. 긴 다리를 쭉 뻗어 올리는 그의 모습이 남자의 눈에 비쳤다.
“어어…… 억?”
긴 다리는 허공에서 유려하게 한 번 접혔다가 곧장 백미러로 직행했다.
퍼어억!
와장창 부서지는 백미러의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남자의 눈에 콕 박혔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당신 미쳤어?”
처참하게 부서져 대롱거리는 백미러에 남자가 경악했다. 주원은 척 발을 딛으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어차피 교체한다며.”
싸늘한 조소가 주차장 바닥에 낮게 깔렸다.
“깽값 넉넉히 물어줄 테니까 먹고 떨어져.”
촤르르!
오만 원짜리 열 장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