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 확실히 알려줄 테니 잘 배워 (45/121)


#45. 확실히 알려줄 테니 잘 배워
2022.11.03.



 
휴대폰 불빛까지 비춰가며 오만 원짜리 열 장을 줍줍한 남자가 찍소리 없이 사라졌다.

자리에 남은 것은 처참하게 부서진 백미러 파편과 침묵뿐.

놀란 혜주는 상황이 해결된 것에 대한 고마움보다 주원의 과격한 행동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더 컸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분명 주원은 혜주를 얕잡아본 남자에게 톡톡히 갚아주기 위해 화살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그 화살은 혜주의 가슴으로 꽂히고 말았다.

화풀이 대상이 필요하단 주원의 말이 마치 자신을 향한 것으로 느껴졌다. 혜주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화풀이 잘했어요? 백미러 부수고 나니 속이 시원합니까?”

쏘아붙이는 말에 주원의 눈썹이 구겨졌다.


“또 뭐가 불만인데.”

“화풀이 대상이 필요하다면서요. 애초에 왜 그렇게 화가 난 건데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흔들린다는 말이 기분 나빴을 거라는 거 인정해요. 그런데 고작 말 한마디 가지고 이렇게까지 할 일이에요?”

“오혜주.”

“다툰 날은 경황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생각할수록 너무하잖아요! 쓸데없는 데 열 낸 것도 모자라 어젠 하루 종일 연락도 없고, 오늘은 아는 척도 안 하고!”

나 지금 혼나고 있는 건가.

칭찬받으려고 한 행동은 아니지만 그래도 널 위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일 줄은.


“아까도 그래. 승원이랑 일부러 같이 있던 거 아니거든요? 나도 불편해 죽을 뻔했다고요. 그런데 우리 둘 보자마자 안색부터 굳었잖아. 같은 회사 다니다 보면 안 마주칠 수도 없는데, 대체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예요?”

다다다 쏟아내는 불만에 주원은 낭패감을 맛보았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사과를 하고 싶어 불러낸 건데 타이밍을 놓친 것뿐이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다고, 별것도 아닌 것에 꼬투리 잡아 미안하다고, 그 말을 하고 싶었다.

냉정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혜주를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보여준 모습이 제법 신사다웠지.”

주원은 강한 시선으로 혜주를 응시했다.


“오빠고, 대표고, 친구의 형이기도 하고. 그런 주제에 꼴사납게 굴 순 없어서 착한 척 굴었어.”

이건 뭐지. 새로운 방식의 선전포고인가.

아리송한 혜주가 전투 의지를 불태우며 주원을 노려보았다. 너 이제 잡은 물고기니 앞으로 착한 척은 그만두겠다는 뉘앙스면 바로 들이받을 작정이었다.

이어진 주원의 말은 뜻밖이었다.


“그런데 오혜주. 너한테 그냥 난 남자야.”

“……그래서요?”

“말 한마디에 마음 졸이고 질투하고 치졸해지고. 행여 나 버리고 간다고 할까 봐 뻔히 알고 있는 사실도 모른 척했어.”

잠깐의 공백 후 주원이 말을 이었다.


“승원이가 널 좋아한다는 거 알고 있었어.”

쿵. 혜주의 심장이 떨어졌다.


“알고 있었다고요? 대체 언제부터…….”

“그 말을 들은 내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주원의 눈동자가 불빛에 일렁였다.


“아…….”

혜주는 그제야 예민했던 주원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승원에 대한 혜주의 마음을 알고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혜주에 대한 승원의 마음까지 알게 된 그가 느꼈을 감정은 어땠을까.

아마도 보이지 않는 끈이 두 사람 사이에 연결된 기분이었을 거다. 나만 아니면 두 사람이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바보 같은 상상. 서로에게 애틋한 두 사람을 갈라놓은 듯한 아주 더러운 기분.

커다란 두 손이 혜주의 어깨를 감쌌다.


“너에 관한 어떤 것도 사소하지 않아. 흔들린다는 말, 그래, 고작 그 한마디.”

낮은 음성이 묵직하게 혜주를 때렸다.


“그 한마디가 꼭 선언처럼 느껴지더라. 가버릴 것 같았어, 영영.”

“나한테 그 정도 신뢰도 없어요?”

“널 못 믿어서가 아니야. 네가 승원이와 보낸 세월이 무서운 거야.”

혜주는 급격히 미안해졌다.

주원이 느꼈을 감정은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못하고 제 감정에만 급급했었다. 별생각 없이 뱉은 ‘흔들린다’는 한마디가 주원에게 어떤 뜻으로 다가왔을지 이제야 확실히 이해가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줄걸.’

괜한 자존심 싸움에 흘려버린 시간 속에서 상처는 곪고 둘은 서로 아팠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없어 보이는 거 아니까.”

미안한 표정의 혜주를 힐끗 바라본 주원이 자조했다.


“나 너한테 미친놈이야. 기왕이면 곱게 미치는 게 목표였는데, 뜻대로 안 되네.”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린 그가 이틀 내내 입술에 맴돌았던 말을 뱉었다.


“미안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굴어서. 반성할게. 반성하고 있어.”

“그럼 거기 손 들고 있어요.”

“진심?”

“응, 진심으로.”

주원은 주저 없이 두 팔을 들었다.


“들었어.”

하늘 같은 오혜주가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나.

이깟 일로 벌까지 세우는 여친은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타입이긴 한데, 나름 화끈한 맛도 있고…….

“쪼옥.”
 


“!”

성큼 다가온 혜주가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췄을 때 주원은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벌서는 중이라 무방비하게 열린 옆구리로 부드러운 팔이 착 감겼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강주원이에요. 강승원이 아니라.”

가슴팍에 뺨을 기댄 혜주가 토끼 같은 눈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그 사랑스러움에, 주원의 계절이 다시 한번 바뀐다.


“이런 게 벌이라면 백 번도 더 서겠는데.”

갈증에 목이 탄 주원이 곧장 고개를 숙여 혜주의 입술을 머금으려 했다. 그러나 혜주가 그보다 한발 먼저 물러난 바람에 열이 잔뜩 오른 입술은 허공만 스쳤다.


“잠시만요. 선물 있어요.”

혜주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원은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다셨다.

지금 선물 같은 건 필요 없는데. 설사 그 주머니에서 주먹만한 다이아몬드가 튀어나온다 해도 오혜주 입술만큼 탐나지는 않을 것 같다.


“이거요.”

혜주가 주먹을 착 내밀었다. 하나하나 손가락을 펴자 손바닥 위에 올려진 동전 하나가 보였다. 아까 장 볼 때 카트에 넣었던 백 원이었다.


“앞으로 이걸 나라고 생각해요.”

너랑 하나도 안 닮은 걸 주고서 너라고 생각하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냐.

주원은 오혜주와 동전의 상호유사성을 찾아내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래, 너 닮아 동글동글 귀엽다.”

“풉!”

혜주의 입가에 싱그러운 웃음이 번졌다.


“그런 게 아니라요.”

혜주가 동전을 앞뒤로 뒤집어 주원에게 보여주었다.


“오혜주는 동전이에요. 앞뒤 분명한 사람이라고요. 내가 앞이라고 하면 앞인 거야. 중간은 없어요.”

작은 감동이 먹처럼 가슴에 번졌다. 예쁜 게 예쁜 소리만 하니 진짜 미치겠다.


“……나 울어도 되냐?”

“울면 버리고 갈 거예요.”

주원의 바지 주머니에 동전을 쏙 넣어준 혜주가 부끄러운 듯 돌아섰다.


“아무튼 앞으로 불안해질 때마다 이거 봐요.”

쪼르르 달아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원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평생 가보로 간직할 물건이 생겼다. 작은 주제에 무겁고, 흔한 주제에 유일한 백 원짜리 동전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한 번 만져본 주원이 곧 소주 박스를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같이 가!”

사랑은 온화한 계절을 부르고, 계절은 컴컴한 어둠을 빛으로 물들인다.

이렇게 또다시 봄이 온다.

*

방으로 돌아온 주원은 침대에 걸터앉아 아직 온기가 남은 입술을 매만졌다.

입술 위에 살짝 와닿았던 보드라운 감촉.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달콤했던 입맞춤.

어떤 말보다 안심을 주는 그녀의 온기였다.


“아…… 보고 싶다.”

주원은 중얼거리며 침대에 벌렁 누웠다.

방금 헤어졌는데 벌써 그립다. 마음 같아선 혜주의 손을 붙잡고 이 방으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그럴 수 없었다. 소주를 전해줘야 한다며 721호로 향하는 그녀의 손에 몇 번이나 입맞춤을 했는지.


“방은 쓸데없이 왜 이렇게 넓어.”

두 명이 같은 방을 쓰는 직원들과 달리 임원은 한 명당 하나의 룸이 배정되었다. 그건 임원에 대한 서비스라기보다는 직원에 대한 배려에 가까웠다. 높은 분과 같은 방을 쓰면 불편함에 몸부림칠 직원들 사정을 고려해 일부러 단독 객실을 잡은 것이었다.

텅 빈 방 안에서 느껴지는 적막이 주원의 그리움을 배가시켰다.


“어디 오혜주 데려올 방법 없나?”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주원은 손목시계를 힐끗 보곤 몸을 일으켰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구야?”

아마도 승원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대표님 호텔 룸을 두드릴 용자는 많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열린 문틈으로 보인 얼굴은 승원이 아니었다.


“오혜주?”

머릿속으로 내내 곱씹던 얼굴이 눈앞에 보이니 만화책에서 툭 튀어나온 사람인 듯 현실감이 없었다.

주원은 누가 볼세라 혜주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열려 있던 방문이 스르륵 닫혔다.


“어떻게 왔어?”

“가보니까 다들 많이 취했더라고요. 소주 갖다 주고 좀 앉아 있다가 눈치 봐서 빠져나왔죠.”

혜주가 생긋 웃으며 덧붙였다.


“보고 싶어서요.”

“잘 왔어.”

주원은 그대로 혜주의 손목을 당겨 안았다.

품에 쏙 들어온 그녀의 몸에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 따뜻했고 부드러웠고 말랑말랑했다. 그녀를 안으니 하루의 노곤함이 단번에 날아갔다.


“들어가자.”

주원은 혜주의 허벅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꺅, 작은 비명을 내지른 혜주가 목을 감싸자 가벼운 몸이 덥석 들려 주원의 허리에 안착했다. 주원은 그대로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탈싹.

주원은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혜주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그녀의 향기에 아까부터 타던 목이 아예 바짝바짝 말랐다. 주원은 흘러내린 혜주의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넘기며 한 손으로 침대를 짚었다.


“이러고 싶어 하루 종일 미칠 뻔했어.”

그가 다가갈수록 혜주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머리를 쓸어내린 손이 그녀의 등을 받쳤다. 서서히 입술이 가까워지고 서로의 호흡이 맞닿았다.

막 입술이 맞물리려는 찰나, 혜주가 검지로 주원의 입술을 꾹 눌렀다.


“잠시만요. 할 일이 있어요.”

“무슨 할 일.”

“잠깐이면 돼요.”

아니, 지금 이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남자의 타는 속도 모르고 아주 말려 죽이려고 한다. 주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조금 물렸다.

이제 보니 혜주는 옆구리에 커다란 공책을 끼고 있었다. 회의 시간에 늘 들고 다니는 A4 크기의 커다란 수첩이었다.

‘설마 이 시간에 일 얘기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이거 혹시 말로만 듣던 스케치북 프러포즈?’

스케치북의 용도를 떠올리자마자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혜주야, 그거 아니야……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오글거리는 것에 내성이 없는 주원이 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혜주는 간절한 그의 바람에 아랑곳없이 수첩을 펼쳐 들었다.


“짜잔.”

예상외로 수첩은 빈 페이지였다.


“뭐야, 이거?”

혜주는 씩 웃고는 주머니에서 야무지게 펜을 꺼냈다. 그러곤 페이지 중간에 세로로 긴 선을 쭉 그었다.


“아까 오빠가 한 말이 자꾸 신경 쓰여서요. 승원이랑 내가 보낸 세월 때문에 불안하다고.”

“……그런데?”

“그렇다고 같이 일하는 사이에 아예 안 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빠랑 나 사이에 룰을 정하려고요.”

“룰?”

“일명 OX 리스트!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될 것’을 미리 정해서 지키는 거죠. 서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

아, 깜찍한 오혜주. 넌 정말…….


“우선 내 생각부터 말할게요. 일단 개인적으로 만나는 건 엑스. 그렇지만 업무 때문에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을 때는 미리 얘기할게요. 그리고 회식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바로 옆자리는 엑스.”

주원은 룰을 정해 써 내려가는 혜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스스로를 기특해하며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예뻤다. 사소한 일로 크게 다툰 게 내내 신경 쓰여 수첩까지 동원한 그녀의 노력이 고마웠고.

재잘대는 입술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손가락이, 흘러내린 앞머리가, 그리고 반짝이는 콧날이. 그녀의 모든 게 몽글몽글하게 가슴이 들어차 터질 것만 같았다.


“오빠는요?”

한참을 써 내려가던 혜주가 주원을 보며 물었다.

주원은 타는 듯한 시선으로 혜주를 응시했다. 끓어 넘치는 감정을 더는 누를 수가 없었다.


“확실히 알려줄 테니 잘 배워.”

척.

그의 손이 침대를 짚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건 전부 다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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