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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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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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악몽
2022.11.10.
주원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혜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막말로 내가 누나랑 뭘 했다고 이래? 왜 이렇게 끈질기게 구냐고.
-키스…… 했잖아.
-그래, 꼴랑 키스. 장난처럼 했던 키스 한 번.
-너한텐 아무것도 아니었니?
-키스 한 번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재주다. 겨우 한 달 사귄 걸로 이 정도로 집착하는 거 정신병이라고. 알아?
모진 말을 퍼붓고 돌아선 그날은 바람이 유독 눅눅하던 어느 수요일이었다.
혜림의 스토킹으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해 모의고사를 망친 날이었다.
그날도 혜림은 집 앞에서 주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운 날씨도 아닌데 까만 코트를 입고서, 손에는 빨간 우산을 들고서.
헤어지자고 말한 직후부터 시작된 스토킹에 주원은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소리도 질러봤고, 경찰도 불러봤고, 제발 이러지 말라고 부탁도 했었다.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각서까지 쓰고서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집 앞에 와 있는 그녀를 주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풋풋한 첫사랑으로 끝났다면 참 좋았을 인연이었다. 그러나 주원에게 거의 반 미쳐버린 혜림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고 주원의 마음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그녀는 끊임없이 제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게 주원을 얼마나 공포스럽게 하는지도 모르고.
-사랑해, 주원아.
물끄러미 이 층 방을 올려다보는 시선은 주원을 미치게 했고.
-제발 돌아와. 나 한 번만 봐줘.
눈으로 전하는 애원은 주원을 시시각각 갉아먹었다.
수능을 앞두고 학업에 매진해도 모자랄 판에 주원은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누나가 백날, 아니 천 날을 기다려도 다시는 안 돌아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고! 할 수만 있다면 함께했던 시간을 통째로 도려내고 싶어. 사람을 왜 이렇게 미치게 만들어!
견디지 못해 혜림을 몰아붙였던 날, 그녀가 죽었다.
그녀가 스스로 목을 맨 원룸은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몇 개 없는 옷가지와 노끈으로 가지런히 묶여 있는 전공 책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인 라면과 식료품 등등.
정리되지 않은 건 주원과의 흔적뿐이었다.
그녀의 발밑엔 수업 중 몰래 주고받았던 쪽지와 사진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그 중엔 하교하는 주원을 몰래 찍은 사진도 있었다. 커튼이 굳게 쳐진 이 층 창문을 찍은 사진도, 늦은 밤 창가에 드리운 주원의 그림자를 찍은 사진도.
‘내가 죽어도 너와의 관계는 정리되지 않아.’
마치 그렇게 경고하는 듯했다.
악몽은 그녀의 장례식이 끝나고 한 달 반이 흐른 직후 시작되었다.
꿈은 언제나 같았다. 자다가 눈을 뜨면 혜림이 죽었을 때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때는 스탠드형 옷걸이가, 어떤 때는 문고리에 걸어둔 코트가, 또 어떤 때는 벽에 걸린 액자가 혜림으로 변해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마치 바람이 부는 듯 흔들흔들. 얼핏 보면 춤을 추는 듯도 했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면 온몸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처음 어렴풋했던 실루엣은 점차 형상을 갖추어 주원의 꿈에 나타났다. 그녀의 눈코입이 선명해지고, 목에 감긴 노끈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감은 눈을 떴을 때, 주원은 정신과를 찾아갔다.
-정신적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로 인한 수면장애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그렇게 진단을 내렸다.
‘돌팔이 같은 놈.’
주원은 의사의 진단을 믿지 않았다.
의사가 처방해준 약은 악몽을 꾸고 난 후 불안감을 조금 잠재워주기만 할 뿐 근본적으로 악몽을 없애주진 않았다.
거의 매일 악몽에 시달리며 주원이 깨달은 건 죽기 전엔 결코 혜림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혜림의 죽음 후 족쇄처럼 채워진 악몽.
지금껏 사람 구실 하며 살아온 게 기적일 정도로 피폐한 삶이었다. 육체를 혹사시키면 간혹 깨지 않고 자는 날이 있어서 무리하게 운동을 하는 게 습관이 되었고, 비관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일에 몰두했다.
그게 지금의 강주원을 만들었다. 불행 위에 쌓아 올린 금자탑이었다.
‘매일 똑같은 악몽이라면 좀 나았을까. 그래, 어쩌면.’
불행히도 혜림은 조금씩 선명해졌다. 인지하지 못한 새 점차 가까워지기도 했다. 멀리 옷장 근처에서 춤을 추던 그녀는 이듬해 방 안 한복판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침대맡으로, 결국 오늘은 바로 코앞까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느껴진 냉기가 소름 끼치도록 생생했다. 그것에 닿으면 온몸의 생기를 빼앗겨 미라가 될 것 같았다.
“하아, 하아…….”
주원은 가쁜 숨을 내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호흡하기가 버거웠다.
습관적으로 뻗은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이런 일을 대비해 집에선 늘 머리맡에 안정제를 두는데 아침에 회의자료를 준비하느라 약을 챙겨오지 못했다.
주원은 낭패감에 입술을 짓씹었다.
“제기랄.”
그는 터질 것처럼 뛰는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헐떡였다.
핏발 선 눈동자 위로 땀이 뚝뚝 떨어졌다.
*
며칠 후.
태양식품 이보석 사장이 데이터스 코리아를 방문했다. 본격적인 서베이 배포를 앞두고 마지막 미팅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먼길 오시느라 고생하셨겠네요. 혼자 오신 거예요?”
혜주가 살갑게 그를 맞았다.
신월도 이후 두 번째 만남이지만 컴퓨터 사용에 서툰 그를 위해 미팅 결과를 보고하느라 종종 통화를 하곤 했었다. 그래서인지 오랜만의 만남도 어색하지 않았다.
“어이구, 바쁜 사람이 뭘 터미널까지 마중을 나오고 그려? 택시 타고 가면 금방이랑께.”
“회사에서 멀지 않아서 괜찮아요. 할아버지, 아니 오늘은 미팅 때문에 오신 거니 사장님이라고 해야겠죠? 아무튼 사장님 오시는데 이 정도 거리는 껌이죠, 하하!”
“오 대리는 언제 봐도 밝아서 좋구먼. 꼭 우리 딸래미 보는 것 같어.”
두 사람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혜주의 차로 향했다.
“그런데 오늘은 사장님이 직접 오셨네요?”
“그래도 최종 미팅엔 사장이 참석하는 게 예의잖여.”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참에 얼굴도 뵙고 좋네요.”
신월도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 두 번의 미팅이 더 있었다.
통상의 경우 사업팀이 거래처를 직접 방문해 미팅을 진행하는 게 관례인데 이례적으로 태양식품에선 직접 서울로 방문하겠다고 했다.
배 타고 먼 곳까지 가지 않아도 되니 혜주 입장에선 편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쪽에선 참 불편한 일일 터였다. 굳이 수고를 감수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혜주는 고마운 마음으로 더 열심히 미팅을 준비했다.
지난 두 번의 미팅엔 금석이 참여했다. 진행 중인 서베이 초안을 공유하고, 추가하고 싶은 문항에 대해서 논의했다. 적당한 비용에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기 위해 문항 수를 조절하기도 했다.
간혹 까탈스러운 고객사를 만나면 수십 번의 미팅을 진행해도 결과물이 더뎌지기 마련인데, 금석은 소탈한 성격이라 회의가 수월했다. 좋은 분위기 안에서 좋은 결과물이 나온 건 당연했다.
“금석이한테 대충 보고는 들었어. 서베이가 기똥차게 나왔다고 하대?”
“저희랑 함께하시면 태양식품 최대 매출 찍으실 거라고 호언장담 드렸잖아요. 그 약속 지키려고 진짜 머리에 쥐 날 때까지 회의했어요.”
“어이쿠, 이런 똑순이를 봤나! 자네 보니 내 속이 든든허구먼. 내 딸래미도 자네처럼 똑부러진 놈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딸 이야기를 입에 담는 보석의 눈매가 조금 서글퍼졌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이금석 부장님도 동생 얘기를 하면서 근심하는 표정을 지었었지.’
문득 혜주는 태양식품의 고명딸이 궁금해졌다.
“지난번에 신월도에 갔을 때도 그렇고, 따님 얘기는 통 못 들은 것 같아요. 같이 안 사시는 거예요?”
운전을 하며 혜주가 질문을 던졌다.
“우리 딸은 서울에 살어. 늦둥이라 자네보다 나이가 어리다네, 허허.”
“우와, 정말요?”
“내가 그놈 낳으려고 위로 아들만 줄줄이 셋을 낳았당께. 딸 하나 얻겠다고 마누라 들들 볶아서 쉰 살에 얻은 딸이여, 그것이.”
“늦둥이에 막내딸이라 엄청 애지중지하셨을 것 같아요.”
“그랬제. 그놈은 내 맴을 눈곱만치도 모르지만.”
보석의 목소리가 애잔했다. 단순히 철없는 딸을 탓하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보석의 눈 아래 짙게 깔린 서글픔에 혜주는 가슴이 아련했다. 이렇게 되니 얼굴 한 번 못 본 금지옥엽의 속사정이 더욱 궁금해진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족들이 이렇게 아끼는 마음을 따님이 모를 리가 없어요. 너무 상심 마세요.”
“그걸 아는 녀석이 되도 않는 놈이랑 눈이 맞아 집을 쳐나가?”
엑. 집을…… 쳐나가?
“말 나온 김에 어디 한번 물어나 봅시다. 그놈 직업이 백수에 공부도 시원찮게 했다고 하더구먼. 깎아놓은 밤톨맹키로 얼굴은 반지르르하다만 그거 믿고 팽팽 놀아서 가진 건 불알 두 쪽뿐인 놈이여. 그런 놈을 애인이라고 데려왔는데, 반대 안 헐 부모 있당가?”
“아…….”
“가진 게 없으면 양심이라도 있어야제. 방세 낼 돈도 없어서 내 딸래미한테 수시로 꿔가는 놈이여, 그게. 배알도 없는 놈이라 이거여!”
보석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운전을 하던 혜주는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게요. 그런 나쁜 놈을 애인이라고 데려왔으면 저 같아도 반대했겠어요!”
혜주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치자 보석은 더욱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그렇지? 내가 모진 게 아니제?”
“당연하죠! 저라면 머리를 빡빡 밀어 집에 들어앉혔을 거예요!”
“안 그래도 한 번 밀긴 혔어…….”
“네엑? 진짜로요?”
“은석이랑 동석이가 양쪽에서 붙잡고 금석이가 밀었제. 그 일로 앙심을 품고 집을 쳐나가 버렸당께! 이러니 내가 속이 안 터지고 배겨?”
헉. 아무리 그래도 진짜 머리를 밀어버렸을 줄이야.
드라마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인데 어지간히 화가 나서 그랬을까 싶다. 혜주는 이름도 모르는 금지옥엽의 잘려나간 머리카락에 애도를 표했다.
“머리 민 건 너무하셨지만, 할아버지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네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연락 뚝 끊고 잠적해버렸당께! 카드를 끊으면 기어들어 올까 해서 끊어도 봤는디 꿈쩍도 안 하더라고. 여간 독한 놈이 아니여, 고것이.”
어느새 차가 주차장에 진입했다. 출입문 가까운 곳에 차를 대고 혜주가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제 팔 붙잡으세요.”
“고맙네.”
혜주는 보석의 불편한 걸음을 배려해 천천히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엘리베이터는 고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전광판의 숫자를 바라보던 보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디, 오 대리. 내가 부탁하나 혀도 될까?”
“네, 당연하죠. 뭔데요?”
“실은…… 이 얘길 허면 자네가 좀 실망할 것도 같은데…… 흠흠, 내가 꼭 그것 때문에 자네 회사에 의뢰를 헌 건 아니구…… 아무튼 내 딸래미가 자네 회사에…….”
딩동!
대체 무슨 부탁이기에 저렇게 망설이는 걸까 싶은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스르륵 열린 문 안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에 혜주의 팔을 붙잡은 보석의 손아귀에 힘이 꾹 들어갔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