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 루비 (48/121)


#48. 루비
2022.11.13.



“아빠?”

회의실에 홀로 올라온 혜주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루비 씨가 태양식품의 고명딸이었단 거야? 세상 참 좁다, 좁아…….”

하얗게 질린 루비가 보석을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모습을 보니 충격이 밀려왔다. 보석이 막내딸 얘기를 종종 하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그게 루비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좀 이상하긴 했어.”

지나고 나서야 깨달은 거지만 이 계약은 시작부터 수상한 구석이 많았다. 첫 만남 때 데이터스 코리아의 사내 분위기를 꼬치꼬치 물어보던 삼 형제와 사업팀의 이모저모에 대해 궁금해하던 묘한 모습들.

처음엔 그게 파트너사에 대한 관심인 줄로만 알았는데, 돌이켜보니 루비가 일하는 회사가 제대로 된 곳인가 파악하려던 심산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루비는 신월도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했다. 배 시간부터 티켓팅 노하우, 신월도 맛집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네. 그러고 보니 이름도!”

금석, 은석, 동석 그리고 루비.

누가 이보석의 아들딸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광물 이름이다. 이 정도면 그냥 대놓고 광고하는 수준이었다.

‘우린 남매입니다. 우리 아빠가 바로 이보석이에요!’

이렇게나 눈에 빤히 보이는데 눈곱만치도 의심하지 못했던 자신이 참 둔하게 느껴졌다.


“아니 뭐, 늦둥이가 그 정도로 늦둥이였는지 내가 알았냐고.”

혜주가 투덜거리며 푸르르 입바람을 뱉었다.

사실 그녀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한 건 나이 차이 때문이었다. 칠순이 훌쩍 넘은 보석은 할아버지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노쇠했다. 새하얀 백발에 듬성듬성한 눈썹까지, 누가 봐도 아버지보단 할아버지 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에 반해 루비는 혜주보다도 어렸다. 금석, 은석, 동석 삼 형제의 나이가 마흔이 훌쩍 넘어가니 막내딸이라고 해봐야 서른 중반쯤 되었겠거니 생각했던 혜주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루비 씨는 왜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혜주가 턱을 괸 채 고개를 갸웃했다.

같은 사업팀이니만큼 루비는 혜주가 처음 태양식품에 제안서를 보낸 때부터 진척된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만약 태양식품과 어떤 식으로든 얽히는 게 싫었으면 사실대로 털어놓고 말리기라도 해야 정상인데…….


“하긴, 말린다고 해서 계약을 안 할 수는 없었겠구나.”

태양식품과의 연간 계약은 사업팀 목표 매출의 10퍼센트에 달하는 주요 사업이었다. 직원의 가정사 때문에 당장 엎어질 만큼 가벼운 계약이 아니란 뜻이다.

사업팀의 일원으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루비로서는 모르는 척하는 게 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삼십 분 후 보석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허이. 요 앞에서 딸을 마주칠 줄을 몰랐지 뭔가? 허허.”

짧은 사이 많은 일이 있었는지 부쩍 수척한 얼굴이었다. 혜주는 준비해 둔 호박팥차를 얼른 내어주었다.


“얘기 잘 나누고 오셨어요? 루비 씨가 사장님 딸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얘기는 무슨, 쌈박질이나 한참 하다 왔제.”

“쌈박질이요?”

“고놈이 어찌나 쌈닭처럼 달려들던지 하마터면 늙은 애비 골로 보낼 뻔했당게.”

보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그를 보니 혜주의 근심도 더해졌다.

부녀지간의 골이 생각보다 더 깊은 것 같아 걱정스러운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계약이 어쩐지 위태롭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계약엔 보석 부자의 사심이 가득 들어간 것 같았다.

집 나간 딸이 걱정되어서일 수도 있고, 연락을 뚝 끊어버린 딸을 감시하려는 명목일 수도 있고. 아무튼 순수한 의도로만 계약이 이뤄진 것 같지는 않다.

데이터스 코리아의 연간 실적을 끌어올린 큰 계약을 제힘으로 따냈다는 성취감에 도취되어 있던 혜주로서는 김이 팍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희 계약도 루비 씨 때문에…….”

“그런 건 결단코 아니여!”

풀 죽은 목소리로 묻는 혜주에게 보석이 단도리를 했다.


“처음에 회사로 메일이 날아왔을 땐 좀 놀라기는 혔지. 집 나간 막내가 다닌다는 회사에서 연락이 왔으니 놀라지 않았겄어?”

보석이 그때를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막내는 집을 나가 연락이 뚝 끊겼지, 카드도 끊었지, 그렇다고 제 발로 나간 녀석을 경찰 신고를 할 수도 없고 말이여. 참 내 속이 말이 아니었지. 처음엔 막내가 다닌다는 회사가 어딘지도 몰랐어. 어느 날 동석이가 그러더라고. 루비 사귄다는 남친놈 SNS? 거기서 봤더니 이쪽 회사 근처에서 데이트를 하더라고 말이여. 우리도 그때 안겨. 루비 다닌다는 회사가 여그인 줄은.”

“그러셨군요.”

“처음에 오 대리한테 메일이 왔을 때 아들놈들은 옳다구나 싶었을 거여. 이참에 루비 다닌다는 회사가 어떤지도 좀 보고 겸사겸사 소식도 좀 전해 들을 심산이었겄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반대했제.”

“왜 그러셨던 거예요?”

“그땐 나도 화가 나 있었거든.”

보석이 짓무른 눈매로 웃음 지었다.


“집 나간 딸년 소식 같은 건 듣고 싶지도 않았어. 또 쓸데없이 돈 쓰는 건 죽어도 싫어하는 나여. 설문인지 뭔지 그깟 거 한다고 매출이 오를 거라 기대하지 않았거든.”

루비의 얘기를 입에 담을 때마다 보석의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그딴 양아치와 사귈 거면 집에서 나가버리라고 윽박지르며 머리까지 밀어버린 게 두고두고 사무쳤다.

보석이 혜주의 손을 꼭 잡으며 격려했다.


“내 맴을 돌린 건 오 대리 자네여. 그러니 이 계약은 루비 때문이 아니라 자네 때문에 이뤄진 걸세. 그걸 잊지 말어.”

“할아버지…….”

울컥한 혜주는 회의실인 것도 잊고 눈물을 글썽였다. 힘든 상황임에도 자신을 먼저 격려해주는 보석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어쩌면 냉혹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혜주를 보며 딸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우리 루비는 쓸 만혀?”

툭툭 혜주의 어깨를 두드리며 보석이 물었다. 혜주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엄청 쓸 만합니다. 루비 씨 없으면 우리 회사 안 돌아가요.”

“에이, 뭘 그 정도꺼정 될까 봐.”

“정말이에요! 저랑 루비 씨랑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여섯 개쯤 되거든요. 루비 씨가 보조를 맞춰주지 않으면 저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에요. 한 번은 루비 씨가 굴전 먹고 배탈이 난 적이 있는데요. 혼자서 업무 처리하다가 무슨 일이 있었냐면…….”

조잘조잘 얘기를 이어가는 혜주를 보며 보석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집 나간 딸이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고, 묻기도 전에 마음을 읽어준 혜주가 있어 다행이었다.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


 

*

30분 전.

다희는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오후에 마실 커피를 테이크 아웃하고 있었다. 구내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은 직원들과의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덤터기를 쓴 터라 기분이 별로였다.


“아, 짜증 나. 얻어먹을 거면 아메리카노로 통일 좀 하지 죄다 휘핑크림 올라간 거네. 하여간 자기 돈 주고 사 먹을 땐 무조건 아메리카노더니 속 보인다, 속보여!”

다희는 구시렁대며 주문을 마치고 해가 들어오지 않는 구석 자리에서 음료가 나오길 기다렸다.

요즘 그녀는 심기가 무척 불편했다. 모든 건 승원 때문이었다.

그와 술김에 잠자리를 한 게 벌써 일주일 전인데, 그에게선 연락 한 통이 없었다. 술을 과하게 마시면 종종 블랙아웃이 되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안면몰수할 줄은 몰랐다.


-혜주야…… 너무 좋아, 혜주야.

 
제 위에서 땀을 흘리며 그가 혜주의 이름을 불렀을 땐 먼지가 되어 침대 밑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으로 넌 누굴 보고 있는 건데.

닿지도 않을 그 목소리로…… 대체 누굴 부르고 있는 거냐고.

한없이 비참하고 초라했다. 그럼에도 다희는 꾹 참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갖고 싶어서? 아니, 절박하긴 해도 그렇게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그날 다희가 승원을 받아들인 것은 그에게 절망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토록 뼈저리게 후회하던 실수를 또 반복하는 인간이 너라고. 반복되는 실수를 용서받을 수 있는 건 피해자가 없을 때뿐이라고.


‘네 그 무책임한 감정놀음에 나는 상처받고 비참해졌어. 넌 나를 원망하겠지만 정작 피해자는 나였다고!’

승원이 찾아오면 그렇게 쏘아붙이려 했다. 내키면 뺨이라도 한 대 쳐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승원에게선 메시지 한 통이 없었다. 그날의 일을 까맣게 잊은 걸까?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걸까.

초조한 다희는 매일같이 승원의 자리를 기웃거렸으나 고개를 푹 숙인 채 일만 하고 있는 그에게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짜증 나, 정말…….”

속사정도 모르는 사람들은 종종 잘 사귀고 있냐며 별 뜻 없이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때마다 다희는 “네, 그럼요.” 하며 상냥하게 대답했지만 속은 이미 새카맣게 타버린 후였다.

그냥 다 싫었다. 승원도, 생각 없이 툭툭 물어대는 사람들도, 그리고 회사도.

그중에서도 제일 싫은 건 혜주였다.

지난번 옥상에서의 다툼 이후 혜주와 따로 얘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제대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둘 모두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서로가 없으면 안 될 것 같던 친구 사이는 완전히 끝이 난 거라고.


‘왜 하필 너일까.’

승원이 좋아하는 사람이 혜주라서 싫었다.


‘오혜주가 죽고 못 사는 강승원이 천다희를 좋아한다. 이 그림 딱 좋았잖아, 안 그래?’

처음으로…… 그래, 처음으로 너를 이긴 것 같아 좋았다.

승원이 내 고백을 받아주었던 날, 드디어 오랫동안 내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혜주 짝퉁’ 꼬리표를 뗀 것 같아 좋았어. 이젠 너도 날 부러워하겠구나. 생각만 해도 짜릿했어.


‘그런데 너는 왜 이번에도 나를 절망하게 해?’

가끔 돌아보면 여전히 반짝거리는 혜주가 보인다.


‘나는 이렇게 시들어가는데, 왜 너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 내가 슬플 땐 항상 같이 울어주던 너였잖아. 내가 이렇게 아픈데…… 그럼 너도 아파해야 하잖아!’

시시때때로 울컥 치밀어오르는 원망에 다희는 넌더리가 났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울까지 왜 온 거야? 집 나간 딸래미 어떻게 지내나 감시하려고 회사까지 찾아온 거냐고!”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 루비 씨네?’

루비의 맞은편엔 늙수그레한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할아버지인가 싶었는데 대화를 들어보니 아버지였다.


“집 싫다고 연락도 끊고 나가버린 놈이 뭣이 궁금하다고 회사를 찾아왔것냐. 일 때문에 온 것이여, 일!”

“오빠들 중에 하나 보내면 될 일이잖아! 태양식품 사장님씩이나 되시는 분이 회사까지 직접 찾아올 이유가 뭐가 있어? 아빠랑 오빠들 시커먼 속내를 내가 모를 줄 알아? 지난달엔 금석 오빠가 내 남친 숙소까지 찾아갔다고 들었어. 그게 감시하려는 거 아니면 뭐야? 내가 애야?”

잔뜩 흥분한 루비가 다다다 쏘아붙이는 말에 노인이 뭐라고 대꾸했다. 그러나 목소리가 작아서 안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 감시하려고 우리 회사랑 계약한 거지? 내가 연락도 안 받고 숨어버리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염탐하려는 거잖아. 나 남친이랑 헤어지게 하려고!”

“어이구, 이 철없는 것아. 그래, 너 감시하려고 수천만 원 퍼부어 계약혔다. 이것이 다닐 만한 회사인가, 밥은 잘 나오는가, 오 대리한테 수도 없이 물어봤다. 됐냐?”

문득 다희의 뇌리로 욱 팀장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 하나가 떠올랐다. 상반기 실적 우수자에게 주는 ‘그레잇 어워드’ 후보자 명단이었다.

[사업팀 오혜주]라고 적힌 명단 옆엔 추천 사유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태양식품과의 연간 계약 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만약 그 계약이 태양식품과 루비와의 사적인 커넥션에 의한 것이라면?


‘그럼 그건…… 혜주의 공이 아니잖아!’

다희의 입술이 냉랭하게 말려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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