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나 불렀어,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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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나 불렀어, 자기?
2022.11.17.
뻐억, 뻑.
아무도 없는 옥상 정화조 뒤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보석과 헤어진 루비가 피운 담배 연기였다.
“아, 신경질 나, 진짜…….”
분명 원치 않는 만남이었다. 두 발로 집을 뛰쳐나온 것도 자신이고, 가족과 연락을 끊은 것도 자신이었다.
그런데 절룩거리며 돌아서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다.
“아빠는 잘 갔나 모르겠네. 다 늙어가지고 미팅은 무슨 미팅이야, 하아…….”
루비가 마지막 모금을 내뱉으며 길게 한숨을 뿜었다.
태양식품 이보석 사장의 금지옥엽 이루비.
신월도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나이 쉰이 넘어 낳은 늦둥이에 몹시 기뻐한 보석이 소를 다섯 마리나 잡았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나돌 정도이니, 보석의 딸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다정한 아버지에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 셋. 누가 봐도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가정환경이었다. 초등학생 때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로 더더욱 끈끈해진 가족애 속에서 루비는 무럭무럭 자랐다.
어릴 땐 집안의 애교쟁이로, 좀 커서는 분위기 메이커로 톡톡히 제 역할을 하던 그녀가 변한 것은 사춘기 무렵이었다.
‘아, 답답해 죽겠네. 이놈의 촌구석, 대체 언제 벗어나는 거야?’
어릴 땐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이 섬이 대한민국 절반의 국민이 이름도 모르는 곳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마을에서 최고 부자로 손꼽히는 아빠보다 훨씬 부자인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았을 때.
자정이 넘어서도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반짝이는 도시를 봤을 때.
한 번씩 배를 타고 나갔다 들어오면 이 섬이 그렇게 좁게 느껴질 수 없었다.
‘성인 되면 반드시 벗어나고 만다, 이 촌구석!’
신월도는 도민을 모두 합쳐도 이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섬이었다. 한 다리 건너면 모두가 친척이었고, 두 다리 건너면 모두가 아는 사이였다.
루비가 학교에서 장난을 치다 걸렸다, 루비가 친구랑 다퉜다, 루비가 준비물을 안 챙겨가 혼이 났다…….
모든 소문은 한나절이 되기 전에 보석과 세 오빠의 귀에 들어갔다. 애지중지하는 늦둥이에 대한 애정으로 비롯된 관심이었으나 루비는 숨이 막혔다. 사생활이 없는 삶은 감옥과 다름없었다.
루비는 신월도라는 새장에 갇힌 기분이었다.
고등학생 때 호기심에 몰래 담배를 피운 적이 있었다. 담 넘어 조개구이집 아주머니가 보고는 곧장 일러바치는 바람에 한 시간 넘게 혼이 났었지.
그 일을 계기로 루비는 결심했다. 대학교는 무조건 서울로 가기로!
바라던 대로 서울로 진학한 후 루비는 그간 못 놀았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 정말이지 방탕하게 살았다. MT며 농활이며 닥치는 대로 참여했고, 밥 먹듯이 술을 마셨다. 멀쩡한 집 놔두고 과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처음으로 남친도 사귀어봤고, 소중한 첫 경험도 했다.
그러나 해방감은 잠시였다. 그녀에겐 복병이 있었다.
바로 동생 바보 오빠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셋이나 있다는 것!
“우리 막둥이, 잘 지냈어?”
세 오빠는 돌아가면서 서울을 찾았다.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통에 루비는 미칠 것 같았다. 행여 순진무구한 막둥이가 못된 놈 손에 걸려 험한 꼴이라도 당할까 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를 하는데, 와, 진짜 숨이 턱턱 막혔다.
한 번은 남자친구와 홀딱 벗고 누워 있는데 오빠가 찾아와 경찰을 부른 적도 있었다. 이 음흉한 놈이 내 동생을 타락시켰다며 몽둥이질을 하는 바람에 합의금으로 삼백만 원이나 물어줬었지.
이러다 정말 처녀로 늙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 것도 과장은 아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곧장 섬으로 돌아오라는 엄명에 다시 집으로 돌아갔으나 이미 루비의 마음은 떠버린 상태였다. 그녀는 주말을 포함해 3일은 섬에서 자는 걸로 약속을 하고 겨우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배 타고 바다 건너 오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정말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호시탐탐 독립을 노리는 루비와 보석의 갈등은 심해졌다.
결정적으로 루비가 집안과 연을 끊다시피하고 나온 건 필립 때문이었다.
언제인가부터 카드값이 많이 나오는 걸 보고 집안에선 또다시 남친이 생긴 거라 짐작했다. 매번 꼬박꼬박 결제되는 식사비. 일 인분을 계산한 거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큰 액수가 날이면 날마다 결제되었다.
게다가 영화는 뭐 그리 자주 보는지. 아니, 자주 보는 건 상관없는데 영화 티켓을 네가 샀으면 적어도 팝콘은 남친 놈이 사야 하는 거 아니냐!
몹시 수상함을 느낀 이씨 삼 형제는 카드 결제 내역을 쭉 뽑아놓고 루비를 기다렸다. 그녀가 사귀는 남친이 무직에, 연하에, 월세 낼 돈도 없는 가난뱅이란 소리를 듣고 형제들은 아연실색했다.
‘그 많은 용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김 팔아 번 돈이 모두 그놈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었어!’
삼 형제는 곧장 보석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날 루비가 머리를 빡빡 밀렸다는 건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후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아빠가 직접 서울까지 왔다는 건 이제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건데…… 필립이랑 헤어지라고 하면 어쩌지?”
하얀 연기가 꼬불꼬불 하늘로 흩어졌다.
달칵.
그때 옥상 문이 열렸다. 정화조 뒤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루비는 화들짝 놀라 담배를 비벼 껐다. 다가온 사람은 혜주였다.
“루비 씨 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괜찮아요?”
손에 커피 두 잔을 들고 온 그녀를 보며 루비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 뭐.”
예전 같으면 “언니!”하고 달려가 안기기라도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혜주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제 안목을 더 이상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바람녀. 그리고 보석의 스파이.
루비가 혜주에 대해 내린 정의는 그랬다.
절친의 애인과 바람이 난 거야 개인 사생활이니 신경 끄려면 끌 수도 있다. 그러나 스파이는 달랐다. 아까 언뜻 본 거지만 혜주는 보석과 꽤 친밀해 보였다. 단순한 거래처 관계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래, 너 감시하려고 수천만 원 퍼부어 계약혔다. 이것이 다닐 만한 회사인가, 밥은 잘 나오는가, 오 대리한테 수도 없이 물어봤다. 됐냐?
보석의 말은 그녀의 추측에 힘을 실어주었다.
‘아무래도 아빠의 부탁을 받고 내 정보를 팔아넘긴 게 틀림없어. 오 대리님,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의리 없네.’
이럴 줄 알았으면 태양식품에 제안서를 보낸다는 소릴 들었을 때 어떻게든 제지를 하는 건데!
그땐 설마하니 정말 계약이 될지 몰랐다. 또 제안서 보내는 걸 막을 합당한 이유도 없었고.
아빠 회사와 계약한다고 별일이야 있겠냐며 단순하게 생각했던 루비는 지금 기분이 무척 불쾌했다.
“옥상엔 왜 오셨어요? 저 만나러 온 거예요?”
“루비 씨 아버지께서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아까 다퉜다고 하기에 한 번 올라와 봤어요.”
“아빠랑 그런 얘기도 하는 사이예요? 둘이 되게 친한가 보네.”
루비의 비아냥에 혜주는 적잖이 당황했다. 단언컨대 루비가 이렇게 못되게 군 적은 처음이었다.
“그럼 얼굴 봤으니 자알 내려가세요. 전 한 대 더 피고 복귀할 테니까.”
삐뚤어지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담배를 꼬나무는 그녀를 보며 혜주도 슬슬 스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한테 뭐 불만 있어요? 불만 있으면 말로 해요. 그렇게 틱틱대지 말고.”
“불만 없는데요.”
“누가 봐도 불만 가득한 얼굴이잖아. 우리 이 정도 사이밖에 안 돼요? 난 루비 씨와 꽤 마음을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먼저 배신한 게 누군데!”
루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진짜 언니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 자꾸 나를 실망시켜요? 언니, 우리 아빠 스파이예요? 우리 아빠 부탁받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리고 있었던 거죠?”
혜주는 어이가 없다 못해 실소가 나왔다.
“억지 부리지 마요! 사장님은 내게 한 번도 루비 씨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어요. 루비 씨가 사장님 딸이라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는데, 일거수일투족을 어떻게 알리죠?”
“거짓말! 아까 아빠가 그랬어요. 회사 복지가 어떤지, 야근은 많은지, 구내식당 밥은 잘 나오는지 언니가 다 말해줬다고!”
“듣자 듣자 하니 망상이 지나치네. 회사에서 야근을 루비 씨 혼자 합니까? 구내식당 밥은 너만 먹어요?”
“그럼 나와 상관도 없는 일을 아빠가 물었겠어요? 언니가 별생각 없이 흘린 대답들 속에 내가 숨기고 싶어 하는 얘기가 들어 있었을지 누가 알아요?”
“와, 생사람 잡는데 소질 있네, 루비 씨. 옛날 같으면 사람 하나 간첩 만드는 거 일도 아니었겠네.”
혜주가 열이 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콧김을 훅 뿜었다.
괜히 울컥했다. 루비의 사수로 만나 지금껏 각별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밑도 끝도 없이 스파이 누명이라니, 너무 서운했다.
“그리고 언니, 저번에 내 남친이랑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었죠?”
“그거야 남친이 맨날 돈을 빌려 가서 안 갚는다고 하니까…….”
“이제야 하는 말인데, 내 남친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럴 말할 자격도 없는 주제에.”
푸욱.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자격이 없다니, 무슨 뜻이에요?”
“언니 바람녀잖아요!”
“바람녀?”
“강승원 대리님이랑 천다희 대리님 사이에 깍두기처럼 끼어서 홀랑 뺏어 먹기 했다면서요! 어떻게 절친 애인을 뺏을 수가 있어요? 그래놓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조언이나 해대고, 웃기지도 않아!”
“야, 이루비!”
“왜, 이 바람녀야!”
파바밧.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팽팽하게 당긴 활시위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말 다 했어?”
혜주는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그동안 수상했던 루비의 태도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주원에게 고백하려 작정했던 날, 갑자기 잡힌 회식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말 실망스러운 건 그녀에게 자신이 그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밖에 되지 못했단 사실이었다.
“다했으면 어쩔 건데요.”
루비 역시 실망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제일 좋아하던 언니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하니 세상만사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까지 될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보석과 한바탕하고 난 후 가뜩이나 마음이 좋지 않은데 혜주의 얼굴을 보니 누구라도 원망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언니가 그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좋다고 쫓아다녔던 내가 바보 같네요!”
“루비 씨, 지금 단단히 실수하는 거야. 그런 소릴 떠들 땐 사실 확인 정도는 했어야지?”
“사실 확인 했거든요? 저번에 비상계단에서 마주친 거 생각 안 나요? 강승원 대리랑 잤다면서요!”
“그건 팩트 체크가 아니라 엿들은 거지!”
“엿들었건 말건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고요!”
“개소리를 똑똑히 들은 게 자랑이야? 내가 강승원이랑 자는 거 봤어? 봤냐고!”
“그럼 언니는 내 남친 봤어요? 한 번 본 적도 없으면서 왜 헤어지라 마라 훈수야?”
“너 돌았구나?”
“누가 할 소릴!”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 콧바람을 내뿜었다. 멱살만 잡지 않았다 뿐이지, 누구 하나가 들이받으면 곧장 몸싸움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험악한 분위기였다.
“너 딱 기다려.”
혜주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비밀연애고 나발이고 보여줄 타이밍이었다.
내 남자가 누군지. 네 오해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이루비, 너 사람 잘못 봤어.’
혜주는 곧장 전화를 걸었다. 그러곤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여보, 내 남친, 내 애인, 자기야. 지금 뭐 해? 잠시 옥상으로 올라올 수 있어요?”
루비는 분기탱천하여 혜주가 하는 짓을 바라보았다. 이게 제정신인가 싶은 모양이었다.
“웅웅, 알았어. 빨리 와요.”
혜주가 전화를 끊자마자 루비가 실소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팩트 체크한다, 왜!”
설마 이 상황에 강승원 대리를 부른 건가? 바람 아니고 뭐 순수한 사랑이었다, 그런 얘기라도 하려고? 아니면 다희와 헤어진 후 정당하게 만난 거라고?
어느 쪽이든 최악이었다.
“더 볼 것도 없겠네. 나 먼저 내려갈게요.”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기다란 다리 하나가 옥상에 드리웠다.
“나 불렀어, 자기?”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살랑, 앞머리를 흔드는 그는 강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