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 혜주는 너무 속상했떠요 (49/121)


#50. 혜주는 너무 속상했떠요
2022.11.20.



 
심지어 그는 당황하지도 않았다.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원수처럼 씩씩대며 서 있는 혜주와 루비를 보고 단번에 분위기를 파악한 그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휘리릭.

긴 다리가 쭉쭉 뻗어올 때마다 기가 막히게 바람이 불었다. 하얀 와이셔츠를 펄럭이며 다가온 그가 혜주의 어깨에 척 팔을 걸쳤다.


“루비 씨랑 싸웠어? 우리 애기 예쁜 얼굴에 왜 이렇게 뿔이 났을까?”

우욱. 정수리에 턱을 댄 채 묻는 말에 혜주는 순간적으로 속이 니글거렸다.

그러나 내가 누구냐. 무려 고등학교 연극반 ‘69미리’ 에이스 출신이라 이거야.

능청스러운 연기에 버프를 받은 혜주가 훌쩍이며 주원에게 어리광을 피웠다.


“웅! 웅! 루비 씨가 나 흉봤어. 혜주는 너무 속상했떠요.”

“안 봐도 비디오네. 자기가 너무 예쁘고 귀여우니 주변에서 가만 놔두질 않는 거 아니야. 이제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어?”

“혜주는 마음이 너무 여린가 봐요.”

“하여간 우리 애기 너무 연약해서 탈이라니까.”

으으…….

못 볼 꼴을 본 루비가 치를 떨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 두 분 저한테 왜 이러세요…….”

옥상에 뜬금없이 대표님이 나타난 것도 기함할 노릇인데, 난데없는 애교 폭격이라니! 이건 말이 안 된다. 절대 사실일 리 없어!


“사장님이 왜 여기에…… 아니, 둘이 대체 무슨 사이…….”

충격을 받은 루비가 아랫입술을 덜덜 떨었다. 주원은 보고도 모르냐는 듯 시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애인입니다. 사귀는 사이, 커플, 운명, 그밖에 표현할 말이 많죠.”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루비는 격하게 현실 부정을 하며 도리질했다. 그러나 귀여워 죽겠다는 듯 혜주의 뺨을 비비는 주원을 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귀지 않고서야 저럴 리가 없고, 미치지 않고서야 저럴 리가 없다. 즉, 내가 미친 게 아니라면 저들은 사귀는 것이다!’

결론에 이르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방황하는 동공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루비는 결국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어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존심 따위를 챙길 타이밍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사귀는 게 사실이라면 정말 혜주에게 큰 실례를 범한 게 된다. 남친을 헷갈린 것으로도 모자라 바람녀로 오인하기까지 했으니, 혜주가 작정하고 따져 물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간 혜주 언니가 날 정말 살뜰히 챙겨줬는데…… 아, 미쳤다, 이루비. 어쩌다 이런 실수를 해버린 거야?’

후회막심이었다.


“제가 오해를 했나 봐요. 역시 그럼 그렇지! 언니가 바람녀일 리가 없잖아. 난 진짜 아닐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상황이…….”

“상황이 뭐?”

혜주가 눈썹을 힐끗 올렸다.


“그게요…….”

루비는 혜주가 바람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경위를 더듬더듬 털어놓았다.

모든 오해는 커피숍에서 승원과 다희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혜주 때문에 승원과 다희가 헤어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정말이지 충격적인 얘기라 설마 하면서도 루비는 혜주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퇴근 무렵 혜주에게 전화가 걸려온 걸 목격했다. 혜주의 검지에 가려 정확히 보진 못했지만, 액정에 강*원이라 쓰인 이름만큼은 똑똑히 보았다. 루비는 그게 강승원이라 확신했다.

비상계단에서 승원과 혜주를 목격했을 때가 결정타였다. 전날 잤니 어쨌니 얘기를 하는데, 다희랑 친한 사이도 아닌데도 화가 났다.


“난 정말 언니가 바람녀인 줄 알았다고요. 나도 얼마나 속상했는데요…….”

“그러니까 날 절친 남자친구나 뺏는 그런 사람으로 봤다는 거죠?”

“아니, 세 분이 워낙 절친했으니까…… 저러다 정분나지 않겠냐며 주변에서 말들도 많았고요…….”

“루비 씨는 날 그렇게 몰라요?”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빡세게 알아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루비가 석고대죄를 하듯 이마를 바닥에 쿵 찧었다.

아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태도에 혜주의 화가 누그러졌다. 물론 누구보다 믿던 사람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오해했다는 게 속상하기는 했지만, 악의가 있어 그런 건 아니라 다행이었다.


“루비 씨, 일어나요. 애지중지하는 딸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아버님 마음 아프시겠네.”

혜주가 루비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루비는 마지못해 일어나 무릎을 툭툭 털었다.

아까 그렇게 다퉜던 게 무색하게 옥상엔 정적만 가득했다. 아직도 달달한 주원과 혜주를 힐끔거리던 루비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대표님, 노파심에 물어보는 건데요. 혜주 언니 괴롭혔다고 저한테 막 불이익 주고 그러는 거 아니죠? 우리 대표님이 그렇게 쪼잔한 분은 아닌 거 알지만,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거니 불쾌해하진 마시고요.”

주원이 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쪼잔하지 않다고 누가 그래?”

그가 팔짱을 끼며 단언했다.


“저 되게 쪼잔합니다. 내 여자 일에는 더더욱.”

루비는 다급해졌다.


“억울합니다! 제가 오해를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두 분 도와드리기도 했잖아요! 지난 워크숍 때 제 덕분에 같은 차 타고 간 거 기억 안 나요?”

“아, 그날.”

주원이 피식 웃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운전하느라 피곤해 죽는 줄 알았는데. 전날 다퉜거든요.”

“제가 배탈 난 덕에 두 분 버디도 되셨잖아요! 그러고 보면 두 사람 사귀게 된 거 제 덕이 팔 할 아닌가요?”

“그때 내 니트가 망가져 127만 원 거금을 썼죠, 우리 애기가.”

“…….”

“물론 루비 씨 말대로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낭패다.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루비는 입술을 앙다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루비 씨.”

주원이 루비를 불렀다.


“네…….”

앞으로 받을 수많은 불이익을 상상하며 의기소침해 있던 루비에게 불쑥 손이 내밀어졌다.


“당분간 우리 혜주 잘 부탁합니다.”

“네엑?”

“이제 대충 상황 파악 끝났겠지만, 혜주 상황이 녹록지 않아요. 절친이랑 틀어지는 바람에 밥도 혼자 먹게 생겼죠. 비밀 연애하는 처지라 내가 매일 챙겨줄 수도 없고.”

루비는 얼떨떨하게 주원의 손을 잡았다.


“누가 누굴 부탁해요. 늘 배우는 쪽은 저였는데…….”

“루비 씨가 잘 챙겨주세요. 제가 줄 불이익은 그걸로 퉁 치죠.”

“그럼 저 용서해주시는 거예요?”

“용서는 이미 한 것 같은데.”

주원이 턱짓으로 혜주를 가리켰다. 루비는 엉겁결에 그쪽을 바라보곤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혜주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시뻘게진 눈시울로 혜주가 두 팔을 벌렸다.


“루비 씨, 이리 와.”

감정이 복받쳐 오른 루비가 눈물을 훔치며 뛰어가 안겼다.


“미안해요, 언니! 흐흑…… 내가 진짜 바보야. 똥멍청이 이루비! 이렇게 착한 언니를 오해하다니, 내가 나빴어! 흐응…….”

옥상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오해는 눈 녹듯 풀리고 젖은 땅은 더욱 단단해졌다.

서로를 소중히 생각했던 만큼 실망도 컸던 두 사람이 눈물로 화해하는 모습을 보며 주원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든든한 아군이 생긴 느낌이었다.

*

힐끔힐끔.

대표실을 기웃거리는 새카만 눈동자 한 쌍이 있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꺼지지 않는 대표실 불을 바라보는 건 바로 혜주였다.

혜주는 자라처럼 고개를 쭉 빼서 주원의 동향을 살폈다. 블라인드 안쪽으로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자리에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도 퇴근이 늦네. 많이 바쁜가?’

요 며칠 주원은 좀 이상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사람처럼 눈 밑이 퀭했고 데이트하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회의 시간에 좀처럼 하지 않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

완벽주의의 정석인 강주원이 발표 슬라이드를 착각하다니!

그전까지만 해도 일이 좀 피곤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혜주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안색이 창백한 사람을 붙들고 데이트를 하자고 조를 수도 없고, 낮에 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노트북을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 술을 먹자고 할 수도 없었다.

사귄 후 거의 매일 저녁을 함께했던 혜주는 갑작스러운 주원의 변화가 당혹스러웠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참 좋았는데.


-나 불렀어, 자기?

 
전화 한 통에 바로 옥상으로 뛰어 올라온 그가 속삭인 말에 가뜩이나 빠져 있던 그에게 다시 한번 풍덩 다이빙을 했다.

강주원이 좋았다.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설렘으로 시작했던 마음이 어느새 짙어졌다. 강주원이라 적힌 연락처를 ‘자기야’로 바꾸고 그의 휴대폰에 저장된 제 이름도 같은 것으로 바꿨다. 그러고 나니 더 돈독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 같이 저녁 먹자고 해 볼까……? 많이 피곤해하려나?’

혜주는 메시지창을 연 채로 한참을 고민했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욱 팀장과 함께 나가는 다희가 보였다. 욱 팀장은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고 다희는 그녀의 뒤를 아무 말 없이 뒤따르고 있었다.

같은 사업팀이긴 해도 두 사람은 각별히 불편한 사이였다. 주파수가 맞질 않는달까. 까탈스럽고 예민한 욱 팀장과 소심한 다희는 상극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이유도 없이 소주 한 잔 기울일 사이는 절대 아니란 뜻이다.


‘무슨 일이지?’

혜주는 두 사람의 동행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대표실 문을 열고 주원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주위를 쓱 한 번 둘러본 주원이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혜주에게 턱짓했다.


‘나와.’

혜주는 얼른 가방을 챙겨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단 둘뿐인 엘리베이터.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혜주가 배시시 웃으며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냥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뭐 좋은 일 있어?”

주원이 1층 버튼을 꾹 누르며 물었다.

그냥 오빠랑 같이 있어서 좋은 건데.

그렇게 대답하려던 혜주의 눈에 문득 주원이 누른 층수가 들어왔다.


“그냥 뭐…… 어? 오빠 오늘 차 안 가지고 왔어요?”

불현듯 기대가 피어올랐다.

지하 주차장이 아닌 1층을 눌렀다는 건 바로 집으로 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고, 바로 집으로 가지 않는다는 말은 나랑 같이 저녁을 먹겠다는 뜻?


‘드디어!’

그가 배가 고플 경우와 고프지 않을 경우, 술이 당기는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 등 갖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해 식당 목록을 쫙 뽑아놓은 혜주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기대를 철저히 부쉈다.


“좀 뛰려고.”

“뛴다고요?”

“운동량이 좀 부족한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주원은 검은색 후드에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운동을 좋아하는 그는 사무실에 여벌의 옷을 여러 벌 갖다 두었는데 그중에서도 트레이닝복은 항상 빠지지 않았다. 그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혜주는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짐짓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회사에서 집까지 뛰는 게 가능해요? 꽤 거리가 멀잖아요.”

“30분이 뭐가 멀어.”

주원이 싱긋 웃으며 혜주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그의 목울대에 시선을 빼앗긴 혜주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치겠다. 이 와중에 왜 섹시한 건데.

얄미워 죽겠는데 잘생겨서 더 얄밉다.


‘잘생기면 뭐 해. 데이트도 못 하는 거…….’

딱 빛 좋은 개살구지 뭐야.


 
딩동!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면 연락할게.”

주원이 혜주의 뺨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리곤 뛰어갔다. 이어폰을 끼고 쏜살같이 빌딩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이 왜 이리 매정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말이라도 같이 뛰잔 소린 안 하네…….”

혜주는 너른 등짝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괜히 울적해졌다.

같이 있고 싶은 마음도 모르고, 이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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