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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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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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사랑해
2022.11.24.
집으로 돌아온 혜주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생각할수록 울적했다.
저녁도 못 먹고 강주원 퇴근하는 시간만 기다렸는데 엘리베이터에서 고작 몇 분 본 게 다라니.
“술 땡긴다…….”
혜주는 중얼거리며 베개를 끌어안았다.
술 생각을 하니 매콤한 안주가 떠올랐다. 그 앞에서 턱을 괴고 바라보는 주원의 얼굴도.
‘짠’하고 잔을 부딪치면 습관적으로 빤히 쳐다보던 시선. 속눈썹 그늘이 짙게 내리깔린 눈으로 바라보면 알코올이 들어가기도 전부터 속이 울렁였다.
“아……. 심란한데 영화나 한 편 때리고 자야겠다.”
혜주는 강주원으로 꽉 들어찬 머리를 내저으며 TV를 틀었다.
하필이면 눈에 보이는 게 죄다 로맨스 영화다. 두 주인공이 다정하게 어깨를 안고 있는 포스터를 보니 또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같이 누워서 영화 보고 싶다……. 힝.”
시원한 맥주 한 캔을 손에 들고 나란히 누워 쉬고 싶었다. 안주는 캐러멜 팝콘으로.
물론 전제조건은 강주원이었다.
“휴우, 중증이다, 중증.”
이제는 뭘 해도 강주원이 따라오네.
혜주는 고개를 내저으며 아무 영화나 재생했다.
밥 한 끼를 먹어도, 할 일 없이 뒹굴거릴 때도, 지금처럼 울적할 때도 주원이 떠올랐다. 뭘 먹어도 주원과 함께 먹고 싶었고, 뭘 하든 주원과 함께하고 싶었다.
분명 먼저 고백한 건 주원이었는데 왠지 전세가 역전된 기분이다. 이 정도로 절절하면 짝사랑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혜주가 느끼기에 두 사람의 감정은 정확히 반비례 곡선을 그리는 듯했다. 혜주가 확 불타오르자 주원이 파스스 꺼진 느낌이었다.
변곡점은 정확히 워크숍 이후부터였다.
호텔룸에서 서로를 향해 불타올랐던 날 이후 혜주의 감정은 폭발했다.
-이런 건 평생 나랑만 해. 네가 딴 놈이랑 누워 있는 상상만 해도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파도처럼 들이닥친 그는 거세고 뜨거웠다. 온몸으로 진심을 표현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욱 팀장의 전화로 분위기가 뚝 끊겨버리고 다음 날 주원을 만났을 때, 혜주는 조금 기대했었다.
직원들 몰래 눈짓이라도 해줄 줄 알고 얼마나 그를 힐끗거렸던지.
하지만 그날따라 몹시 피로해 보이던 주원은 공식적인 일정이 끝나자마자 먼저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로 분위기는 소강상태였다. 주원은 뭔가에 정신이 팔린 듯 혼란스러워 보였고 혜주는 그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점심도 거른 채 대표실에 칩거한 그가 걱정돼 포장 도시락을 사서 들어갔다가 책상에 엎드린 채 곯아떨어진 그를 본 적도 있었다.
한숨도 못 잔 듯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그를 보며 차마 깨울 수가 없어 조용히 도시락만 두고 돌아섰었지.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겠어. 정확히 똥 싸다 끊긴 느낌이라고.”
혜주는 푸념하듯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영화에 집중력을 잃은 지는 오래였다.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BGM 삼아 침대를 뒹굴거리고 있자니 또다시 주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함께 밤을 보내고 싶었다. 그의 침대에 함께 누워 그의 체취를 맡고 싶었다. 나붓하게 쓰다듬던 손길과 온몸이 나른해지도록 귓가를 적시던 숨소리를 떠올리니 또다시 가슴이 뛰었다.
“이런 게 바로 욕정인가…….”
쫙 갈라진 육 쪽 복근을 떠올리며 발그레 얼굴을 붉히던 그녀가 찰싹 제 뺨을 때렸다.
“오혜주 뭐야. 정신 차려!”
아무리 굶주렸어도 이건 아니지!
강주원이 제아무리 탐나는 몸을 가졌어도 이런 식으로 상상하고 막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지이이잉-
“악, 깜짝이야!”
때마침 울린 휴대폰 진동에 혜주가 화들짝 놀라 몸을 바로 했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녀가 반색하며 전화를 받았다.
“오빠!”
바로 주원이었다.
이제나저제나 연락만 기다리고 있던 혜주는 몹시 반가워 눈물이 날 뻔했다.
-이제 막 도착해서 씻었어. 뭐해?
“혼자 영화 보고 있었어요. 별로 재미는 없네요.”
-무슨 영화인데?
“어, 보자. 제목이……. 거친 사나이?”
헉, 뱉고 보니 몹시 야릇한 느낌이다. 때마침 귓가를 적시는 야릇한 신음에 화면을 바라보니 온갖 살 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 혜주 그런 취향이었구나.
수화기 너머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거든요? 신작 영화 중에 아무거나 고른 거예요. 그냥 틀어둔 거지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고요.”
-그래.
“진짜라니까요. 저 원래 19금 그런 거에 취미 없어요.”
-나는 있어.
“어…….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다음에 같이 보자.
꺅!
혜주는 이불 속에서 다리를 동동 굴렀다. 그와 나란히 누워 19금을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귓불이 달아올랐다.
-보고 싶네.
주원이 조금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보고 싶다는 건지 19금이 보고 싶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울적하던 기분이 단번에 사라진 혜주의 마음에 용기가 샘솟았다.
“지금 볼래요?”
시계를 보니 밤 11시였다. 그러나 그가 오케이만 해준다면 혜주는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갈 수 있었다.
“내가 오빠 집으로 가도 되는데.”
수줍게 건넨 말에 돌아온 대답은 철벽이었다.
-아니, 혜주야.
너무 단칼에 거절했다고 생각했는지 주원이 덧붙였다.
-오빠 내일 휴가라.
혜주는 몹시 서운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아, 맞다. 지방에 간다고 했죠? 어디 가는 거예요?”
-그냥 좀 볼일이 있어서.
……말해주기 싫다는 거구나.
연인 사이에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할 필요는 없다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혜주는 동동 떴던 마음이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짐은 다 쌌어요? 내일 몇 시 출발이에요?”
-열 시 출발. 짐 쌀 것까진 없고.
“그렇구나……. 잘 다녀와요.”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혜주는 서둘러 대화를 정리했다.
이래서 섣불리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혜주 너는 너무 밀당을 못한다니까? 상대가 10을 주면 너는 5만 줘야지. 마음 내키는 대로 100, 200 퍼주면 처음에야 고맙지, 나중엔 습관이 된다니까? 남자란 동물이 원래 그래.’
대학교 때 사귀던 남친이 차면서 그런 얘길 했었다. 군대 첫 면회 때 들은 말이었다.
군바리가 고무신을 차는 게 어디 흔한 일인가! 그것도 고무신 커플이 가장 많이 헤어진다는 일말상초(일병 말, 상병 초)도 아니고 고작 첫 면회였다.
그때 헤어지며 남친이 그랬다.
너같이 마음에 완급조절 따위 못하는 애가 연애를 하면 결국 상처받는 건 너라고, 강원도까지 면회 와준 건 고마운데 이제 그만 왔으면 한다고.
‘살다 보니 그 멍멍이 말이 맞기도 하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전화를 받지 말걸.
혜주는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떨궜다.
“그럼 끊을게요.”
-혜주야.
멀어진 휴대폰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혜주는 눈물을 꾹 참고 다시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아직 전화가 끊기지 않은 걸 확인한 주원이 나직이 속삭였다.
-나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허락한다면…….
“…….”
-안고 싶어.
오래 참아온 마지막 한마디가 깊은 숨과 함께 터졌다. 눌러 담았던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툭 떨어졌다.
“거짓말…….”
범람해버린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그럼 왜 나 피하는데요? 요 며칠 데이트하잔 소리도 안 하고 주말에도 안 만났잖아요! 아까도 그래. 난 오빠랑 같이 퇴근하려고 기다렸는데 꼭 피하는 사람처럼 쌩하니 가버리고! 집에도 못 오게 하고!”
-혜주야.
“난 오늘 하루 종일 기다렸는데……. 정말 하루 종일 오빠만 생각했는데 오빠는 내 마음도 모르고 그냥 가버렸잖아!”
완급조절은 개나 줘버리라지.
혜주는 속으로 되뇌며 소리를 빽 질렀다.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마음을 100퍼센트 다 드러내면 나만 손해니까, 적당히 숨기고 적당히 빼자고 조금 전까지 다짐했는데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더 좋아하면 어때. 없어 보이면 어떻냐고.
“아까 오빠가 이어폰 끼고 가버렸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요? 꼭 데이트 신청했다가 까인 기분이었어.”
-알아.
“알면서 왜 그랬어요?”
주원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내 결심한 듯 그가 덤덤히 고백했다.
-나 요새 잠을 잘 못 자. 혜주야.
혜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침마다 눈 밑이 퀭한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두 귀로 직접 들으니 걱정이 배가 된다.
대체 얼마나 잠을 못 자길래 그래?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자기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체력을 끌어다 쓰냐고.
“불면증이에요? 많이 심해요?”
-하루 한 시간 정도. 요 며칠은 거의 삼십 분도 못 잤어.
주원의 음성은 담담했으나 짙은 피로감을 숨길 수는 없었다.
혜주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선뜻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사람이 하루에 삼십 분도 못 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기말고사를 앞두고 벼락치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하루 세 시간씩 자던 게 일주일이 지나자 코피가 터졌었다.
머리는 멍하고 눈 밑은 퀭하고 마주치는 사람마다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었지.
워크숍이 끝난 지 일주일이 흘렀으니 주원의 증상 역시 적어도 일주일은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하루에 한 시간도 채 자지 못했다면 거의 제정신이 아닐 터였다. 평소 갈고닦은 체력이 있어 망정이지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병원에 실려 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병원엔 가봤어요?”
-응.
“병원에선 뭐래요? 약은 먹고 있어요?”
주원은 대답 대신 나직이 혜주를 불렀다.
-혜주야.
혜주는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까칠한 그의 목소리에, 잠깐의 침묵 사이에 섞인 고된 숨소리에 마음이 무너졌다.
입술을 꽉 깨문 혜주가 훤히 보인다는 듯 그가 나직이 웃었다.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독이는 말에 혜주는 참았던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위로할 사람이 누군데 오빠가 나를 위로하는 거야.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나는 그깟 데이트 몇 번 못 했다고 화만 냈잖아. 오빠가 힘들어하는 걸 곁에서 뻔히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잖아.
“흑…….”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에 주원이 핀잔했다.
-데이트 좀 못 했다고 우냐? 내 여친 그렇게 안 봤는데 쪼잔하네.
혜주가 우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주원은 더 이상 자신의 문제로 혜주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장난기 가득한 말에 담긴 그의 마음을 혜주 역시 알아챘다. 혜주는 울음을 삼키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가뜩이나 힘든 사람에게 제 무게를 얹어줄 수 없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징징대는 여친이 아니라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을 줄 수 있는 여친이었다.
비록 기약 없는 믿음일지라도.
“한창 불타오를 시기에 데이트를 퐁당퐁당하니까 그렇죠! 뭔 남자가 이렇게 약해 빠졌어?”
카랑카랑하게 쏘아붙이자 주원이 나직이 웃었다.
-그러게. 우리 혜주 만족시켜주려면 체력 좀 길러와야겠네.
졸음이 쏟아지는지 주원의 목소리가 나른해졌다.
-내가 널 두고 어떤 상상까지 하는지 넌 아마 짐작도 못 할 거야.
“전 괜찮은데, 그럼 지금이라도?”
-이게 발랑 까져가지고.
주원이 쿡쿡 웃었다.
-지금은 아니야.
먹이를 두고 ‘기다려’ 하듯 단호한 말이었다. 수마에 빠져드는 듯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그가 불렀다.
-혜주야.
“왜요.”
-오혜주.
“왜요!”
-사랑해.
“아, 왜…… 엑?”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혜주는 미처 예상치 못한 말에 목이 콱 막혔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그려진다는 듯 주원이 낮게 웃었다.
-잘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