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그림자가 되게 잘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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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그림자가 되게 잘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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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그림자가 되게 잘생겼네
2022.11.27.
이튿날.
주원은 해가 뜨자마자 택시를 불렀다.
서울에서 충북 제천까지 간다는 말에 냉큼 콜을 수락한 택시기사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짐도 없이 단출하게 나선 주원을 보고 기사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제천까지 간다기에 짐이 많을 줄 알았더니 어디 여행가는 건 아닌가 봐요?”
“네. 잠깐 볼일만 보고 올라올 겁니다.”
“올 때도 택시 이용하실 거면 기다려드릴 수도 있는데, 허허.”
“그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기분이 좋아진 택시 기사가 몇 마디를 붙이려다가 피곤해 보이는 그를 보곤 입을 다물었다.
주원은 뒷좌석에 앉아 눈을 붙였다.
‘피곤해 미치겠군. 이러다 말라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어.’
어제도 잠을 거의 못 잤다. 혜주와 통화를 끝낸 후 녹진하여 금세 곯아떨어졌으나 여지없이 악몽이 찾아왔다.
이번 악몽은 더 심했다.
누가 톡톡 건드리는 느낌에 깨어보니 바로 옆에서 혜림이 시뻘건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핏물이 고인 눈으로 다정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스르륵 손을 뻗어왔다. 차가운 손으로 주원의 뺨을 감싼 채 입술을 벙긋거려 말했다.
-같이 있어 줘.
주원은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만해. 사라지라고!
-같이 있어 줘, 주원아…….
눈조차 깜빡일 수 없는 공포 속에서 그는 지독한 체념을 맛보았다. 꿈인 걸 알면서도 무서웠고, 깨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두려웠다.
이따위 악몽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점차 가까워지는 혜림을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내일은 또 얼마나 다가올까.
언젠가 그녀가 새파란 두 손으로 목을 조르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는 걸까.’
처음 악몽이 시작되었을 땐 그저 죄책감의 발로라고 여겼는데, 이제 그 악몽이 실체가 되어 숨통을 조여왔다.
시간이 흘러도 나아지지 않는 증상, 더욱 생생해지는 악몽…….
속수무책이었다.
병원에서는 불안증의 일종이라며 신경안정제만 주야장천 처방해주었는데, 이제는 그 약에도 내성이 생겼는지 잘 듣지 않았다.
1, 2년 전까지만 해도 약을 복용하면 악몽을 꿨다가도 금세 다시 잠이 들 수 있었다. 사흘에 한 번쯤은 악몽 없이 푹 자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계인 듯싶었다.
‘이제 어쩔 수 없어.’
주원은 굳은 결심을 하고 차창을 응시했다.
어느덧 택시는 서울을 빠져나가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빠르게 바뀌는 바깥 풍경을 보는 주원의 마음이 무거웠다.
오늘 그의 목적지는 [운월신당]이었다.
최근 신내림을 받아 기운이 세다는 무당이 운영하는 신당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랫동안 주원의 주치의였던 닥터 최가 소개해 준 곳이었다.
해인신녀의 기도를 받고 5수 하던 자기 아들이 의대를 갔다나 뭐라나.
자기도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얘기까지 하겠냐며, 거의 십 년 동안 진료를 봤는데 해결을 못 봤으면 다른 방법도 적극 고려해 봐야 하지 않겠냐며 추천해준 곳이었다.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들어 일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수면 장애가 심해지자 주원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이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주원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사주와 점, 미신 등은 믿지 않는 편이었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악몽 때문에 무당을 찾아간다는 것 자체가 그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 혜주에게도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처음 닥터 최에게 해인신녀를 소개받았을 때만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는데 상황이 심각해지니 도리가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무슨 방도라도 찾을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괜히 헛걸음하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네.’
주원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천근만근인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왔다.
*
직장인들의 꿀 같은 점심 시간.
다희는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다.
다이어트 한다는 핑계로 혼자 점심을 먹기 시작한 지 벌써 몇 주가 흘렀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보통은 혜주나 승원과 같이 먹었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같이 먹을 사람이 없는 것뿐이었다.
다른 직원들과 섞여 밥을 먹어본 적도 있지만 물색없는 몇몇이 연애 사업은 잘되고 있냐며 물어오는 통에 먹은 게 고스란히 체한 적도 있었다.
불편할 바에야 혼자 먹는 게 낫다고 판단한 다희는 그날부터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오늘도 그녀는 혼자였다. 깻잎무침에 소시지, 볶음김치로 만든 단출한 도시락을 먹으며 다희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다 식어 맛대가리도 없는 밥을 꾸역꾸역 씹고 있는데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뭐지?’
화면 하단에 새 메일이 깜빡이는 걸 보고 무심코 클릭해 본 다희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축하드립니다. 천다희 씨, 서베리아 사업팀 경력직 모집 2차 면접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곧 임원진 최종 면접이 예정되어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인사 담당자를 통해 유선상으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박!”
다희는 회사란 것도 잊은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2주 전에 본 면접의 결과가 오늘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 2차까지 합격한 거야? 면접 경쟁률이 높아서 안 될 줄 알았는데…….!’
이미 몇 번의 면접에서 떨어진 터라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덜컥 합격을 하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서베리아잖아! 지원한 회사 중에서 경쟁률도 가장 높고 연봉도 제일 좋았던…….!’
생각지 못한 합격 소식에 다희는 고무되었다.
서베리아는 서베이 코리아를 줄여 만든 이름이었다. 데이터스 코리아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리서치 업체로 국내 모바일 리서치 업계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IT 기업이었다.
데이터스 코리아와는 완벽한 경쟁 관계에 있는 회사였는데 최근 강주원이 데이터스 코리아로 부임하면서 영업 실적이 벌어지기 시작하자 업계 평균을 상회하는 연봉을 제시해 인재들을 빼가고 있었다.
다희가 2차 면접에 합격한 것도 데이터스 코리아에서 오래 일한 경력이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와……. 천다희 살아 있네.”
다희는 몇 번이나 메일을 다시 읽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직 최종 합격은 아니지만 임원진 면접까지 간 거면 거의 채용이 확실시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대박이야, 정말.”
얼마 전 승원에게 이직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한 건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승원과 헤어진 직후부터 바로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승원과 헤어진 것도 이직의 이유가 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혜주였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걸 확인하게 되면 분명 두 사람은 불타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흘려보낸 세월이 억울해서라도 열렬히 사랑에 빠질 거라고.
다희는 그 꼴을 두고 볼 자신이 없었다.
자신과 몰래 주고받던 메시지를 혜주와 나누고, 남들 다 퇴근할 때까지 눈치 게임하며 버티다 손잡고 나가는 일상을 혜주와 하게 될 것이다.
소문은 또 얼마나 지저분하게 날는지.
환승이별이다, 삼각관계다 별별 해괴한 소문이 다 돌 거다. 만약 승원이 작정하고 해명에 나서기라도 하면 피해를 보는 건 다희였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던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훼방 놓은 사실이 알려지는 날엔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겠지.’
불 보듯 뻔한 상황을 직감한 다희는 그날부터 매일 이력서를 썼다. 예상하지 못한 2차 합격은 그녀를 잔뜩 고무시켰다. 그 어렵다는 실무진 면접을 통과했으니 마지막 한 단계만 통과하면 최종 합격이다.
다희는 휴대폰을 들고 연락처를 뒤졌다. 그러다 이내 현타가 왔다.
‘연락할 사람이 없네…….’
마음은 구름 위를 둥둥 떠가는데 함께 축배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헤어진 승원에게도, 소원해진 혜주에게도 연락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신당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후우…….”
다희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습관적으로 혜주의 SNS를 뒤지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쭉 버릇처럼 해오던 일이었다.
“심심하니까 보는 거야, 심심해서.”
다희는 변명처럼 중얼거리며 최근 업로드 목록을 확인했다. 혜주는 SNS를 활발히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가뭄에 콩 나듯 종종 게시물을 올리곤 했다.
“어?”
다희는 그곳에서 무척 수상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한강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남자랑 갔네?”
별다른 코멘트 없이 올려진 사진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담겨 있었다.
계단에 앉은 혜주의 발이 메인이었고 그림자는 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한강 갔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쳤을 테지만 다희는 달랐다. 혜주의 발 옆에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에 시선이 딱 꽂힌 그녀가 매의 눈으로 사진을 검열하기 시작했다.
“밤이네. 모서리만 살짝 나왔지만 저건 한강 라면인 거 같고…… 운동화 신은 거 보니 산책한 건가? 야밤에, 남자랑?”
사진 한 장은 의외로 꽤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대충 상황이 그려진 다희는 이번엔 남자의 그림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림자에 눈코입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대충 찍힌 실루엣이 무척 훌륭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비율 좋은 상체가 사진상으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살짝 걷은 소매의 그림자까지 확인한 다희가 혼잣말을 했다.
“그림자가 되게 잘생겼네.”
그 순간 퍼뜩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주 가까운 곳에 그림자마저 잘생긴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설마…….?”
혜주는 인간관계가 좁고 깊은 편이었다. 야밤에 같이 한강 산책을 할 만한 남자는 승원 외에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 사진을 봤을 때 승원이 아닌가 의심도 했지만 그녀가 승원의 그림자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럼 누구지?’
혜주 주변에 어떤 남자가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다.
강주원.
혜주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고, 소매를 걷는 습관이 있으며, 항상 시계를 차고 다니는, 그림자마저 잘생긴 남자.
‘어떻게 된 거지? 둘이 사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혜주 은근히 소나무 스타일이라 특별한 계기 없이 관계가 발전됐을 리는 없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불현듯 과거의 몇 장면이 쏜살같이 뇌리를 스친다.
루비 대타로 주원의 버디가 되었던 일, 회식 막차 때 보란 듯 주원에게 고백했던 일, 그냥 주원과 사귀면 안 되냐는 말에 필요 이상으로 정색했던 일…….
‘게다가 요새 승원이 상태 말이 아니잖아. 나랑 헤어지고 바로 혜주랑 사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고…… 뭐지? 설마 오혜주 진짜 대표님이랑 사귀는 거야?’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 희열이 샘솟았다.
‘정말 그렇게 된 거라면 강승원은 닭 쫓던 개가 되었단 소리잖아! 그럼 아직 나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건데?’
때마침 승원이 식사를 끝내고 돌아왔다. 말도 섞기 싫다는 듯 바닥만 쳐다보며 들어오는 그를 다희가 붙잡았다.
“강승원, 너도 알고 있었어?”
그녀가 불쑥 휴대폰을 내밀었다.
환하게 켜진 액정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찍힌 사진이 들어 있었다.
승원의 이맛살이 와락 구겨졌다.
“뭐 어쩌라고. 너 이제 혜주 SNS 염탐까지 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