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헤어져야지 뭘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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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헤어져야지 뭘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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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헤어져야지 뭘 어쩌겠어
2022.12.01.
다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게 뭔데?’ 정도의 반응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승원은 이미 모든 걸 아는 사람처럼 가시부터 세웠다.
아이템 전에서 질 때 빼고는 거의 부처와 다름없는 승원이 보인 날카로운 반응은 다희에게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되게 까칠하네. 혜주랑 나랑 베프로 지낸 세월이 얼만데 SNS 구경도 못 해? 예전엔 비번 공유도 했었거든?”
“부부가 30년을 살아도 갈라서면 남이야. 한때 아무리 친했어도 지금은 남남이나 다름없지 않아?”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설마 내가 혜주한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래? 대체 날 뭘로 보고…….”
힐끗.
승원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무 감정이 없는 공허함 속에 불길이 일렁였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해코지라면 네가 나한테 했지. 너 때문에 난 혜주를 잃었어.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됐다고.’
원망 가득한 눈초리에 다희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승원은 끝내 속에 둔 말을 뱉지 않았다.
“그만하자. 다툴 기분 아니야.”
그가 다희의 어깨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말도 섞기 싫다는 듯 돌아선 그에게서 깊은 피로감이 전해져왔다.
“승원아.”
다희가 불렀으나 승원은 대꾸 없이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때마침 식사를 끝낸 직원 몇몇이 우르르 들어오는 바람에 더 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다희는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왔다.
노트북 화면을 켜니 아까 확인한 2차 면접 합격 메일이 그대로 떠 있었다. 다희는 혜주의 SNS 사진과 메일을 번갈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정황상 대표님이랑 혜주가 잘되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은데…… 그럼 승원이는 낙동강 오리알 된 거 맞지?’
적대적인 승원의 태도에 조금 상심하긴 했지만 사실 다희는 그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오히려 반가웠다.
그가 혜주와 잘 될 가능성이 없어진 거라면 다희에겐 기회가 아닌가!
‘이럴 때 옆에 있어 주면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지 않을까? 어쨌든 나랑 사귄 건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기 때문이잖아. 정말 힘들 때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나라는 걸 깨닫게 되면 승원이도 바뀌지 않을까?’
그녀의 눈동자가 파랗게 빛을 냈다.
다희는 회신 버튼을 쳐다보며 한참을 고심했다.
어쩐지 데이터스 코리아와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
해인신녀의 신당은 인적 없는 산길을 따라 구불구불 40분이나 올라가야 하는 깊은 산속이었다.
대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산비탈 아래 위치한 조그마한 신당이었다. 담벼락엔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마당엔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싸리문 주변으로 갈색 항아리가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죄다 뚜껑이 열린 걸 보니 장을 보관하는 건 아닌 듯했다.
주원은 택시 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신당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하루 운행으로 며칠 치 거금을 손에 쥔 택시 기사는 희희낙락하여 주변 구경이나 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오라며 친절을 베풀었다.
주원은 창호지가 발라진 신당 문을 두드렸다.
“여자 때문에 왔구먼?”
신당을 들어서는 주원을 보자마자 해인신녀가 내뱉은 말이었다. 첫 만남부터 대뜸 찾아온 목적을 짚어내자 주원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용하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건가.’
주원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치렁치렁 늘어뜨린 까만 머리칼에 형형색색 화려한 빛깔의 한복. 밀가루 반죽처럼 핏기없는 얼굴에 비해 입술은 핏빛처럼 붉어 기묘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나이는 삼십 후반쯤 됐을까? 예상보다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강주원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가 찾아온 이유를 아십니까?”
“그런 것도 모르면 여기 앉아 있을 자격이 없지! 이리 가까이 와.”
위압적인 말투였으나 묘하게 거슬리지 않았다. 겉모습은 30대지만 속엔 능구렁이 같은 게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흐음.”
주원이 맞은편에 자리하자 해인신녀가 눈꺼풀을 열었다.
남들보다 조금 큰 듯한 까만 동공 안에 오묘한 푸른빛이 돌았다. 그녀가 뿜어내는 영험한 기운 앞에서 좀처럼 긴장을 하지 않는 주원도 살짝 얼굴이 굳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쯧쯧. 대체 뭔 짓을 했기에 죽은 여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이승을 떠돌고 있는 게야?”
까만 구슬로 꿴 묵주를 빙글빙글 돌리던 그녀가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물었다.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오금이 저릴 만큼 안광이 강렬했다.
‘저 여자 눈에는 설마 혜림이 보이는 건가?’
여기 온 후 아무것도 말한 게 없음에도 족집게처럼 짚어내는 그녀의 능력에 주원은 사실 소름이 돋았다.
주원은 오늘 신당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닥터 최가 이곳을 추천해주긴 했지만 그 앞에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척 가장했다. 혹시나 그가 무당에게 정보를 흘려버리면 이곳에 온 목적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인신녀는 주원의 얼굴만 보고 ‘죽은 여자’를 짚어냈다.
이제는 장난이 아니게 됐다. 어떤 것도 허투루 들을 수가 없었다.
“죽은 여자의 기운이 느껴져.”
해인신녀가 묵주를 돌리며 뇌까렸다. 주원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 옆에 있습니까?”
“있는지 없는지는 여쭤봐야 알겠지. 눈 감고 손 내밀어 봐.”
주원이 손을 내밀자 해인신녀가 그의 손바닥에 붉은 돌멩이 하나를 놓았다. 커다란 팥 같기도 하고 수정구 같기도 한 그것은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
해인신녀가 주문을 외자 돌멩이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주원은 속으로 깜짝 놀랐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영이 이승에 매여 있어.”
해인신녀가 눈을 내리깐 채 중얼거렸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기운이 느껴져. 혹시 그 여자가 남긴 유품 같은 것을 몸에 지니고 있나?”
“그런 건 없습니다.”
“아니, 틀림없이 있을 거야. 그걸 찾아야 해.”
주원은 치열하게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러나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혜림과 예전에 주고받은 편지나 자잘한 선물은 그녀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모두 태웠다. 한을 품고 죽은 사람의 물건을 지니고 있으면 화가 미친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어머니인 선우연 여사가 혜림의 손이 닿은 모든 걸 불태울 때 주원도 그 곁에 있었다. 그래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그때, 혜림의 물건은 하나도 남김없이 재가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품이라고 할 만한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남긴 물건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죽은 여자의 흔적이 담긴 것이라면 뭐든 매개체가 될 수 있거든.”
“글쎄요.”
주원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혜림과는 고작 몇 달 과외를 했을 뿐이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문제집, 책상, 하물며 펜 하나까지 다 불태운 마당에 남은 물건이 있을 리가 없었다.
“굿 같은 걸 해야 합니까?”
주원이 희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주변에 서린 혜림의 기운을 단번에 읽어낸 무당이니 분명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해인신녀의 대답은 그의 기대를 무참히 깨부쉈다.
“차라리 원귀였으면 나았을 것을, 쯧!”
해인신녀가 주원의 손바닥에 올려둔 수정구를 회수하며 혀를 찼다.
“젊은 여자가 자살을 하면 보통은 편히 눈을 감지 못하네. 죽은 영이 무탈히 이승을 떠나게 하기 위해 천도굿을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원한이 짙은 경우 천도굿을 치러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 있어. 하지만 원귀라고 하기엔 슬퍼 보이네.”
“원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제 꿈에 나오는 그녀의 모습은…….”
“네 꿈에 어떤 모습으로 나오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죽은 여자의 한이 할 수 있는 건 자네의 기억을 부채질하는 것뿐이지. 즉, 자네의 악몽은 죄책감에서 비롯되는 거라네.”
주원은 가슴이 욱신하게 아려왔다.
혜림의 얼굴이 희미해질 때마다 주원은 아팠다. 그녀를 잊고 편히 사는 게 미안했고, 하루하루 옅어지는 상처에 죄책감을 느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왜 네 탓이냐고, 그만 벗어나라고 말한다. 모든 선택은 그녀의 몫이었다고, 어찌 보면 너도 피해자라고.
한때는 주원도 그렇게 생각하려 부단히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악몽이 시작된 후 서서히 깨달은 건 원혜림이 스스로 목을 맬 때 마지막으로 떠올린 사람이 자신이라면, 그녀의 죽음이라는 무게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죽은 여자의 영이 이승에 매여 있어. 이유조차 모르고 자네 곁을 맴도는 것처럼 보이네.”
“방법을 말씀해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유품을 찾아.”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럼 나도 해줄 말이 없네.”
해인신녀가 고집스럽게 입술을 닫았다.
굿이든 부적이든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주원은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유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유품을 찾으라는 건 영원히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선고와 다름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원이 이것저것 방법을 물었으나 해인신녀는 묵묵히 고개를 젓기만 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주원이 체념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몽이 더 심해졌겠지.”
해인신녀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꿈에 잡아먹힐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거야. 마음 편히 잠들지 못하고, 겨우 잠들더라도 악몽에 시달렸겠지. 갑자기 악몽이 심해진 이유는 자네도 짐작하고 있을 걸세.”
“…….”
“자네 연인의 존재가 죽은 여자의 혼을 자극하는 거야.”
“하지만…….!”
“아직까진 자네 혼자 괴롭고 말겠지. 하지만 머지않아 화가 그녀에게까지 미칠 걸세. 내 장담하지.”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주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화가 혜주에게까지 미친다니? 그럼 단순히 악몽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잠 못 자고 죽은 귀신이 되는 상상은 해봤어도 혜주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거라곤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
주원은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어금니를 악물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부적으로도, 굿으로도 악몽을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태연했던 포커페이스가 무너졌다.
해인신녀는 새하얗게 질린 주원의 낯을 힐끗 바라보곤 혀를 끌끌 찼다.
“헤어져야지 뭘 어쩌겠어.”
너무도 간단한 대답.
“죽은 여자를 자극하지 말게. 그래야 화를 면할 수 있어! 명심하게!”
간단해서 더 잔인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