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 왜 안 안아줘요? (54/121)


#54. 왜 안 안아줘요?
2022.12.04.



 
택시를 타고 오는 내내 주원은 넋이 나가 있었다.


‘헤어져야 혜주가 살 수 있다고?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주원은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저었다.

해인신녀의 살벌한 경고를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죽은 여자 운운하기에 홀랑 믿어버린 게 잘못이지. 무당 찾아가는 사람들 사연이야 거의 비슷비슷할 테고, 어쩌다가 때려 맞춘 걸 내가 순진하게 믿은 거지. 요즘 같은 세상에 무당은 무슨.’

주원은 엄습하는 불안감을 떨쳐내려 부단히 노력했다.

악몽을 없앨 방도를 찾으러 간 곳에서 저주와도 같은 말을 듣고 오니 미칠 지경이었다.

저 혼자 괴로운 건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혜주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소릴 들으니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제기랄, 애초에 신당을 찾아가는 게 아니었어.”

주원은 욕설을 짓씹으며 창밖을 노려보았다.

미로처럼 복잡해진 뇌리는 갖가지 가능성을 쥐어짜며 현실을 부정했다. 어쩌면 닥터 최에게서 정보가 샜을지도 모르겠다고, 그가 정말 환자에 대한 비밀엄수의무를 지키지 못한 거라면 소송이라도 걸어야겠다고.

그러나 습자지에 먹이 번지듯, 두려움이 번졌다. 행여 무당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혜주가 위험해지면 어쩌지?

‘만에 하나’라는 가정을 두고 상상해도 끔찍했다.

만약 자신으로 인해 혜주가 화를 입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건 혜림이 죽어 남긴 죄책감에 비견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혜주를 걸고서 그런 무모한 도박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제일 보고 싶은 사람 역시 그녀였다. 주원은 시트에 고개를 기댄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하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방법이 이별이라는 걸 알면서도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상황 설명은 해야겠지.’

잠시 고민하던 그가 전화를 걸었다. 머리를 맞댄다고 없던 방도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혜주와 상의를 해야 했다.


-여보세요? 대표님?

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주원의 안색이 굳었다.


“왜 루비 씨가 전화를 받습니까?”

좋지 않은 예감이 뒷골을 엄습했다. 탁한 목소리의 끝이 떨렸다.


-여기 병원이에요. 혜주 언니가 좀 다쳐서…….

질끈. 주원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해인신녀의 경고가 아찔하게 뇌리를 울렸다.


‘머지않아 화가 그녀에게까지 미칠 걸세. 내 장담하지!’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건가.

속에서 신물이 치밀어올랐다. 주원은 당장 택시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물었다.


“어딥니까, 거기가.”

끼이익-

집으로 향하던 택시가 급하게 유턴했다.

두방망이질하는 심장을 꾹 누르며 주원은 차창을 노려보았다.

지옥이 여기구나.

대비하지 못한 공포 속에서 한없이 무력해진다.

*

혜주가 입원한 곳은 회사 근처의 개인 병원이었다.

정형외과라고 쓰인 초록색 간판을 확인한 주원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들었다.


“오혜주 환자, 어디 있습니까?”

“대표님, 여기예요!”

사색이 되어 뛰어 들어온 그를 발견한 루비가 손을 흔들었다. 주원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그녀에게 쇄도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휴, 땀 좀 봐. 병원이라고 해서 많이 걱정하셨나 봐요. 그렇게 심하게 다친 건 아닌데…….”

“혜주 어디 있어요?”

“방금 응급처치 끝나서 아직 처치실에 있어요. 맨 안쪽 침대에 있으니 일단 들어가 보세요.”

주원은 인사조차 건네지 못하고 처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그마한 개인 병원이라 처치실엔 열 개 남짓한 병상이 놓여 있었다.

주원은 루비가 알려준 대로 맨 안쪽으로 들어갔다.

커튼이 반쯤 쳐진 침대에 혜주가 누워 있었다. 왼쪽 발목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어? 언제 왔어요?”

인기척을 느낀 혜주가 몸을 일으켰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 반가운지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어쩌다 다쳤는데.”

 

 
그녀가 웃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지 모르겠다.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탓하는 말이 먼저 나와버렸다.

혜주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거요. 계단 내려가다가 삐끗했어요. 욱 팀장님이 재무팀에 전하라고 한 서류가 있어서 아래층 내려가다가요.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대요. 일주일 정도 반깁스하면 괜찮을 거래요.”

“바닥을 똑바로 봤어야지.”

“그러게요. 내가 정신이 좀 없나 봐요. 요새 자꾸 이러네.”

배시시 웃는 그녀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 말고 또 그랬어?”

“다친 거요? 네, 별 건 아닌데 엊그제 주방 장갑을 홀랑 태운 거 있죠? 짜장 만드느라 국자로 휘젓는데 냄비가 자꾸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왼손에 주방 장갑 끼고 냄비 붙잡고 있었는데 손가락 부분에 불이 붙은 거예요! 불이 너무 셌나 봐요.”

“그게 웃을 일이야? 위험할 뻔했잖아!”

화르르, 불이 붙는 시늉을 하는 혜주를 보고 주원이 화를 냈다. 들끓는 속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마를 감싼 채 짙은 한숨을 내뱉는 그의 모습에 혜주는 얼떨떨해졌다.


“왜 화를 내요? 내가 일부러 다친 것도 아닌데 너무 예민하잖아요.”

안다.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누구나 할 수 있는 소소한 실수라는 것도,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주원은 크게 숨을 내쉬며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다친 덴 없어?”

“장갑만 태웠다니까요. 그거 토끼 모양이라 귀여운 거였는데…….”

“이건 무슨 상처인데.”

주원의 시선이 혜주의 정강이로 향했다. 붕대를 감느라 무릎까지 걷어 올린 바지 아래로 생긴 지 며칠 된 듯한 상처가 보였다.


“글쎄요?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네. 모기 물린 데 긁어서 피 난 건가? 아, 어쩌면 그저께 다친 걸지도 몰라요. 아침에 서두르다가 현관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에 부딪혔거든요.”

설마 벌써 시작된 걸까.

왜 다치고 그래. 무서워 미치겠다.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 난 생채기를 보니 합리적인 두려움이 스멀스멀 머릿속을 잠식한다. 해인신녀의 경고가 천둥처럼 귓가를 울렸다.


“표정 좀 풀어요. 내가 원래 좀 덤벙대잖아요. 정작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오빠가 그러니까 기분 이상하네.”

혜주는 참담하게 구겨진 주원의 미간을 풀어주려 일부러 장난스럽게 물었다.


“오늘 되게 기분 안 좋아 보이네요. 볼일 있다고 하더니 거기서 무슨 일 있었어요? 오, 설마 나 다쳤다는 소리 듣고 속상해서 그런가? 내가 요만큼만 살짝 다쳐도 마음이 막 찢어지고 그래요?”

“알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녀.”

“나 지금 혼나는 거 같아서 기분 별론데.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잖아요. 평소 멀쩡히 다니던 계단에서 헛것보고 자빠진 것도 억울한데.”

“헛것?”

“계단 내려가다가 뭔가 희끄무레한 게 발밑에 있길래 깜짝 놀라서 헛디뎠거든요. 근데 다시 보니 아무것도 없었어요. 빛이 반사된 거였나 봐요.”

목 언저리가 묵직하게 조여온다. 혜주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매일 같이 다니던 계단에서 헛것을 보고 넘어졌다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순한 사고일까? 아니면 해인신녀의 호언장담이 현실이 된 걸까.

가뜩이나 잠을 못 자 고장 난 기계처럼 뒤죽박죽이 된 머리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시작된 거라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주원은 어금니를 악물고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인상 좀 펴요. 누가 보면 초상난 줄 알겠네.”

혜주는 속도 모르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안아줘요. 보고 싶었어.”

딴엔 분위기를 풀어보려 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주원은 선뜻 그녀를 안을 수가 없었다. 아니, 활짝 열린 그녀의 품을 보니 저절로 몸이 굳어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녀를 안고 목덜미에 뺨을 묻고 싶었지만 안을 수도, 그녀의 입술을 머금고 한껏 취할 수도 없었다.


‘내가 그녀를 만져도 되는 걸까.’

혜주의 존재 자체가 원혼을 자극한다는 말은 그냥 듣고 넘기기엔 너무도 위험했다.

워크숍 이후 자잘하게 생긴 상처들, 무당의 경고 후 몇 시간이 채 흐르지 않아 들려온 사고 소식…….

믿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쓴 시간이 무색하게 모든 결과는 해인신녀의 경고에 수렴하고 있었다.


“왜 안 안아줘요?”

의자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주원을 보며 혜주가 불안한 듯 물었다.

내민 손이 무안한 건 둘째치고 분위기 자체가 이상했다. 바로 어제 사랑한다고 고백한 사람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까칠한 말투,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눈동자.

설마하니 조심성 없이 계단에서 자빠졌다고 저러는 건 아닐 텐데, 내가 뭘 잘못한 걸까?


“혜주야, 사실…….”

주원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말문을 열었다.

원래 혜주를 만나면 제일 먼저 상의하려 한 일이었다. 급작스러운 부상으로 놀랐을 혜주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나 싶지만, 혜림의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말로도 그녀를 납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혜주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죽어도 하기 싫어서 주원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때 드르륵 커튼이 젖혀졌다.


“혜주야, 괜찮으냐?”

때마침 병원에 도착한 수철이었다. 혜주가 계단에서 굴렀다는 소식을 듣고 단걸음에 달려온 그였다.


“아이고, 세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어쩌다 발목을 접질렀어? 어디 다른 데 다친 곳은 없어? 머리를 부딪힌 건 아니고?”

수철이 혜주의 어깨를 붙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아빠도 참, 별일 아니라니까 뭐하러 서울까지 왔어. 머리 멀쩡하고 허리도 멀쩡하대. 발목 살짝 부은 거 가지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그만하길 천만다행이지 뭐냐. 계단에서 굴렀다기에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어!”

“아빠 닮아 통뼈는 타고났잖아. 에휴, 처치실에 있느라 잠깐 폰을 맡겨놨더니 그새 이 사달이 났네.”

자리에 없는 루비를 괜스레 원망하며 혜주가 코를 긁적였다.

혜주가 멀쩡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수철은 멀뚱히 서 있는 주원을 발견했다.

딱 봐도 범상치 않은 포스에 한 번 흠칫, 훤칠한 이목구비에 다시 한번 흠칫한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원을 훑었다.


“누구십니까?”

“아빠, 이 사람은…….”

혜주가 자랑스레 주원을 소개하려는 찰나 주원이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강주원이라고 합니다.”

혜주는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주원을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소개하려나? 아빠 앞이니 정식으로 인사하겠지? 혜주 남자친구입니다, 그렇게 말하려나? 아니면 애인?’

두근두근한 심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을 때 주원의 입술이 열렸다.


“오혜주 씨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뒷말이 더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깍듯이 고개를 숙인 주원은 할 일을 끝낸 듯 입을 다물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혜주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애가 다쳤다고 해서 급히 올라오느라 손님이 계신지도 몰랐네요.”

“아뇨. 지금 가려던 참입니다.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애걔, 이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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