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
(55/121)
55.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
(55/121)
#55.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
2022.12.08.
주원이 정중히 인사하고 사라질 때까지 혜주는 제 귀를 의심했다.
‘설마 이게 끝이야? 정말 이렇게 가버린 거야?’
언젠가 수철에게 주원을 소개하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애지중지 키운 딸이라 억만장자가 와서 달라고 해도 아까울 것 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수철에게 주원을 소개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혜주가 데려온 신랑감을 보고 어디 흠잡을 데 없나 매의 눈을 뜨고 지켜볼 수철의 모습이 상상됐다.
잘생기고, 똑똑하고, 집안 좋고, 능력도 좋은 주원에게서 흠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놈이 과연 내 딸을 데려갈 자격이 되나 눈에 불을 켜고 살피는 수철의 모습을 그려보면 속으로 웃음이 났다.
그런데 이게 뭐야.
-오혜주 씨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정녕 그 주둥이에서 나올 말이 그게 전부란 말인가!
혜주는 어이가 없는 걸 넘어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럴 거면 사랑한단 말이나 하지 말지!’
사람 마음은 있는 대로 들뜨게 해놓고 뒤통수를 때려도 유분수지. 설마하니 아빠 앞에서 그런 식으로 내뺄 줄은 몰랐다.
“와……. 진짜 강주원……. 그렇게 안 봤는데 쌩양아치네!”
씩씩대던 혜주는 쉽사리 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철은 머리에서 김이 펄펄 나는 딸을 걱정했다. 진짜 머리 다친 거 아니냐며 몇 번이나 이마를 짚어보고, 정밀검사 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수선을 떨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다고 열 번쯤 확인시켜준 후에야 수철은 안심했다.
계단에서 넘어졌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 가게를 비우고 온 터라 금방 내려가야 하는 그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집에 혼자 갈 수 있겠어? 아빠가 내일 다시 올까?”
“가게 놔두고 왜 자꾸 올라와. 나 멀쩡하다니까? 이따 의사 선생님 한 번만 만나고 퇴원하면 되니까 걱정 마. 누가 보면 진짜 어디 하나 부러진 줄 알겠네!”
혜주는 씩씩하게 수철을 배웅하곤 이불을 덮고 누웠다.
열이 한 김 식으니 아까 주원이 보인 태도를 보다 침착하게 곱씹게 된다.
‘며칠 전부터 제대로 잠을 못 잔다고 했지. 오늘 어딜 다녀온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어딜 가냐고 물었을 때 얼버무리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친 혜주를 보고 하얗게 질리던 얼굴도, 혜주의 건강과 안전에 과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던 모습도.
‘대체 무슨 일이야. 답답해 죽겠네.’
평소와 다른 낯선 모습이 불안했다.
“후…….”
혜주는 이불을 푹 덮어쓰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아픈 발목이 더욱 욱씬거렸다.
“오혜주 환자분, 곧 선생님 오실 테니 대기해주세요.”
때마침 간호사가 그녀를 불렀다. 담당의의 오후 외래가 끝나 마지막으로 처치가 잘 되었나 상태를 확인하고 퇴원하면 된다고 했다.
“네, 알겠습니다.”
다행히 처치는 잘 되었고 발목의 붓기도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뼈가 부러진 게 아니기 때문에 입원까지 할 필요는 없고, 일주일간 통원 치료를 하면 금방 나을 거라 했다.
혜주는 휴대폰과 외투를 챙겨 처치실을 나섰다. 계단에서 자빠진 걸 보고 루비가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일이 커졌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큰 사고도 아니었다.
‘퇴근하고 왔어도 될 걸 괜히 시간만 버렸네.’
혜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절룩거리며 복도를 나왔을 때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입구를 향해 등을 돌린 채 로비 의자에 앉아 있는 주원이었다. 딱 벌어진 어깨만 봐도 누군지 알 수밖에 없는 남다른 자태였다.
‘집에 간 줄 알았는데 왜 아직 병원에 있대?’
기분이 좋기도 하고, 아직 화가 덜 풀려 밉기도 하고.
‘그래도 홀랑 가버린 것보다는 낫네.’
혜주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에게 다가섰다.
“강. 주. 원. 대. 표. 님. 여기서 뭐 하세요?”
아까 수철 앞에서 회사 동료라고 자신을 소개한 주원을 돌려 까는 말이었다. 평소 같으면 찰지게 받아줬을 주원의 반응은 힐끗 눈썹을 들어 올린 게 전부였다.
“아버지는 가셨어?”
“네, 조금 전에 내려가셨어요.”
분위기가 이러니 혜주도 더 이상 장난을 칠 수가 없었다.
“집에 간 줄 알았는데 왜 여기 있어요?”
“집에서 차 가지고 왔어. 데려다줄게, 가자.”
주원이 혜주의 외투를 받아들며 덧붙였다.
“할 말도 있고.”
표면상으로는 다친 애인을 집에 데려다준다는 핑계지만, 진짜 목적은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에 있다는 걸 혜주는 알 수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많지 않은 연애 경험으로 보건대 저렇게 굳은 표정으로 할 말은 딱 정해져 있다.
이별 통보, 아니면 이별 권유, 아니면 이별 선고.
하지만 불과 어제까지 사랑을 속삭인 남자가 난데없이 헤어짐을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든 놀라지 말자 다짐하며 혜주는 절룩절룩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야. 이번에도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으면 내가 먼저 차버릴 거야!’
속으로 되뇌면서.
*
차가 멈춰 선 곳은 둘이서 라면을 끓여 먹었던 한강변이었다.
그때 나란히 앉았었던 돌계단이 멀리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운 주원이 푹 꺼진 눈으로 혜주를 바라보았다.
“우선 미안하다. 아픈 데 이런 얘기 꺼내서.”
이 얘기를 하기까지 치열하게 고민했었다.
무당이며 원귀며 혼령이며, 21세기에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냔 말이다.
궁합 때문에 헤어졌다는 커플을 보면 요즘 세상에 그런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사상에 속아 넘어가기도 하냐며 냉소했고, 사주 때문에 출산일을 택일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그만큼 불신이 깊었던 사람이다 보니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들이 믿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해인신녀를 직접 만난 자신이 이럴진대 혜주는 어떻겠냐고.
다짜고짜 신당에 다녀왔다며 혼령이 어쩌고, 원한이 어쩌고 쏟아내면 어떻게 보겠냔 말이다. 입장 바꿔서 자신이 듣는 쪽이라면 저게 미쳤나 싶을 거 같았다.
그러나 어떠한 신념도 밀려드는 운명 앞에서는 무력한 법이었다. 신당에 다녀온 직후 들려온 혜주의 낙상 소식은 해인신녀의 경고를 뼈저리게 실감케 했다.
비로소 주원은 해인신녀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안일하게 굴었다가 혜주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
“믿기 힘든 얘기가 될 거야.”
기왕 털어놓을 거면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하는 게 옳았다. 그러려면 힘든 얘기부터 시작해야 했다.
주원은 핸들에 한 팔을 올려놓은 채 나직이 입술을 움직였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어.”
누구의 앞에서도 쉽게 이름을 올릴 수 없던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첫 만남, 이별, 스토킹, 그리고 그녀의 죽음.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결코 흐려지지 않는 상처가 주원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기억을 떠올리는 게 힘든 듯 주원은 몇 번이고 말을 멈추었으나 혜주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긴 대화 속에서 혜주는 딱 두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혜림이 죽었다는 얘기를 할 때와 주원이 십 년이 넘게 악몽에 시달렸다는 얘기를 할 때.
그 외엔 대체로 차분해서 마침내 주원은 모든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원혜림의 혼령이 날 위험하게 할 수도 있다는 얘기죠?”
“허무맹랑하지. 알아. 안 믿어도 할 수 없어. 나조차도 이 얘길 믿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으니까.”
주원은 미친놈 취급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택시가 하늘을 날아다니니 마니 하는 세상에 혼령이라니, 개가 웃을 일이지.
그러나 의외로 혜주는 덤덤했다.
“무슨 얘긴지 알았어요. 오빠 얘기를 들으니까 그동안 이상했던 게 다 이해가 되네.”
“믿어주는 거야?”
“저 사실 그런 거 좀 믿거든요. 미신이나 사후세계, 뭐 그런 거요.”
혜주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혜주는 무속신앙을 어느 정도 신뢰하는 편이었다. 신앙처럼 믿는 건 아니었지만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배척하지는 않는 정도랄까.
그건 무당을 엄마로 둔 다희 때문이었다. 다희의 어머니 최귀녀는 서른 초반에 신내림을 받은 용한 무당이었다.
다희는 그런 엄마를 부끄러워해 혜주와 룸메이트가 된 이후에도 그녀의 정체에 대해 얘기해준 적이 없었는데, 혜주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귀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상갓집에 다녀온 후 정체불명의 두드러기에 고통받는 혜주를 걱정한 다희가 부적을 받아온 것이다.
그 부적을 주면서 다희는 신신당부했었다. 엄마가 무당인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만약 소문이 퍼지면 진짜 옥상에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고.
“제 친구…… 엄마가 무당이거든요. 그래서 좀 알아요. 친구가 그러는데 무당이 하는 말 중 좋은 말은 흘려듣고 안 좋은 말은 새겨들어야 한 대요.”
“보통은 반대 아닌가.”
“그건 일반인 기준이고요. 무속인들 사이에서 불문율이란 게 있대요. 대다수의 무당은 장사꾼들이라 좋은 말만 해주고 돌려보내는 편이래요. 사주나 궁합이나 그런 거 볼 때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해석해주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당이 정말 안 좋은 얘기를 한다면 그건 흘려들어서는 안 된대요.”
미친놈 취급하지 않은 건 다행인데 저 얘길 들으니 더 불안해진다.
그럼 해인신녀의 말을 정말 믿어야 한다는 것인가?
평생 합리주의자로 살아온 주원은 혼란스러웠다.
“나도 무작정 믿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얘기해보는 게 맞는 거 같아요.”
“그래, 알았어.”
“그 전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아까 우리 아빠 앞에서 왜 그랬어요?”
왜 남자친구인 사실을 숨겼냐는 뜻이었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똑바로 자신을 응시하는 시선 앞에서 주원은 작아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정신이 아니었다. 혜주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무당의 경고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겠는가!
혜주가 응급처치 중이라 자세한 상황을 몰랐던 루비가 ‘혜주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다쳤다.’라고 모호하게 말해버리는 바람에 주원의 불안은 극대화되었다.
병원으로 내달리며 속으로 하나만을 빌었다. 혜주만 무사할 수 있다면 뭐든 포기할 수 있다고.
이별이 최악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정말 최악인 건 혜주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병원으로 달려온 주원은 갑자기 마주친 수철 앞에서 자신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 당당할 수도 없었다.
‘제가 혜주 애인입니다. 따님을 제게 맡겨주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그녀를 제일 위험하게 하는 놈이 누군데.
“보통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이럴 때 꼭 헤어지자고 하던데, 강주원이 그렇게 진부한 남자일 것 같지는 않아서.”
쉽게 입술을 떼지 못하는 주원에게 혜주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