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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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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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2022.12.11.
강주원은 Yes or No에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고,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믿기에 선택에 망설임이 없었다.
애매모호한 건 딱 질색. ‘칼주원’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모든 선택엔 냉정했고 책임 또한 확실했다. 선택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사소한 아쉬움 따위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혜주의 물음 앞에서 주원은 평소 그토록 질색하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스스로 생각해도 참 볼품없었다. 면접장에서 저따위 대답을 들으면 가차 없이 탈락시킬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 없는 대답이었다.
드물게 고개를 푹 숙인 주원의 어깨 위에 한없이 무거운 감정이 내려앉았다. 혜주는 물끄러미 주원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강주원이 풀죽은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현실과 이성의 괴리 속에서 힘들어하는 그를 보니 안타까웠다.
강주원 하나만 걸려 있다면 모르되 혜주의 안위까지 달린 일이었다.
‘지금 오빠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모르겠어. 지켜보는 나도 이렇게 불안한데…….’
홀로 신당으로 향할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혜주는 부드러운 눈으로 주원을 바라보았다.
“뒷말이 생략된 거 아니에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해야 할 몫만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힘들어하면 그걸 알아주는 게 여자친구인 내 몫이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곁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것 역시 그녀의 몫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었다.
“내 얼굴 보고 얘기해요.”
혜주가 손끝으로 주원의 뺨을 톡 찔렀다.
그녀는 더 이상 주원의 말이 섭섭하지 않았다.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헤어지기 싫다는 말과 같았다.
사정을 다 듣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생략된 거 맞아.”
하지만 주원은 여전히 착잡했다.
“널 위험에 빠뜨리느니 헤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해.”
“…….”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그래, 정말 헤어지려고 마음먹었으면 너한테 이따위 거지 같은 얘기를 늘어놓지도 않았을 거야. 헤어지자, 그 말 한마디가 가장 깔끔하니까.”
그가 혜주의 손목을 잡으며 눈을 바라보았다.
“비겁한 거 아는데, 나 지금 너한테 선택을 미루고 있는 거야. 내 옆에 있으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분명 경고했으니 감당할 수 있으면 해.”
한없이 맑은 혜주의 눈을 보니 자신이 더욱 비겁하게 느껴진다. 주원은 자조했다.
“이렇게 이기적인 새끼다, 내가.”
적막한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혜주가 한결 단호한 눈빛으로 주원을 마주했다.
“그럼 내가 답을 줄게요. 난 오빠랑 못 헤어져요.”
쿵쿵.
그 한마디에 얼어붙은 심장이 폭격을 맞은 듯 뛰었다.
“강주원 놓치기 아까운 건 둘째치고, 그 여자한테 지는 것 같아서 싫어.”
주원은 똘망똘망한 눈을 하고서 불끈 주먹을 쥔 혜주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와, 미치겠네. 승부욕이 이렇게 예쁠 일이냐.
“내가 한 번 봐줬으니 오빠도 하나 약속해요. 내가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전엔 헤어지잔 소리 하기 없기.”
“이게 겁도 없이…….”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해요. 괜히 딴소리하지 말고.”
차게 식었던 혈류가 갑자기 빨리 돌았다.
어떻게 이러냐.
남자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흔들어 놓냐고.
고마운 게 다가 아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화살촉처럼 가슴에 박혀 뿌리를 내렸다.
지금 이 순간 주원은 혜주가 원하면 하늘의 별도 달도, 아니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다.
“약속할 수 있죠?”
이 정도 각오면 한번 덤벼봐도 되겠지. 너랑 나 이렇게 서로를 원한다면.
뜨겁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비로소 그녀를 담았다.
“……어.”
“그 약속 꼭 지켜요. 나 절대 안 차일 거야.”
그녀의 단언은 주원에게 확신이 된다.
“절대 안 차.”
누군가에게 빠지는 순간은 이토록 급작스럽다.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100이었다면 순식간에 열 배, 아니 백 배로 뻥튀기되는 느낌이었다.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다가 거품으로 가득 찼다. 고동 소리가 귓가에 쿵쿵 울리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귀신이고 나발이고, 지금 당장 저 예쁜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주원의 입술이 끌리듯 혜주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역시 오혜주는 냉정한 여자였다.
“터치 금지요.”
손바닥으로 입술을 딱 막은 그녀가 B사감 저리 가라 할 만큼 냉정하게 꾸짖었다.
“귀신 나부랭이가 내 발목뼈까지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으니까요.”
아쉬워하는 주원을 달래며 혜주가 차 문을 열었다.
“일단 돌아가요. 오늘을 무사히 넘기나 한 번 보자고요.”
“하아, 정수리에 CCTV 달린 기분이다.”
“난 그 CCTV에 감시당하는 기분이고요.”
혜주는 배웅하는 주원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쓰다듬었다.
“헤어지기 아쉽지만……. 조심히 가요. 오늘은 잘 잤으면 좋겠네.”
“미안해. 걱정시켜서.”
처음으로, 주원이 웃었다.
희미한 미소였지만 혜주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지금 같이 못 있어 주는 대신 잠 못 자서 죽은 귀신 되면 네 옆에 딱 들러붙어 있을게.”
“사양합니다. 해인신녀 찾아갈 거예요.”
“섭섭하네. 귀신 돼서도 잘생겼을 텐데.”
“정말 그럴 거 같아서 무섭네요. 귀신 돼서 꼬셔도 넘어갈 거 같아.”
서로의 눈을 바라보니 웃음이 터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지만 다 털어놓고 나니 마음은 후련했다.
*
혜주와 헤어진 주원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차를 돌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본가였다.
‘만약 원혜림의 유품이 있다면 반드시 그곳에 있을 거다.’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미국에서 귀국한 후 살기 시작한 곳이었다.
이사를 하면서 새로 살림을 차렸기 때문에 본가에서 쓰던 짐은 거의 가져오지 않았다.
따라서 만약 혜림의 물건이 어딘가 남아 있다면 미국에 가기 전까지 살았던 본가, 그중에서도 혜림에게 과외를 받았던 주원의 방에 남아 있을 가망성이 컸다.
‘우선 집에 가서 살펴봐야겠어. 해인신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뭐라도 나오겠지.’
혜주와 아쉬운 작별을 하며 주원은 다짐했다.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혜림의 유품을 찾는 것이라면 온 집 안을 뒤집어엎어서라도 찾고야 말겠다고.
손잡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머리를 쓰다듬고 싶고.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에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손길이 끌리는데 고작 눈 맞춤으로 만족해야 한다니 아쉬운 걸 넘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부엌에서 가사도우미 도 씨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어머, 첫째 도련님 오셨어요? 사모님이랑 사장님은 잠시 산책 나가셨는데 하필 이럴 때 오셨네요.”
주원은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사모님한테 연락하고 오신 거예요? 지금이라도 전화 드릴까?”
“아뇨. 괜찮습니다.”
“아유, 안색이 너무 안 좋네. 꼭 며칠 동안 잠을 설친 사람처럼.”
도 씨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주원은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일이 조금 바빴습니다. 어머니껜 전화하지 마세요.”
“네, 그럴게요.”
전에 있었던 가사도우미와는 이모, 이모 하면서 가깝게 지냈었지만 도 씨와는 말도 몇 번 섞어보지 않은 사이였다.
도 씨는 주원이 미국으로 건너간 직후 본가에서 일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본 적도 별로 없었고, 대화라고 할 만한 것도 거의 나눠보지 못해 어색한 게 당연했다.
“저녁 식사는 하고 온 거예요? 뭐 좀 차려드릴까?”
“괜찮습니다. 그럼.”
주원은 살갑게 말을 붙이는 도 씨를 피해 이 층으로 올라갔다.
방은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래 비워둔 곳이지만 바로 어제까지 살았던 것처럼 먼지 한 톨 없었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주원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온 방을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책꽂이부터 침대 밑, 책상 서랍과 옷장까지 죄다 뒤졌다. 책 사이사이며 액자 뒤며 카펫 아래며 CSI 출동을 방불케 하는 탐색이었다.
쓸데없이 방은 어찌나 넓은지 꼬박 두 시간을 뒤집은 후에야 대충 끝이 보였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으며 주원은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후우, 과연 이걸까?”
그의 손엔 핑크색 포스트잇 묶음이 들려 있었다.
책상 서랍 깊숙이 들어 있던, 있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존재감 없는 물건이었다.
핑크색 물건은 단언컨대, 살면서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다.
선우연 여사 역시 무채색을 좋아하는 데다 학용품을 직접 사주는 스타일도 아니었기에 꽤 의아한 물건이었다.
한참을 탐색하고 나서야 주원은 뒤늦게 기억을 떠올렸다. 그건 과외 선생이었던 혜림이 수줍게 건넸던 선물이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이것밖에 없었어. 혜림과 관련된 물건이라고는…….’
일단 뭐라고 찾아서 다행이긴 한데, 과연 이런 걸로 그 끔찍한 악몽이 몇 년씩이나 이어졌을까 생각하니 회의적이긴 했다.
“우선은 시도나 해보자.”
주원은 포스트잇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러곤 라이터에 불을 붙여 포스트잇을 태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불은 잘 붙지 않았다. 고전하던 주원은 삽을 하나 가져다가 연못가 옆에 조그마한 구덩이를 팠다. 그러곤 포스트잇을 한 장 한 장 뜯어 구덩이에 넣고는 다시 불을 붙였다.
그제야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종이는 이내 예쁜 불티를 흩날리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잘 수 있을까.’
불꽃에 스러지는 종이를 보며 주원은 상념에 젖어 들었다.
몹시 피곤했다. 거의 24시간 동안 눈 한 번 제대로 못 붙이고 깨어 있는 기분은 생각보다 정말 더러웠다. 뭘 해도 머리가 멍하고 입맛도 없었다.
한 시간이라도 좋았다. 아무 생각 없이 곯아떨어지고 싶었다.
사박사박.
그때 누군가 풀밭을 밟고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선우연 여사였다. 어깨에 숄을 두르고 나온 그녀가 불씨만 남은 구덩이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니, 산책 잘 다녀오셨어요? 그런 형식적인 인사는 오가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주원의 행동만 보고서도 우연은 대강의 사정을 짐작했다. 혜림이 죽은 후 힘겨워하던 아들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그녀였다.
“요새 악몽을 꿔요, 어머니.”
주원이 짧게 말했다.
무거운 말에 우연은 심장이 덜컥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때 그 아이 때문이니?”
“네.”
주원은 최근 악몽이 심해진 것과 오늘 해인신녀를 만난 얘기를 우연에게 들려주었다. 모든 걸 알게 된 우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래서 그 아이의 흔적이 남은 물건을 찾으려고 이 밤에 온 거야?”
“네.”
“무당이 하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 아이 물건은 내가 더 찾아보마. 그때 다 불태워서 뭔가 남아 있을 것 같지는 않다만.”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아 그렇지 혜림으로 인해 우연도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생 아들이 과외 선생과 교제를 했다는 것도 실망스러운데, 스토킹까지 당하다니.
그걸로 끝났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거다.
혜림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주원을 경찰서에 들락거리게 하더니 나중엔 정신과까지 드나들게 했다. 솔직한 심정으로 우연은 혜림의 죽음이 안타깝기보다는 원망스러웠다.
“집에서 뭔가 찾아내지 못하면 다 버리고 이사하는 것도 방법이야. 나도 방법을 찾아볼 테니 너무 걱정 말거라.”
우연이 따뜻한 손길로 주원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네 잘못이 아니야. 알고 있지?”
“네.”
오랜만에 느껴본 어머니의 체온에 주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우연은 알고 있었다. 지금 아들이 한 대답이 거짓이란 걸.
마지막 불씨가 꺼졌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돌아섰다.
“그만 가볼게요, 어머니.”
주원은 우연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랐다.
*
그런 그를 이 층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있었다.
어둑한 창가에 선 여자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어렸다. 스산하게 내려앉은 검은자위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그녀가 탁 방문을 닫고 돌아섰다.
“X랄들 하네.”
열린 창문 사이로 스민 바람에 커튼이 휘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