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소심한 강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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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소심한 강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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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소심한 강주원
2022.12.18.
“너 남자친구 있었어?”
“헉, 뭐야! 누나 결혼해?”
생일 잔치가 발칵 뒤집혔다.
퀵 기사가 전달한 것은 고급스럽게 포장된 케이크와 양주 한 병이었다.
5성급 호텔의 베이커리 부티끄 중에서도 핫하기로 유명한 가게에서 직접 주문한 모카 쉬폰 케이크와 30년산 양주.
“우와, 대박! 나 SNS에서 이 케이크 본 적 있어! 이거 그 호텔 거잖아! 그 어디냐……. 장충동 거기!”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호화스러운 선물에 필립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정작 생일의 주인공인 수철은 심드렁했다.
그의 시선은 케이크 상자에 달랑거리는 카드에 꽂혀 있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미래의 사위 올림.]
그의 입술이 묘하게 심술궂어졌다.
“사위? 사위이이이이?”
내 딸 준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여기서 사위가 왜 튀어나오는 거야?
남자친구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미래의 사위라니!
주원의 존재에 대해 일언반구도 듣지 못한 수철의 입장에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거 뭐냐? 진짜 연애를 하긴 하는 거야?”
수철이 추궁하듯 물었다. 전전긍긍하는 그의 태도에 혜주는 웃음이 났다.
‘누가 딸바보 아니랄까 봐.’
퀵이 도착했을 때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반듯하게 쓴 글씨체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생일상에 케이크가 빠진 건 어떻게 알았는지, 센스 있는 선물이 역시 강주원다웠다.
혜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잘난 체를 했다.
“파릇파릇한 나이에, 이 미모에 남친 없으면 비정상이죠. 왜들 놀라고 그래요?”
“누나 연애 안 한 지 백 만년이라고 들었는데?”
“잘못된 정보야.”
필립이 딴지를 걸었지만 혜주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저번에 병원에서 봤던 그놈이냐?”
수철이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경계하는 반응에 혜주가 눈을 흘겼다.
“왜 남의 집 귀한 자식더러 그놈이래?”
“그놈이 맞기는 한가 보지?”
“이놈 저놈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멀쩡한 이름 놔두고 왜 욕을 해. 그 사람 이름 강주원이야. 내 남자친구고.”
“그런 놈이 병원에서 그렇게 내빼?”
수철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구겼다.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부터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남자의 직감이 말하건대 혜주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일명 수컷의 눈빛이랄까.
그런데 정작 자신을 소개할 땐 직장 동료라고만 했다.
장사를 오래 한 사람들은 사람 눈동자만 봐도 대충 분위기를 아는 법이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는 게 분명한데, 저렇게 발뺌을 하는 이유가 뭐지? 깎아놓은 밤톨처럼 잘생긴 외모가 뺀질뺀질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지. 나 때는 말이야, 예비 장인을 만났으면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 그래도 빗자루에 궁둥이 맞고 쫓겨나는 일이 허다했다. 생긴 건 사내답게 멀쩡해서 하는 짓이 영 시답잖으니 맘에 안 들지.”
“아빠가 좀 봐줘. 갑자기 마주치니 당황해서 그래.”
“아무리 당황해도 그렇지, 자기소개도 제대로 못 하면 쓰나. 그놈 원래 좀 소심하고 그러냐?”
“어어……. 아마도?”
“생긴 거랑은 딴판이네.”
수철이 실망스럽다는 듯 혀를 쯧 찼다. 졸업생 대표로 2만 명 앞에서 연설을 했던 강주원이 들으면 억울해서 뒤로 넘어갈 얘기였다.
“아무튼 한 번 봐서는 모르는 법이지만 일단은 마음에 안 든다. 그러니까 이건 아껴뒀다가 진짜 사위로 인사 오면 개봉해야겠다.”
수철이 예쁘게 포장된 술을 찬장에 갈무리했다.
마음에 안 든다면서 술은 왜 아껴두는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일단 선물을 내치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만약에 인사 안 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이까짓 거 확 갖다 버릴란다.”
이까짓 거라고 하기엔 너무 비싼데…….속으로 생각한 순간 필립이 불쑥 끼어들었다.
“버릴 바엔 저 주세요, 아저씨. 딱 봐도 되게 비싼 술인데…….”
“야!”
“오춘택!”
혜주와 미옥이 동시에 필립을 째려보았다.
“뭐, 왜! 맨날 입 두고 말도 못 하게 해!”
필립이 뾰로통한 얼굴로 항변했다. 혜주는 싹 무시한 채 초에 불을 붙였다.
“이제 진짜로 파티해요. 아빠, 생일 축하드려요!”
하트 모양의 초에 예쁘게 불이 붙었다.
가족이라 하기엔 뭔가 부족하고, 가족이 아니라 하기엔 너무 끈끈한 네 사람의 얼굴에 동시에 미소가 떠올랐다.
꽤 포근했던 수철의 예순 번째 생일이었다.
*
생일파티가 끝난 후 혜주는 주원과 통화를 하기 위해 복도에 나와 있었다.
“퀵 도착했을 때 진짜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선물 보낼 생각을 했어요?”
-첫 만남에 점수를 너무 못 딴 거 같아서. 아버님이 뭐라셔?
“인사도 똑바로 못 하고 너무 소심하대요, 큭큭. 그래도 선물은 무척 좋아하셨어요.”
-하아……. 굴욕적이다.
주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주원 인생에 소심하단 말은 처음이었다.
“그러게 병원에서 누가 내빼랬어요?”
-잘못했어.
“오혜주 씨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래놓고 갑자기 예비 사위라니, 큭큭.”
-내가 죄인이다, 그래.
주원이 절망하니 더욱 놀릴 맛이 났다.
혜주는 좀 더 곯려줄까 하다가 잠을 제대로 못 자 무척 피곤할 주원을 생각하여 참기로 했다.
“뭐 사람이 살다 보면 소심한 날도 있는 거죠. 그래도 타이밍은 기가 막혔어요. 하필 생일상에 케이크가 딱 빠져서 아쉬운 찰나에 퀵서비스가 도착한 거 있죠?”
-다 알고 보낸 거야.
“에이, 거짓말.”
통화를 하다 보니 그리움이 짙어졌다.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는데 이렇게도 보고 싶을 일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마음이 치일 지경이었다.
“잠은 좀 잤어요?”
혜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제 자보려고.
까칠한 음성에서 숨길 수 없는 불안함이 묻어났다. 잠이 들면 어김없이 마주하는 악몽을 피해 최대한 버티고 있지만 자꾸 찾아드는 수마를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의 곁에 있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도 그의 손을 잡아줄 수 있다면.
“잘 자요.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요.”
혜주는 안타까움을 숨기며 제 불안감이 주원에게 전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때 필립이 껄렁껄렁 나왔다.
“누나 뭐해?”
마침 끊을 타이밍이라 혜주는 주원에게 잘 자란 인사를 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보면 모르냐. 남자친구랑 통화하잖아.”
“오, 유니콘인 줄 알았는데 상상 속 인물은 아니었네?”
“이게 진짜.”
혜주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으악, 때리지 마! 나 귀한 몸이야!”
“귀한 몸 같은 소리 하네. 땅 파서 백 원도 못 버는 게 어딜 봐서 귀한 몸이야?”
“나 곧 데뷔하거든?”
“그 소리 지겹지도 않냐.”
“이번엔 진짜야. 나 요새 투자자 하나 물었거든.”
왜 그 소리가 내 귀엔 호구 하나 물었다는 말로 들릴까.
데뷔한다고 설레발쳤다가 엎어진 게 벌써 열 번이 넘었다. 필립의 처참한 작사 실력을 아는 혜주는 애초에 데뷔한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미옥과 수철은 달랐다. 매번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혜주는 안쓰럽기만 했다.
어차피 필립의 인생이고 친동생도 아닌 마당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너 저번에 우리 회사 앞에 여자친구 만나러 왔다고 했었지? 너 설마 그 여자한테 용돈 뜯어먹고 살아?”
“아니거든? 누굴 개양아치로 알아?”
“진짜 용돈 한 번도 안 받았어?”
“……남이사!”
저렇게 나오는 거 보니 받았네, 받았어.
혀를 쯧쯧 차는 혜주를 보고 필립이 목에 핏대를 높였다.
“나 진짜 올해는 데뷔할 거야. 힙합 레이블에 들어가서 쇼미 나가기로 했다니까? 데뷔만 하면 그동안 신세 진 것들 싹 갚고 베풀면서 살 거야. 누나한테 빌린 돈도 다 갚을게.”
“내 돈 갚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사고나 치지 마.”
“내 여친하고 똑같은 소리 하네.”
저런 한량하고 사귀어주는 여자가 있다니 진짜 놀라울 따름이다.
혜주는 얼굴도 모르는 불쌍한 여자에게 애도를 표했다.
“그나저나 여친은 어디 회사 다니는데?”
“몰라. 뭔 IT회사라고 들었는데 이름을 까먹었어.”
“나랑 같은 건물에 다니는 거면 오다가다 마주친 사이일 수도 있겠네.”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해. 누나한테 절대 안 보여줄 거거든?”
“내가 잡아먹냐?”
“만나봐야 뻔하지. 내 욕만 한 보따리 할 거잖아. 누가 주워가지도 않을 그지 새끼랑 왜 사귀냐고.”
“알면 다행이네. 정신 차리고 살아.”
“누나 그런 의미에서 나 십만 원만 주라.”
이제 보니 오춘택이 물었다는 호구가 다름 아닌 나였네.
틈만 나면 용돈을 뜯어가려고 호시탐탐 눈알을 번뜩이는 필립의 태도에 신물이 났다. 친동생도 아니건만 그동안 챙겨 준 게 얼만데!
수철이 외롭지 않게 곁을 지켜주는 미옥이 고마워서 진짜 물심양면으로 필립을 챙겼다. 대학 들어갈 때 원서도 써주고, 배곯고 있을 때 밥도 사주고, 하다못해 고약한 랩 가사도 성심성의껏 봐주었다.
그런데 또 돈을 달라고? 네가 정녕 사람이냐!
“아빠 생일날 쥐어 터져볼래?”
혜주가 두 눈으로 레이저를 쏘았다.
“그렇게 도끼 눈 뜨고 쳐다보지 마! 아까 교통비 한다고 용돈 다 썼단 말이야. KTX가 왜 이렇게 비싸.”
“두 손 내밀어봐.”
“돈 주게?”
“그대로 쭉 걸어와.”
희희낙락 걸어온 필립이 두 손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혜주는 그의 정수리가 빈 것을 보고 곧바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으악!”
필립이 곧장 가드를 올렸다. 혜주는 짜랑짜랑 소리를 내는 그의 목걸이를 왼손으로 낚아채고 옆구리를 꼬집었다.
“사지 멀쩡한 놈이 남의 주머니나 털고 살아? 너 진짜 정신 안 차릴래?”
“으악! 내 옆구리!”
복도에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쳤다.
웬일인가 싶어 나올 법도 한데 미옥과 수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철딱서니 없는 아들에게 참교육을 시전하는 혜주를 조용히 응원하고 있었다.
*
새벽녘.
오랜만에 본가 자신의 방에서 잠이 든 혜주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으음…….”
집이 오래돼서 쥐가 기어 다니나.
잠시 생각한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막 방을 빠져나가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히익, 뭐야?”
혜주는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콩콩콩콩,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거실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니 꿈은 아니었다.
“저거 오춘택 아니야?”
혜주는 얼른 이불을 걷고 책상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의자에 놓아두었던 가방이 빼꼼 열려 있다. 불길한 예감에 지갑을 열어보니 10만 원이 비어 있다.
“하, 이 자식…….”
필립에게 지갑을 또 털렸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안일했을까. 용돈을 얻기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오춘택 성격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지갑을 꽁꽁 숨겨 두었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여기 올 때 지갑을 가져오지 말걸!
“그나마 2만 원 남겨놓은 거 보면 양심적이라고 해야 하나…….”
혜주는 실소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들킨 걸 알고 사과 전화라도 한 건가 싶어 휴대폰을 보니 뜻밖에도 발신인은 주원이었다.
‘지금 새벽 2시인데?’
덜컥 가슴이 내려앉은 혜주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혜주야…….”
수화기 너머에서 불안한 숨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