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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나랑 자 줘 (60/121)


#60. 나랑 자 줘
2022.12.25.


해인신녀는 혜주의 존재가 죽은 원혼을 자극한다고 했다.

걷잡을 수 없이 악몽이 심해진 상황에서 혜주를 안으면 어떻게 될지.

긴 밤을 지나고 나면 다시 해가 떠오르기는 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주원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두려움에 갇혀 그녀를 잃어가는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귀신 따위에 휘둘리는 짓은 이걸로 족해.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 아직은 좀 더 버틸 수 있다.’

처음엔 체념이었는데 이제는 각오가 되었다.


“오혜주.”

제 옷을 입은 그녀에게선 저와 같은 향기가 났다.

같은 침대에 누워, 같은 옷을 입고, 같이 잠을 자고. 그녀의 모든 걸 저로 채우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지금의 넌 진짜일까. 그때는 오히려 확신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

타는 듯한 시선이 혜주를 가두었다.


“네가 이렇게 눈앞에 있는데…… 아직 악몽 속에 갇혀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주원은 혜주를 내려다본 채로 말했다.


“하지만 도망 안 칠 거야.”

이 밤의 끝이 끝내 악몽으로 변한대도 몇 번이고 같은 꿈을 꿀 거다.

두려울 땐 이 순간을 기억하며 견디면 돼.

그의 눈동자에서 각오를 읽은 혜주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주원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 눈빛 하나에 여실히 느껴진다.

강주원은 지금 목숨을 걸고 있었다.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귀신 나부랭이가 아니라 사랑에 걸겠다고, 그가 말하고 있었다.


“응, 오빠. 도망치지 마.”

혜주가 또렷한 눈매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심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이쪽에서도 맞서 싸우면 돼.

주원이 잠을 못 잔다면 지구 반대편의 의사를 찾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고쳐 줄 것이다. 무당이고 퇴마사고 상관없어. 도움을 받을 곳이 있다면 바짓가랑이를 붙들어서라도 데려올 거야.

그럼에도 악몽이 찾아온다면 긴 밤 내내 그의 손을 잡아줄 거다.

그러니까 오빠, 이제 겁먹지 마.


“악몽이 아니란 거 확인시켜줄게요.”

혜주가 주원의 목을 끌어당겼다.

악몽을 꿀 때면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여자의 손길을 느낀다는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내 체온이 얼마나 뜨거운지. 당신을 만질 때 얼마나 가슴이 뛰는지.


“따뜻하죠?”

“응.”

뺨에 닿은 손으로 가만히 얼굴을 어루만지자 주원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혜주는 그의 붉은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봐요. 숨도 잘 쉬죠?”

“응.”

이번엔 그의 손을 이끌었다. 그의 손바닥을 아래로 한 채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얇은 옷 위로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심장도 뛰고.”

“응.”

그러곤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숨을 쉴 때마다 뛰는 맥박과 함께 그의 체취가 훅 밀려들었다.

혜주는 힘줄이 선 그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이렇게 오빠를 원하고 있고요.”

“……응.”

한마디 한마디 뱉을 때마다 주원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까완 비교할 수조차 없이 체온이 뜨거워지고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당장이라도 그가 밀려들 것 같은 느낌 속에서 혜주는 진심을 다해 고백했다.


“사랑해요.”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여자가 아무리 미련이 많아도 나만큼 진심일 수는 없어. 그러니까 내 진심을 믿어요. 강주원을 사랑하는 오혜주는 진짜야.”

그녀의 고백이 주원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태어나서 들어본 수백 번의 고백 중 유일하게 가슴이 반응했다. 누가 심장을 꽉 쥐었다 놓은 것처럼 압박감이 느껴지고 온몸의 혈류가 빨라졌다. 당장 죽는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지키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서린 눈동자, 다부진 입술, 올망졸망한 콧날, 살짝 붉어진 뺨까지 어느 한군데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녀의 모든 걸 갖고 싶다. 그리고 내 모든 걸 주고 싶다.

서로를 가득 채우고, 또 온전히 나누고 싶다.

수일째 지속된 불면은 들끓는 욕망 앞에서 무력했다. 인내심이 바닥난 주원은 그대로 혜주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방금 고백을 내뱉은 입술은 다디단 과일 같았다. 생명수를 마시듯 온 힘을 다해 혜주의 입안을 빨아먹고 그녀의 입안에 고인 맑은 물을 마셨다.


“이제 못 물러. 네가 나 책임지는 거야.”

집안의 장남으로, 학교 수석으로, 회사 대표로, 지금껏 책임지는 인생만 살았던 강주원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온전히 자신을 부탁하고 싶어졌다.

사랑해달라고, 챙겨달라고, 죽을 때까지 같이 있어 달라고.


“절대 안 물러요.”

혜주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진 순간 주원은 거칠 것이 없어졌다. 두 팔을 교차해 셔츠를 벗은 그가 입술을 내렸다. 곧게 뻗은 혜주의 목덜미에 흔적을 남기며 그렇게도 욕심났던 그녀를 한껏 맛보았다.

조개처럼 벌어진 붉은 입술에 자신을 밀어 넣고 손을 뻗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옷자락이 사부작거리며 물러났다.


“사랑해, 혜주야.”

“나도…… 나도 사랑해요.”

 

 
만지면 바스라질 것처럼 부드러운 살결에 끝없이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였다.

고개를 젖힌 혜주의 잇새로 달뜬 숨이 흘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모든 것이 주원에게 넘겨졌다.

빈틈없이 맞닿은 몸을 부드럽게 움직이자 오르내리는 숨소리가 가빠졌다.

완벽히 하나가 되었고 완전히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창밖으로 동이 터왔지만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새로운 아침에 떠오른 태양보다 서로가 더욱 빛났기에.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대를 담아 더욱 충족해졌기에.

*

얼마 후 주원이 잠에서 깼다.

어떤 운동을 했을 때보다도 근육이 무거웠다. 팽팽해진 팔과 허벅지의 근육을 한 번 주물러본 그가 품에 안긴 혜주를 바라보았다.

초옥.

앞머리를 쓸어올려 준 그가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뺨에도 한 번, 입술에도 한 번.

곤히 잠든 혜주는 미동도 없었다.


“잘 자네.”

주원이 미소를 지으며 혜주의 몸을 꽉 안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행복한 기분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품 안에서 나는 포근한 향기와 따뜻한 체온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벅찼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강주원이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빠질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처음 알았다.

조건 없이 무언가를 좋아한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는 재밌어서 좋고, 일은 성취감이 있어 좋고, 술은 맛있어서 좋고, 운동은 시간이 잘 가서 좋고.

조건 없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건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혜주는 그가 세워둔 모든 기준과 가치관을 뛰어넘는 여자였다.

예뻐서 좋았지만 나중에 꼬부랑 할머니가 돼도 좋을 것 같았다. 착해서 좋았지만 좀 못되게 굴어도 좋을 것 같았다. 어떤 모습이라도 괜찮았다. 오혜주가 오혜주라서 좋은 것뿐이지 다른 조건은 아무 상관없었다.

언젠가 늙고 초라해진대도 그 모습까지 보고 싶다.

주원이 원하는 건 그뿐이었다.


“이렇게 예쁜 걸 처음부터 알았으면 좋았을걸.”

잠결에 찡그린 혜주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펴주며 주원이 읊조렸다.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해지니 참 많은 것이 아쉬워진다. 고등학교 때 빼빼로를 덥석 안겨줬을 때 뭔가 진척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콩밭에 가 있는 오혜주 마음을 딱 잡아다 내 앞에 가져다 놓았으면.

그럼 널 사랑해줄 시간이 십 년은 늘어났을 텐데.


‘하긴 그럴 정신은 아니었지.’

주원은 지나간 시간에 아쉬워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혜주를 알게 되었을 무렵엔 한창 혜림에게 스토킹을 당하던 시기였다.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는 무렵 잠깐 사귀었던 그녀는 주원과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름 무렵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는데 가을 무렵엔 정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 앞에 서 있었다.

그녀에게 질려버린 주원은 여자라면 넌더리가 나서 연애의 ‘연’ 자도 떠올리지 않았다. 혜주가 빼빼로를 줬을 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혜림의 스토킹으로 수능을 완전히 망쳐버린 주원이 재수를 준비하느라 학원에 다니던 중 그녀가 자살했다.

그건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사건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정신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주원은 당분간이라도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사의 권유에 곧장 유학길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예전의 일상을 찾을 수가 없을 게 자명해 도망가듯 떠난 유학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이어지지 않은 게 다행일지도. 그때 난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혜림을 떠올리니 또 마음이 무거워진다.

주원은 습관처럼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간과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시계가 맛이 갔나?”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침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벌떡 일어나 커튼을 열었다.

믿을 수 없게도 해가 중천이었다.


“진짜 두 시라고?”

어제 혜주를 껴안고 잠이 들 때가 새벽 여섯 시 무렵이었다. 완전히 녹초가 된 몸으로 잠자리에 들며 그는 한 가지만을 기도했었다.

제발 이번엔 두 시간만 푹 자게 해달라고, 악몽을 꿔도 좋으니 눈을 떴을 때 혜주에게 몹쓸 꼴만 보이지 않게 해달라고.

그런데 내가 내리 여덟 시간을 잤단 말이야?


“오빠, 왜 벌써 일어났어요? 혹시 악몽 꿨어요?”

부스스하게 일어난 혜주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주원을 향해 물었다. 먼저 일어나 있는 그를 보고 무척 걱정하는 말투였다.


“혜주야…….”

주원이 천천히 돌아섰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혜주의 얼굴과 벽시계를 연신 바라보던 그가 덥석 혜주를 끌어안았다.


“잘 잤어?”

“네, 저는 잘 잤는데 오빠는요?”

이 말을 얼마 만에 해보는 건지 모르겠다. 주원은 혜주의 목덜미에 깊게 얼굴을 묻으며 대답했다.


“잘 잤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새벽녘까지만 해도 악몽을 꿨는데, 혜주와 함께 잠자리에 든 후 악몽이 사라졌다.

푹 자고 나니 몸이 어찌나 가뿐한지, 지금 당장 혜주를 업고 한강까지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잘 잤어요? 악몽도 안 꾸고?”

“안 꿨어. 진짜로 지금까지 잤어.”

“아…… 다행이다. 너무 잘 됐어요, 오빠!”

혜주는 제 일처럼 기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해인신녀의 경고를 어기고 동침을 해 혹시나 악몽이 심해졌으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피로에 찌든 주원을 보게 되면 뭘 해줘야 하나, 자기 직전까지 그 생각을 하며 잤는데 생기 넘치는 그를 보니 기쁘다 못해 가슴이 벅찼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야!”

뺨에 뽀뽀를 해대는 혜주의 허리를 주원이 꽉 끌어안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모든 걸 던질 각오로 널 선택했는데 넌 또다시 내게 행운이 된다.

목이 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주어진 생수 한 병처럼 귀한 잠이었다. 어떤 노력으로도 풀 수 없던 문제의 실마리를 처음으로 찾아낸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악몽을 꾸지 않은 걸까요?”

“모르겠어. 일시적인 건지, 영영 사라진 건지.”

어쩌면 운 좋게 얻어걸린 건지도 모른다. 극도로 피곤한 나머지 잠을 잔 게 아니라 그냥 기절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악몽이 사라졌다고 확신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희망을 보았으니.


“달라진 건 내 옆에 네가 있었다는 것뿐이야.”

혜주가 턱을 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흐음, 그러게요.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음기가 세서 귀신까지 이겨버린 건가? 확인할 방법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녀의 중얼거림에 주원의 눈이 반짝했다.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시커먼 늑대 하나가 순식간에 들어앉았다.


“방법이 있긴 하지.”

뭐 의도한 건 아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한번 누려볼까.


“나 좀 살려주라, 오혜주.”

“살려달라니 어떻게…….”

“나랑 자 줘.”

혜주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자달란 말을 그렇게 당당하게 하기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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