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뜨겁지만 처절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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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뜨겁지만 처절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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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뜨겁지만 처절했던
2022.12.29.
[서베리아 본사]
임원진 최종 면접을 앞두고 다희는 긴장한 표정으로 대기 중이었다.
대기실엔 면접을 앞둔 지원자 세 명이 각자 준비해온 면접 자료를 보고 있었다. 다희는 손거울을 보며 화장이 흐트러진 곳이 없는지 확인하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여기서 딱 한 명만 붙는다 이거지?’
절실해 보이는 다른 지원자들과 달리 사실 다희는 그다지 절실하지 않았다. 2차 면접에 붙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마지막까지 올까 말까 고민했다.
승원 때문이었다.
승원과 혜주의 관계가 완전히 종료되었다는 걸 알게 된 후 그런 기대를 했다.
‘혹시 내게 아직 기회가 남은 게 아닐까?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좋아. 승원의 옆자리가 비어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승원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낸 사실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뜨겁지만 처절했던 그날 이후 다희는 뭔가 진전이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승원에게선 아무런 시그널이 없었다. 오히려 다희를 피하는 듯했다.
‘후…… 붙으면 이직해야지, 어쩌겠어. 내가 이 정도까지 했는데 반응이 없는 거면 아예 마음이 뜬 거라고 봐야 하잖아.’
다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설렁설렁 면접 자료를 보았다.
그녀가 준비한 자료엔 최근 진행한 회의에서 받아적은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태양식품과 관련하여 혜주가 진행한 바로 그 프로젝트였다.
다희가 이걸 준비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거 말곤 할 게 없어서.
서베리아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은 모바일리서치 사업팀 근무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예 신입을 뽑는 게 아니다 보니 예상 질문이 뻔했다.
성공적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뭐냐, 프로젝트에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대처했냐 등등 다니던 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주로 물을 것이다.
요새 가뜩이나 정신도 없는데 일도 많아서 따로 면접을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한 다희는 회의 시간에 받아적은 내용으로 승부하기로 했다.
‘이번에 혜주가 진행한 프로젝트가 잘 나가고 있잖아. 태양식품 정도의 기업과 연간 계약인 데다 마케팅 협업으로 컨설트까지 맡게 되어 회사에서도 주목하고 있고……이 정도 성과면 면접에서 써먹을 만하잖아?’
어차피 데이터스 코리아에서는 다희가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러 왔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서베리아에서도 굳이 지원자가 면접장에서 떠들어댄 내용을 외부로 유출시키진 않을 테니 혜주의 프로젝트를 잠깐 빌려와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 질문이 안 나올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찔릴 필요 없어.’
다희는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준비한 내용을 다시 한번 머리에 새겼다.
“천다희 지원자님, 들어오세요.”
“네에!”
면접 진행관이 부르는 소리에 다희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마지막으로 손거울을 한 번 본 그녀가 면접장으로 입장했다.
‘잘해보자, 천다희! 아자아자, 파이팅!’
곧이어 면접이 시작되었다.
*
며칠 후.
점심시간이 지난 후 커피 한 잔을 들고 자리로 복귀한 다희는 놀라운 메일을 받았다.
[천다희 님, 서베리아 사업팀 경력직 모집에 최종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OT 일정은 인사팀 담당자가 따로 연락을 드릴 예정이며 입사일 등 조정이 필요한 부분은 OT가 진행되는 날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또한……]
세상에, 내가 합격이라니!
다희는 입을 딱 벌린 채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별로 준비한 것도 없는데 붙었다고? 진짜 합격한 거 맞아?’
다희는 대기실에서 마주쳤던 지원자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딱 봐도 똑똑하고 프로페셔널해 보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제치고 최종 합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 혜주의 프로젝트를 빌려 쓴 것이 유효했던 걸까?’
예상했던 질문이 나왔고 준비한 답변을 했다.
혜주의 프로젝트를 자신이 진행한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도 사업팀 소속이니 속였다고 말하긴 애매했다.
‘아무튼 붙었다! 앗싸!’
다희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언제나 혜주를 따라 하느라 가랑이가 찢어질 뻔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회사를 알아본 것도, 면접 준비를 한 것도, 회사에 둘러대고 겨우겨우 면접에 참석한 것도 모두 혼자서 이룬 성취였다.
아직 얼떨떨하긴 했지만 그래도 합격 메일을 받으니 기뻤다. 짝퉁 오혜주가 아니라 그냥 천다희로 홀로서기를 해낸 기분이었다.
“다희 씨, 지난번에 A사에서 요청한 서베이 결과는 정리됐나?”
옆에서 욱 팀장이 말을 걸어왔다. 다희는 채용 합격 메일이 떡하니 떠 있는 모니터를 허둥지둥 막아서며 컴퓨터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네, 정리됐어요. 안 그래도 오후에 보내려고 했습니다.”
“고객사에서 지금 바로 보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어. 당장 보내줘.”
“지금 당장이요?”
다희는 습관적으로 마우스부터 잡았다. 그러나 방금 전원을 꺼버린 바람에 모니터가 새카맸다.
“어……죄송해요. 컴퓨터 부팅하고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업무 중에 컴퓨터가 왜 꺼져 있어?”
“아, 그게…… 점심 먹으러 나가면서 껐나 봐요.”
“별일이네. 아무튼 빨리 보내줘.”
다희는 허둥지둥 다시 전원을 켰다. 그런데 아뿔싸,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어? 이거 왜 이러지?”
당황한 다희가 전원 버튼을 연속해서 눌렀다.
‘이게 안 될 리가 없는데?’
갑자기 먹통이 된 컴퓨터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파일 안 보내고 뭐 해?”
욱 팀장은 옆에서 재촉하지, 컴퓨터는 꿈쩍을 안 하지. 진짜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다희는 울상이 되어 욱 팀장에게 고백했다.
“팀장님, 컴퓨터가 안 켜져요…….”
안경 속 쭉 찢어진 욱 팀장의 눈매에 짜증이 묻었다.
“뭐야, 컴퓨터가 왜 안 켜지는데?”
“모르겠어요…….”
“따로 백업해 둔 거 없어?”
“네…….”
“아, 진짜! 급한데 어쩔 거야!”
욱 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평소 같으면 초조하게 손톱만 물어뜯었을 다희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죠. 뭘 이런 일로 짜증을 내세요?”
“뭐?”
나 면접 붙었다 이거야. 곧 이직할 건데 욱 팀장 짜증 다 받아줄 이유 있어?
다희의 말대꾸에 욱 팀장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황당해하는 그녀의 눈에 근처를 지나는 승원이 들어왔다.
“승원 씨, 마침 잘 만났네!”
황당한 건 황당한 거고, 일단은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우리 팀 컴퓨터가 고장 났는데 좀 봐줄 수 있을까?”
컴퓨터 하면 강승원, 강승원 하면 컴퓨터.
데이터스 코리아에서 승원만큼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은 없었다. 회사에 따로 IT 팀이 있긴 했지만 수리를 맡기려면 접수만 한세월이라 자잘한 고장은 승원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고장 났는데요?”
“급하게 자료 보낼 데가 있는데 갑자기 전원이 안 켜지네.”
“그래요? 제가 한번 볼게요.”
선뜻 다가온 승원은 컴퓨터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게 다희의 컴퓨터란 걸 알았다. 승원은 조금 멈칫했으나 이내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 컴퓨터인가요?”
“응. 다희 씨 컴퓨터가 갑자기 먹통이 됐어. 우리 회사에서 컴퓨터 제일 잘 다루는 사람이 승원 씨잖아. 승원 씨 자기가 쓰는 컴퓨터도 직접 조립한 거라며.”
“아, 네.”
“한번 들여다보기나 해줘. 여자친구 챙긴다고 눈총 주지 않을 테니까.”
승원과 다희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욱 팀장이 선심 쓰듯 말했다. 승원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걷어붙였다.
“한번 볼게요.”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본체를 열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선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모습에 다희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래, 저 모습이었다.
다희가 유난히 좋아하던 승원의 모습. 평소엔 맹할 정도로 어리숙하다가도 자신의 분야에 나서면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하던 모습.
살짝 찡그린 미간과 집중할 때 버릇처럼 꽉 다물리는 입술, 걷은 소매 아래로 보이는 힘줄까지 모든 게 설렜다.
승원은 불과 1분이 지나기도 전에 탁탁 손을 털고 일어났다.
“다 됐어요. 이제 전원 켜지네요.”
“어머, 역시 승원 씨네. 우리 회사의 보물이라니까?”
욱 팀장이 언제 성을 냈냐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다희가 쭈뼛쭈뼛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바쁠 텐데 시간 내줘서.”
욱 팀장에게 그랬던 것처럼, 승원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부품이 과열되면 가끔 이래요. 우리 회사에서 쓰는 컴퓨터 기종이 과열 방지 필터가 잘 마모되는 편이라. 절전 모드 설정해놨으니까 앞으로도 괜찮을 거예요.”
“네.”
“그럼.”
승원이 고개를 까딱 숙이고 돌아섰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휘적휘적 사라지는 뒷모습에서 다희는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너무 좋았다.
대다수의 사람이 어려워하는 일을 너무도 손쉽게 해결하는 능력이, 그러고도 생색 한 번 내지 않는 성품이, 그냥 강승원의 존재 자체가.
‘헤어진 마당에 또 반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그가 잠시 머물다 간 것만으로도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 회사를 떠나면 승원과는 영영 볼일이 없겠지.’
이제는 연인도 뭣도 아니게 된 사이. 완전히 쫑 난 삼총사의 관계를 생각하면 친구로도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자리로 돌아가 업무에 집중하는 승원을 바라보며 다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포기가 안 돼. 못 하겠어, 진짜…….’
마음 정리가 하나도 안 됐는데 이렇게 회사를 떠나는 게 맞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후로 예정된 OT 날짜를 떠올리니 고심이 깊어졌다.
마지막으로 확인을 한번 해봐야 할 것 같았다.
*
귀녀의 신당은 양평의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신내림을 받은 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 겨우 자리 잡은 곳이었다.
마흔 즈음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신병, 여기저기 아프던 몸, 몸에 찾아든 신을 거부하려고 절이며 교회며 전국을 헤매던 날들.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이 고통이 대물림될 수도 있다는 큰무당의 얘기에 어쩔 수 없이 내림굿을 받았다.
하나뿐인 딸 다희에게 이 끔찍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날 귀녀는 이혼 소장을 받았다.
-내가 너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몸이 아프면 병원을 가든가, 기가 허하면 보약을 지어 먹어야지 웬 점집을 그렇게 다니냐고, 엉? 정신이 온전치 않으면 정신병원을 가! 지금 동네에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 알아? 다희 엄마 정신이 회까닥해서 애 놔두고 점집이나 기웃거린다고 다들 수군거린다고!
쪽팔려서 이 동네에선 살 수가 없다고 했다. 남편은 이혼 절차가 마무리된 즉시 다희를 데리고 동네를 떠났다.
홀로 남은 귀녀의 담벼락엔 늘 욕설이 가득했다.
귀신 들린 X, 미친X, 자식 버린 X…….
지워도 지워도 다음 날엔 입에 담지도 못할 욕들이 쓰여 있었다. 철없는 아이들이 한 짓이라고 애써 위안했지만, 귀녀의 가슴에 난 생채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가 원한 일이 아니었다. 몸이 아픈 것도, 이상한 소리를 듣는 것도, 혼령을 보는 것도.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귀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다. 내림굿을 받아 신을 제 몸 안에 가두는 것. 그리하여 그 몹쓸 운명에 다희의 인생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키는 것.
단란하던 가정이 깨지고 오롯이 혼자가 되었지만 귀녀는 묵묵히 감내했다.
‘이게 내 업보라면 짊어져야지.’
이날 아침, 귀녀는 홀로 대청에 앉아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침에 습관처럼 본 점괘에서 귀한 손님이 온다는 괘를 읽었다. 양평에 자리를 잡은 후 처음 읽어본 점괘였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괜히 설레는 마음에 한참을 싸릿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멀리서 타박타박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