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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키스하면서 (62/121)


#62. 키스하면서
2023.01.01.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손님의 얼굴이 보였을 때 귀녀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희니?”

귀한 손님이 온다는 점괘에 설레긴 했지만 설마하니 딸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귀녀는 버선발로 뛰어 내려가 다희를 맞았다.


“여기까지는 웬일이야. 차도 없이 걸어 올라온 거야? 아휴, 날도 더운데!”

“됐어. 물이나 줘.”

“아, 목마르지? 알았어.”

귀녀가 얼른 부엌으로 가 물을 한잔 떠왔다. 산을 올라오느라 힘이 들었던 다희는 진하게 우린 찻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한잔 더 줄까?”

“필요 없어.”

“으응…… 그럼 잠시 그늘에 앉아서 쉬렴. 선풍기라도 틀어줄게.”

“에어컨 없어?”

“으응, 에어컨은 없지. 많이 덥니?”

“뙤약볕에 산을 한 시간이나 탔는데, 덥지 안 더워? 돈도 많이 번다면서 집구석에 왜 에어컨이 없어?”

다희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너 올 줄 알았으면 미리 하나 장만할 걸 그랬네. 미안해.”

퉁명스러운 다희의 반응에도 귀녀는 반갑기만 했다. 냉동실에 넣어둔 손수건을 얼른 꺼내온 그녀가 다희의 뒷목에 손수건을 올려주었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좀 시원해. 잠시만 기다려줘. 먹을 것 좀 챙겨올게.”

“어휴, 물 떨어지잖아!”

“옷 젖는 거 싫으면 무릎에 올려두렴.”

성질을 내며 손수건을 팽개친 다희를 보며 귀녀는 미안해했다.

찾아온다는 귀한 손님이 딸인 줄 알았으면 진즉에 에어컨 한 대 들여놓을 걸 그랬다.


‘그래도 우리 딸 얼굴 보니까 좋네.’

귀녀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옥수수 삶을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십여 년 전 귀녀가 신내림을 받은 후 다희는 남편의 손에 자랐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의 집안에서는 무속의 길에 들어선 귀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귀녀는 한 달에 한 번만이라도 다희를 보게 해달라고 빌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모녀는 생이별 상태로 몇 년을 보내야 했다.

늦게나마 다시 만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순진한 기대였다.

다희는 무당인 엄마를 부끄러워했다. 무속인이라면 치를 떠는 부친 밑에서 자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소문을 피해 이사를 몇 번이나 다니면서 다희의 마음에도 적개심이 자랐다.

뒤늦게 만난 딸에게 뭐든 다 해주고 싶은 마음뿐인 귀녀와, 자라는 내내 결핍을 안겨준 엄마를 미워하는 다희.

끝내 만나지 못할 평행선과도 같은 관계가 그나마 유지라도 되고 있는 건 귀녀가 다희를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귀녀는 자신 때문에 평생 손가락질받으며 살아온 딸이 안쓰러웠다. 엄마 없이 사춘기를 보냈을 딸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회사로 미역국을 들고 찾아갔을 때 자신을 외면한 딸에게 감히 섭섭한 마음조차 품을 수 없는 건 그 때문이었다.


“옥수수 물 올려놨어. 익으려면 조금 기다려야 하는데 시간 괜찮아?”

“밥 먹을 시간도 아닌데 무슨 옥수수야. 됐어. 안 먹어.”

“너 어렸을 때 옥수수 좋아했잖아.”

“지금은 안 좋아해.”

유난히 까칠한 다희의 태도에 귀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먼 곳까지 안부 차 찾아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짧은 담소 정도는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슨 일로 온 거니?”

치렁치렁한 한복 치마를 펼쳐 앉으며 귀녀가 물었다. 아무래도 지금 다희에게 필요한 건 엄마 따위가 아니라 무당인 것 같았다.


“엄마의 도움이 필요해. 나 신점 한번 봐줄 수 있어?”

아니나 다를까, 다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귀녀는 침음을 흘렸다.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마주친 딸의 눈은 무척이나 간절했다.


“엄마 되게 용한 무당이라며. 나 엄청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는데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 건지 모르겠어.”

“…….”

“왜 대답이 없어? 점 안 봐줄 거야?”

귀녀가 대답이 없자 다희의 음성이 뾰족해졌다.


“왜, 자신이 없어서 그래? 남편이며 자식이며 다 버리고 갈 만큼 대단한 신이 들어섰다며? 할머니한테 들으니 엄마 복채 받은 걸로 빌딩도 올릴 수 있을 거라던데,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용하지도 않은 무당한테 그만큼 돈을 줄 리가 없잖아?”

“다희야.”

“복채 낼게. 그럼 되지?”

귀녀의 눈이 깊게 침잠했다.

그녀가 신점을 망설이는 건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복채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고.

팔 하나를 뚝 떼어줘도 아깝지 않은 딸인데 그깟 몇 푼이 문제일 리가 없었다. 귀녀가 신점 보기를 망설이는 건 천기의 흐름을 미리 읽게 되면 미래가 그대로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좋은 결과라면 모르되 만약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천기를 읽어 흐름이 더욱 굳어지면 어떤 부적으로도 돌릴 수 없었다.

보통 신당에 발을 들이는 사람 대다수는 우환을 안고 찾아온다. 남편 문제, 자식 문제, 돈 문제, 건강 문제 등등 눈앞에 산적한 수많은 문제를 어떻게든 피해 가고자 이곳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귀녀는 되도록 다희를 그냥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다물린 다희의 입술을 보니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 신점을 보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야.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맞아.”

“내가 그런 구닥다리 같은 소리나 듣자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 같아? 잔소리 말고 신점이나 봐달라고!”

“다희야.”

“안 봐줄 거면 다시는 엄마 얼굴 안 봐! 지금껏 해준 것 하나 없으면서 이거 하나 못 해줘?”

그렇게까지 나오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귀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렴.”

 

*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희는 기차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올해 결혼 운이 들어와 있다고?’

귀녀의 점괘는 거대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승원과의 미래를 점쳐 본 결과에 무려 결혼 운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승원이랑 지금 말도 안 섞는 사이인데, 어떻게 결혼을…….’

인연의 끈이 아예 사라졌다면 차라리 속 시원히 회사를 그만두고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귀녀의 점괘에 선명히 나타난 결과는 그와 정반대였다.

귀녀는 정치인이며 사모님이며 서울에서도 줄지어 찾아온다는 용한 무당이었다. 점괘를 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보고 나서야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정말 내가 승원이랑 결혼을 하는 거야? 진짜로?’

얼떨떨한 기분이 가시니 희망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래, 혜주랑 승원이는 완전히 끝난 사이잖아. 자기 형이랑 사귀는 애를 계속 좋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뜩이나 외로움도 많이 타는 애가 지금 제정신일 리가 없잖아? 매일 술만 마시고 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알지.’

빈틈은 충분했다.

얼마 전만 해도 승원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다희를 안았다. 공허함은 술을 부르고 술은 외로움을 부르고 외로움은 옛정을 찾는 법이다.

그 틈을 잘 노리면 승산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래, 우린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야.’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다희의 눈동자에 오랜만에 활기가 돌았다.

그녀는 챙겨온 노트북을 무릎에 놓고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사정이 생겨 입사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채용 거부 메일이었다.

*

퇴근 후 혜주는 집에서 옷가지와 화장품 몇 개를 챙겨 주원의 집으로 향했다.

합방한 날 주원이 악몽을 꾸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궁여지책으로 동거를 하게 되었다.


-일주일만 같이 자보자. 오혜주가 진짜 내 부적인지 확인해보고 싶어.

 
그 말을 하며 주원은 매우 미안해했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덥석 짐을 싸서 들어오란 말을 하기가 어디 쉽겠는가.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중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런 부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혜주 역시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다. 그의 집에서 함께 잠을 자고, 함께 눈을 뜬다는 건 좋아하는 마음과 별개로 곤란한 문제긴 했다.

결혼도 안 한 남녀가 한집에 산다는 것 자체가 남들 입에 오르내리기 쉬운 문제 아닌가!

주원이 평범한 직원이면 모르되 그는 무려 한 회사의 대표였다. 남들 입방아에 오르기도 좋고 알아보는 사람도 많은 유명인인 것이다.


‘에휴, 어쩌겠어. 사람 하나 살리러 가는 거지, 뭐. 이 사명감 어쩔 거야.’

이 동거에 사적인 욕심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며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혜주는 룰루랄라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도착하니 주원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소매를 걷어붙인 채 능숙하게 전을 굽고 있는 그를 혜주가 기웃댔다.


“뭐 만들고 있어요?”

“수제비랑 김치전 하고 있어. 너 좋아하는 거.”

“와, 내 술안주!”

안 그래도 날씨가 눅눅해서 딱 당기던 메뉴였다. 어떻게 저토록 기가 막히게 취향 저격을 하는지 보면 볼수록 신기한 남자다.


“비 오는 날은 수제비 먹어줘야 한다며.”

예전에 흘리듯 한 말을 기억하고 그대로 준비해준 그가 고마웠다.


‘그럼 어디?’

혹시나 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혜주가 제일 좋아하는 소주 다섯 병이 쪼르르 열 맞춰 서 있다.


‘역시 센스가 있네.’

혜주는 군침을 흘리며 젓가락을 세팅했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주원이 해준 요리는 꿀맛이었다. 유학 생활을 오래 해서 기본적인 요리는 할 줄 안다고 들었는데 이건 기본이 아니라 기절이었다.

수제비는 쫄깃하고 김치전은 바삭하고 간도 딱 맞았다. 김치전에 찍어 먹으라고 준비한 고추 간장도 어지간한 요리보다 풍미가 깊었다.


“와, 진짜 맛있어요. 이 간장은 어떻게 만든 거예요? 매콤하고 달콤하고 완전 맛있어.”

“영업기밀이야.”

“치.”

“내 집에서만 먹을 수 있는 거니까 먹고 싶으면 여기 쭉 살든지.”

“아무렴 제가 그깟 간장에 넘어갈까요.”

혜주는 도도한 태도로 간장을 리필했다.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의 음식 절반이 사라졌다. 배가 어느 정도 부른 혜주는 그제야 너무 허겁지겁 먹었나 싶어 주원의 눈치를 살폈다.


‘으, 너무 빨리 먹었나 봐. 며칠 굶은 사람처럼 보였으면 어쩌지?’

맛에 정신이 팔려 볼이 빵빵할 정도로 음식을 욱여넣은 자신과 달리 주원은 천천히 음식을 씹고 있었다.

차분하게 맛을 음미하는 모습이 뭐랄까, 귀족적이었다.

식기를 놓을 때도 거의 소리가 나지 않고 씹는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꿀렁이는 목젖조차 세련됐다.

우아한 그의 테이블 매너를 잠시 지켜본 혜주의 눈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음식 한 점 묻지 않은 붉은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은 어제의 강렬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밥을 먹고 있을 뿐인데 왜 나는 저 입술이 어제 한 짓을 떠올리고 있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어떻게 하지? 같이 잠만 자면 되는 거야? 아니면 어제와 똑같이 막……그래야 하는 건가?’

생각만으로도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은밀한 곳곳에 홧홧하게 불이 붙었다.

탁!

딴생각에 정신이 팔린 혜주의 코앞에 주원이 손가락을 튕겼다.


“오혜주 무슨 생각해?”

“그게…….”

혜주가 우물쭈물하자 주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대충 상상이 된다. 짓궂게도 주원은 그걸 혜주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되지도 않게 혼자 생각하다가 헛발질하지 말고 똑바로 물어봐.”

들을 준비 됐다는 듯 팔짱을 꼈다.

혜주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오늘 우리…… 잠만 자요?”

뱉어놓고 보니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그녀가 황급히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오빠랑 뭘 하고 싶다 그런 뜻이 아니라요. 그런 건 절대, 진짜 아니고요. 손만 잡고 자도 오빠가 편하게 잘 수 있을까 싶어서.”

“쓸데없는 걱정을 왜 하지?”

주원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손만 잡고 잘 생각 없는데.”

주원이 혜주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손‘도’ 잡을 거야.”

아직 젓가락을 쥐고 있는 혜주의 손등을 미끄러지듯 타고 올라간 손가락이 혜주의 입술을 핥듯이 어루만졌다.


“키스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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