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밥 먹다가 키스하는 건 죄가 됩니다
(63/121)
63. 밥 먹다가 키스하는 건 죄가 됩니다
(63/121)
#63. 밥 먹다가 키스하는 건 죄가 됩니다
2023.01.05.
그의 눈빛은 붉은색이 한 겹 덧입혀진 듯 야하고 꿀을 섞은 듯 끈적했다. 금방이라도 혜주를 덮칠 듯했다.
‘잘생긴 남자가 저러니 정신이 혼미하네.’
적나라한 유혹에 혜주는 당장 밥상을 물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청국장을 먹어도 향기가 폴폴 날 것 같은 입술에 폭 자신을 파묻고, 너른 가슴에 안겨 침대 위를 유영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본색을 드러낼 때가 아니지.’
본능은 이미 하늘로 승천했으나 한 가닥 남은 이성이 그녀를 제지 시켰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밝히는 이미지로 굳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혜주는 쿵쿵대는 심장을 꽉 부여잡고 근엄하게 팔짱을 꼈다.
“내가 이 집에 온 건 오빠를 지켜주기 위해서라고요. 내 숭고한 사명감을 퇴색시키지 마세요!”
물론 숭고한 사명감에 흑심이 한 트럭 정도 들어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여기서 내가 뭘 해야 한다면 그건 다 오빠를 위해서라고요. 알겠죠?”
“누가 뭐래?”
귀여워 죽겠다는 듯 주원이 눈웃음을 지었다.
쪼그만 머리로 뭘 생각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발뺌하기는.
“너의 숭고한 사명감 고맙게 생각해. 아주 바람직한 의무감이야.”
“그렇죠?”
혜주가 우쭐하여 어깨를 으쓱했다.
“습관이 되면 더 좋고.”
“갑자기 웬 습관?”
의무감을 습관화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아 혜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긴 몰라도 왠지 위험하게 들리는 것만은 틀림없다.
주원은 반찬을 한 팔로 쓱 밀어낸 후 몸을 기울였다. 혜주의 입술에 바짝 다가선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게 될 거야.”
뭘요……?
“나한텐 생존의 문제잖아?”
그러니까 뭘요!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 보려고. 오혜주 너 이용해서.”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야릇했다.
생존이라는 말이 이렇게까지 야하게 들릴 수가 있나.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게 될 거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란 걸 증명하듯 주원이 몸을 기울였다.
“다 먹었지?”
“꺄악!”
건장한 팔이 순식간에 허리를 안아 들었다.
마지막 남은 반찬을 노리고 있던 혜주는 엉겁결에 주원에게 달랑달랑 매달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초옥, 쪽.
한 손으로 허벅지를 단단히 받쳐 안고 다른 손으로 길게 늘어진 혜주의 머리카락을 그러쥔 주원이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혜주는 당황하여 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저 아직 양치도 안 했거든요?”
“내가 해줄게.”
그가 혜주를 들쳐 안은 채 성큼성큼 욕실로 향했다. 사뿐히 욕조에 내려놓은 것까진 좋았는데 뒤엉킨 입술은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쪼옥, 추웁, 춥.
가뜩이나 야한데 울려서 더 진득하게 들리는 마찰음이 욕실을 채웠다.
‘아니, 양치해 주신다는 분 어디 갔죠?’
혜주가 탭을 치듯 주원의 팔을 찰싹 때렸다. 주원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그제야 혜주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이 양반 안 되겠네. 양치시켜준다고 사기 치고 사리사욕만 채우고 못 됐어, 정말!”
“키스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밥 먹다가 키스하는 건 죄가 됩니다. 양치 끝날 때까지 기다려요.”
“참기 힘들어.”
강주원답지 않게 의기소침한 모습이 꽉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양치고 뭐고 때려치우고 확 잡아먹고 싶었지만 혜주는 간신히 청결을 사수했다.
“서로 지킬 건 지킵시다. 양치하는데 십 분이 걸려요? 이십 분이 걸려요? 썩 나가요!”
엄격한 혜주의 태도에 주원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 모습에 혜주가 방심하려는 찰나 촉촉한 입술이 꾹 닿았다 떨어졌다.
쪽!
내쫓기면서도 입술을 훔치는 당신의 스킬은 대체…….
“저기요, 강주원 씨?”
“알았어. 나간다고.”
가자미눈을 뜨는 혜주를 피해 주원이 얼른 욕실 밖으로 사라졌다. 닫힌 문 사이로 고개를 쏙 내민 그가 찡긋 윙크했다.
“얌전히 기다릴게.”
*
이튿날 오후.
주원은 뻐근한 팔을 폈다 접었다 하며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어제 얼마나 힘을 썼는지 근육이 당겼다. 어지간한 운동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강철같은 몸이 이곳저곳 쑤시는 게 신기했다.
“다른 게 운동이 아니군. 이게 진정한 운동이었어.”
괜스레 뿌듯해진 주원이 통증이 있는 곳을 꾹꾹 눌렀다.
그야말로 뜨거운 밤이었다. 양치를 하고 나오자마자 서로에게 얽혀 새벽 별이 떠오를 때까지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혜주의 머리칼, 긴 목선, 예쁜 어깨,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그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깊게 빨아들이면 이내 붉은 자국이 남던 피부…… 나름 보이는 곳은 죄다 피했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녀의 온몸이 색종이처럼 얼룩덜룩했다.
그녀가 뱉은 숨을 모조리 들이마시고, 흘러내린 땀방울에 입술을 묻고, 파동처럼 퍼지던 잔떨림을 온몸으로 느꼈다.
하나가 된 순간 이 세상에 오롯이 둘뿐인 것처럼 충만한 기분이 들어 한참이나 떨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껴안고 잠들었다가 새벽녘 눈을 떠서 서로를 보았을 때 자연스레 입술이 끌렸다. 출근 시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왜 이렇게 아쉽던지.
둘은 마치 헤어질 날이 정해진 연인처럼 간절하게 서로를 탐했다.
오혜주는 다 예쁘지만 침대에서 보는 오혜주는 그야말로 여신이었다. 그녀의 움직임 하나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는 숨이 미치게 예뻤다.
강주원이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안 된다고 예전에 선우연 여사가 그랬었다.
예전에 강남 사모님들 모임에 나가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아들은 자식으로 낳아서 연인으로 키우다가 남의 여자한테 빼앗기는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그랬다.
너희를 연인으로 키웠다기엔 징그럽지만 사랑에 빠져 바보가 된 아들은 좀 꼴 보기 싫을 것도 같다고.
-물론 주원이는 해당 사항 없어. 강승원 너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선우연 여사는 강씨네 첫째가 사랑에 빠진 모습은 절대 상상할 수가 없다고 했다.
제 배로 낳았지만 저렇게 정나미 없는 녀석은 처음 본다고, 외려 결혼을 못 할까 걱정을 하면 했지 바보가 될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그땐 그 말에 충분히 동의했지만 이제는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사람 잘못 보셨어요. 어머니 아들이 천지 분간도 못하는 똥멍청이가 되었습니다.’
강주원은 지금 허우적대고 있었다.
오혜주에게 푹 빠진 나머지 헤어나올 방법도 몰랐다.
“벌써 보고 싶네, 우리 혜주.”
불과 몇 시간 전 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지는 간밤의 일을 되새기며 주원이 중얼거렸다.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후끈 열기가 올랐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욱 팀장이 대표실을 찾아왔다. 단꿈에서 깨어난 주원이 사무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맞았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네, 대표님.”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그녀가 주원이 내어준 자리에 착석했다.
“차라도?”
“괜찮습니다.”
“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욱 팀장이 찾아온 건 일주일 후에 있을 ‘그레잇 어워드’ 시상자 명단을 제출하기 위해서였다.
상반기에 좋은 실적을 보여준 최우수 직원에게 수상하는 ‘그레잇 어워드’는 각 팀별로 한 명씩에게 수여되는 엄청난 상이었다.
본봉의 300퍼센트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포상이 주어지는 것도 엄청난 메리트지만 일단 이 상을 받으면 회사에서 인정받는 인재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주로 입사 5년 차에서 10년 차 사이의 경력직이 수상하는 경우가 제일 많았고 경쟁도 무척 치열했다.
“사업팀 수상자는 선정됐습니까?”
“네. 중간에 변동사항이 있어 늦게 제출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변동사항?”
주원이 힐끗 눈썹을 올리며 욱 팀장이 내민 서류를 보았다. 그 안엔 루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루비?”
예상치 못한 이름에 주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사업팀에서 올라온 수상자는 당연히 혜주일 거라 생각했다. 혜주와의 관계와 상관없이 오롯이 데이터스 코리아의 대표로서 생각한 결과였다.
올해 사업팀 매출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뭔가. 바로 태양식품 연간 계약 건이었다. 다른 거 다 차치하고 오직 그거 하나만으로도 상을 받기 충분한 실적이었다.
명환과 다희, 루비 등이 자잘한 단건 계약으로 실적을 받쳐 주긴 했지만 혜주 혼자 해치운 양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이루비라고?’
주원이 대꾸가 없자 욱 팀장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희 팀 수상자는 이루비 씨로 결정했습니다. 대표님께서 전결해주시면 바로 상패 제작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글쎄.”
주원이 턱을 매만졌다.
“왜 오혜주 씨가 아니라 이루비 씨죠?”
그는 이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다.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대표로서.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주원은 나중에 넙죽 엎드려 비는 한이 있더라도 일적으로는 냉철하게 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 결과는 누가 봐도 잘못됐다. 뭔가 음모가 있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올해 사업팀에서 올라온 상반기 실적을 확인해보니 오혜주 씨의 실적이 타 팀원보다 월등히 높더군요. 데이터스 코리아에서 주력 프로젝트로 선정한 태양식품 계약 역시 오혜주 씨가 성사시킨 걸로 압니다. 이루비 씨가 선정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
“그게요, 대표님. 그 태양식품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태양식품 이보석 사장의 딸이 이루비 씨라는 거 알고 계셨어요?”
혜주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욱 팀장의 입에서 그 얘기가 나오니 꽤 불쾌했다.
“그게 왜.”
착 가라앉은 주원의 심기를 알아챈 욱 팀장이 변명하듯 말을 빨리했다.
“이보석 사장이 왜 굳이 우리 데이터스 코리아에 일을 맡겼겠어요? 그게 다 이루비 씨가 딸이기 때문 아니겠어요?”
듣다 보니 더욱 불쾌해졌다.
루비가 이보석 사장의 딸이었다는 얘길 하며 혜주는 자신의 노력이 폄훼될까 불안하단 얘기를 했었다. 욱 팀장이 지금 하고 있는 그런 얘기들로 제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봐 걱정했다고.
그런 그녀의 걱정을 불식시킨 게 다름 아닌 이보석 사장이었다.
-내 맴을 돌린 건 오 대리 자네여. 그러니 이 계약은 루비 때문이 아니라 자네 때문에 이뤄진 걸세. 그걸 잊지 말어.
그 한마디에 걱정이 다 날아갔다며 좋아하던 혜주를 떠올리기 가슴 한편이 무거웠다.
그녀를 대신해 변명할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했다.
“욱 팀장님.”
주원이 욱 팀장을 향해 의자를 당겨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