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 둘이 사귀는 사이였다 이거지? (64/121)


#64. 둘이 사귀는 사이였다 이거지?
2023.01.08.


눈치 빠른 욱 팀장은 당겨 앉은 주원에게서 전투견의 냄새를 맡았다. 제대로 받아치지 않으면 단단히 깨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주원은 욱 팀장을 똑바로 바라본 채로 또박또박 따져 물었다.


“일을 맡긴 게 아니라 이쪽에서 계약을 따낸 겁니다. 오혜주 씨가 제안서를 보내지 않았다면 계약이 성사됐을 리도 없겠죠.”

“그렇다고는 해도 그쪽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회사에 일을 맡길 이유가 뭐겠어요?”

“욱 팀장은 일을 그런 식으로 합니까?”

“예?”

“우리 회사에서 제안서를 보내는 순간 그 회사는 더 이상 ‘아무 상관도 없는 회사’가 아닙니다. 잠재적 고객이자 거래처가 되는 거죠. 그쪽에서 우리의 제안을 승낙했다면 우리가 보낸 제안서가 마음에 들었다고 판단해야 타당한 게 아닐까요?”

치열한 공방전이 오갔다. 욱 팀장도 슬슬 스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업팀에서 제안서를 보내면 읽씹당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태양식품에서 그 제안서를 꼼꼼히 살펴본 것도 따지고 보면 이루비 씨가 다니는 회사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쩌면 루비 씨 실적을 올려주려는 목적일 수도 있죠. 저는 이 모든 게 이루비 씨 공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욱 팀장의 주장엔 어폐가 있습니다. 실적을 채워줄 목적이었다면 이루비 씨에게 프로젝트를 맡겼겠죠.”

“같은 사업팀이니 믿고 맡긴 걸 수도 있죠. 저는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이루비 씨의 공을 인정해준 겁니다.”

“그런 믿음을 누가 가졌는데. 이보석 사장이?”

“그거야…….”

“이봐요, 욱 팀장님.”

주원이 답답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자꾸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 계약은 태양식품에서 원한 게 아닙니다. 태양식품에서는 처음엔 우리의 제안을 거절했죠. 딸이 있는 회사라 계약을 줬다?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계약을 거절하진 않았겠죠.”

“그렇다고 해도…….”

“이보석 사장을 설득한 건 오혜주 씨입니다. 여기에 이루비 씨 지분이 어디에 있지?”

“오혜주 씨가 설득한 건지 그쪽에서 유야무야 넘어간 건지 알 수가 없죠. 딸이 다니는 회사에서 사람이 왔다니까 어물쩍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준 건지도…….”

“설득 맞습니다.”

주원이 승기를 확신하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욱 팀장은 반박할 말이 없어 입술만 벙긋거렸다.

주원은 그녀가 가져온 서류를 빙그르르 뒤집어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재고해보세요.”

전쟁의 승자는 명백했다. 조금이라도 부당한 게 있으면 싸움닭처럼 따지고 드는 욱 팀장이 찍소리 못하고 물러나는 모습만 봐도 그랬다.


“네! 그러죠!”

쾅!

욱 팀장이 문을 닫고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주원의 시선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



“팀장님, 무슨 일 있었어요?”

붉으락푸르락하며 돌아온 욱 팀장을 보고 다희가 물었다.

루비가 이보석 사장의 딸이라는 사실을 찔러준 이후 어느새 가까워진 두 사람이었다.


“아, 몰라! 실무자가 서류를 올리면 결재만 해주면 그만이지, 왜 저렇게 따지고 드는 거야? 솔직히 사업팀 일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 누구야? 대표님이겠어, 나겠어?”

“당연히 팀장님이죠! 왜요, 대표님이 뭐라고 하세요?”

진정하라는 듯 캐모마일 티를 건네며 다희가 은근히 떠보았다.

욱 팀장은 방금 대표실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희에게 들려주었다. 평소 같으면 그래도 한 번쯤 더 생각하고 말했을 텐데 화가 나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진짜 열불나네. 강 대표님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벽이야, 벽! 내 말은 아예 들을 생각도 안 한다니까?”

“수상자 선정에 불만이 있으시대요?”

“어워드 수상자 재고해보라고 하시네. 자기 말 듣고 이루비 씨로 올렸다가 된통 깨졌잖아. 태양식품 딸이 루비 씨라며? 그러니 루비 씨 공으로 하겠다는데 대체 뭐가 문제야?”

“아, 역시 그랬군요.”

다희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욱 팀장의 매서운 눈썹이 힐끗 올라갔다.


“무슨 뜻이야 그거?”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다희가 말실수를 한 사람처럼 두 손을 내저었다. 몹시 수상한 태도였다. 물론 욱 팀장은 수상쩍은 태도를 못 본 척해줄 만큼 무던한 성격이 아니었다.


“뭔데? 말해.”

“아뇨, 아무것도…….”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자기 때문에 대판 깨지고 나왔는데 나한테 뭐 숨기는 거면 진짜 서운해!”

욱 팀장이 다그치자 다희가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성격 급한 사람 말려 죽일 일 있냐며 욱 팀장이 고함을 치려는 찰나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대표님이 왜 그러셨는지 알 것 같아요. 대표님이 오혜주 씨를 각별히 생각하시거든요.”

“각별히 생각한다는 게 무슨 의미야?”

“두 사람 사귀는 걸로 알고 있어요.”

“뭐?”

욱 팀장이 입에 머금었던 캐모마일 티를 허공에 뿜었다. 다희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으나 얼굴에 파편을 뒤집어 쓰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도 욱 팀장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거 진짜야? 확실한 거야?”

다희는 얼굴에 튄 뜨뜻미지근한 액체가 몹시 불결하게 느껴졌으나 겉으론 상냥한 태도를 유지했다.


“제가 혜주 친구잖아요. 아, 그래도 이 얘긴 비밀로 해주세요. 제가 말했다는 거 알려지면 정말 큰일 나요.”

“하! 둘이 사귀는 사이였다 이거지?”

“팀장니임…….”

“알았어, 알았어. 비밀 지킨다고.”

욱 팀장이 대충 대꾸하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너무 뜬금없는 소식에 놀란 것도 잠시, 안경 속 욱 팀장의 눈알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니까 강 대표가 지 여자한테 상 주려고 나한테 그렇게 쪽을 줬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더 괘씸한데?’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니 오히려 스팀이 확 가라앉았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남들 사랑 놀음에 희생되는 건 참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이 분한 기분이 풀릴까 골몰하는 욱 팀장의 미간에 고랑이 세 개나 파였다.

힐끗.

다희는 그런 그녀를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말 잘 듣는 마리오네트를 쳐다보는 것처럼 만족스럽게.


 

*

욱 팀장이 싫어하는 게 몇 가지 있었다.

점심 메뉴 선택할 때 ‘아무거나’라고 말하는 것, 정해진 기한을 어기는 것, 저보다 나이 어린 상사가 직위로 찍어 누르는 것 등등.

욱 팀장은 뭐든 확실한 걸 좋아했고 자신의 성취에 무척이나 뿌듯해하는 스타일이었다. 남에게 기대기 싫어하고 남의 조언을 간섭이라 여겼다.

좋게 말하면 자신의 커리어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지나치게 도취되어 있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욱 팀장이 제일 싫어하는 건 쥐뿔도 없는 게 잘난 남자 만나 신분 상승한 여자였다.

다희에게 혜주와 주원이 사귄다는 얘길 딱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감상은 그거였다.


‘오대리 저거 백마 탄 왕자님 하나 물었네.’

물론 혜주가 객관적으로 쥐뿔도 없는 여자는 아니지만 주원의 스펙이 워낙 넘사벽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질투하는 거 아니냐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욱 팀장은 가슴에 손을 얹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이건 질투가 아니라 우려라고! 난 시샘 따윈 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인간이라고!


‘어떤 사람이든 내 소유물이 될 수는 없어. 잘난 남자와 사귄다고 해서 그 남자의 모든 게 내 것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지. 그럼 뭐다? 백마 탄 왕자고 나발이고 이웃 나라 공주에게 홀랑 뺏기고 나면 빈털터리 된다 이거지!’

그런 신조에 비추어 볼 때 혜주의 선택은 딱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눈이 맞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딱 봐도 강주원 콧대 장난 아닐 거 같은데 오혜주가 눈에 차겠냐고.

조만간 차이고 찔찔 울며 회사를 그만둘 게 눈에 훤했다.

오후 회의가 시작될 때까지 불편한 심기가 가라앉지 않은 욱 팀장은 마침 제일 먼저 회의실로 들어서는 혜주를 보고 탁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소식 들었지?”

혜주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식이요?”

“그레잇 어워드 수상자로 자기가 유력하다는 소식 말이야.”

“네? 정말요?”

혜주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쁨을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에 욱 팀장의 입꼬리가 사선으로 올라갔다.


‘애인에게 다 들었을 거면서 시침 떼기는.’

욱 팀장은 혜주가 다 알면서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미운데 미운 짓까지 골라 하니 빈정이 상했다.


“이미 들었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아직 거기까진 소식이 안 갔나 보지?”

“저 정말 몰랐어요. 진짜 제가 받는 거예요?”

“그렇게 좋아?”

“네! 너무너무 기뻐요. 팀에서 딱 한 명에게 주는 상이잖아요. 열심히 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혜주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한테 감사할 건 없고.”

욱 팀장의 잇새로 피식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혜주 씨가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높으신 분이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무슨 뜻이세요?”

“우리밖에 없으니 솔직히 말할게. 자기 태양식품 사장 딸이 루비 씨인 거 알고 있었잖아. 그럼 그 계약이 누구 덕분에 이뤄진 건지도 알겠네?”

“아…….”

혜주는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했다. 욱 팀장 성격이 퍽 냉소적이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평소에도 흔히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저 이유 때문이었어?’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사력을 다해 이뤄낸 성과가 단 몇 마디로 폄하되니 너무 억울했다.

이번 계약은 제 힘으로 이뤄낸 것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보석 사장이 직접 인정한!


“그 계약이 성사된 건 제가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혜주가 눈을 똑바로 뜨고 욱 팀장을 대면했다. 욱 팀장이 본인 기분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태도를 바꾸는 것도, 히스테리 부리는 것도 참을 수 있지만 열심히 노력한 결과를 부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루비 씨와 이보석 사장님의 관계를 몰랐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 때문에 계약이 성사된 건 아닙니다.”

그녀의 당돌한 태도에 욱 팀장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몰랐는데 꽤나 뻔뻔한 스타일이네, 혜주 씨.”

“아뇨. 제가 먼저 컨택했고, 제 발로 신월도에 갔고, 온 힘을 다해 사장님을 설득했어요.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저는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요. 그 계약을 따낸 건 접니다, 팀장님.”

“루비 씨가 이보석 사장 딸이 아니었어도 계약이 성사됐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어? 과연 루비 씨 생각도 그럴까?”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팀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 중엔 루비도 있었다.


“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기차 화통 삶아 먹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욱 팀장이 움찔했다.


“뭐야. 언제 왔어?”

“문밖에서 다 들었어요, 팀장님! 우리 오 대리님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내가 뭐 어쨌는데!”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 잡으셨잖아요! 팀원이 잘하면 칭찬을 해줘도 모자랄 판에 흠집이나 내고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눈에 불을 켜고 들어온 루비가 황소처럼 씩씩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