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왜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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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왜 안 돼?
2023.01.12.
심히 당황한 욱 팀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흠집? 트집을 잡아? 자기 말 다 했어?”
“사업팀에서 그레잇 어워드를 누가 받아야 하는지는 지나가는 똥개한테 물어봐도 알아요. 그런데 팀장님만 아니라고 하시잖아요! 그게 트집 아니면 뭐예요?”
“하, 듣다 보니 어이가 없네. 자기 지금 제정신이니? 내가 원래 그 상을 누구한테 주려고 했는데……!”
“저한테 주는 거 하나도 안 고맙고요. 제 힘으로 이뤄낸 것도 아닌 일을 제가 한 것처럼 해서 상 받는 거 하나도 안 좋습니다.”
“자기 태양식품 딸이잖아!”
“태양식품 딸이 뭐요? 우리 아빠가 나 때문에 계약했대요? 직접 들으셨어요?”
제아무리 욱 팀장이라도 흥분한 루비에 비하면 선비였다. 루비는 병풍처럼 서 있는 팀원들을 향해 동조를 구하듯 물었다.
“아빠가 내 성과 올려주고 싶었으면 나한테 그 계약 줬겠죠! 안 그래요?”
“그건 그렇지.”
팀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사자가 이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어진 욱 팀장이 화끈해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무안해진 그녀가 혜주를 째려보았다. 루비에게 상대가 안 되겠다 싶으니 만만한 혜주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좋겠어, 이 회사에 자기 편 많아서.”
가만히 서 있다 봉변을 당한 혜주는 울컥했다.
“저기요, 팀장님.”
한마디 하려 나서는 순간 루비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태양식품 딸인 걸 들키지 않았다면 혜주의 노력이 폄하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언니 미안해요. 대신 맞짱은 내가 뜬다!’
루비는 전투력을 풀로 끌어올리며 허리에 손을 착 얹었다.
“하나만 여쭤보죠, 팀장님. 제가 이보석 사장 딸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지금 그 말이 왜 나와? 그게 중요해?”
“당연히 중요하죠! 직원 가정사를 그렇게 까발리셔도 되는 거예요? 전 회사에서 한 번도 말하고 다닌 적 없거든요. 만약 제 개인사를 몰래 캐신 거면 문제 삼겠습니다.”
“캐, 캐긴 누가 몰래 캐? 여기 이루비 씨 가정사 모르는 사람 있어?”
한발 뒤에서 관전하고 있던 팀원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저 몰랐는데요.”
“저도요.”
욱 팀장은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보셨죠? 아무도 몰랐다네요.”
자, 이제 대답해보시죠, 팀장님.
“대체 어디서 들으셨어요?”
욱 팀장은 저도 모르게 출입구를 힐끔거렸다. 팀원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홱 돌아갔다.
“아, 저는…….”
그곳엔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다희가 있었다.
*
혜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성인군자도 아니었다.
남들보다 정이 많은 스타일이긴 했지만 나름의 쓰리 아웃제는 가지고 있었다.
제 바운더리 안의 사람은 끔찍이 챙기지만 반복해서 해를 끼치는 사람을 곁에 둘 정도로 맹하지는 않았다.
다희가 종종 자신이 가진 걸 욕심낸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먼저 산 물건을 따라 사고, 먼저 신청한 강의를 따라 신청하고, 혜주가 보고 온 영화는 반드시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애였다.
다희는 그걸 ‘동경’이라 표현했고 남들은 ‘집착’이라 말했다. 혜주는 그런 다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최근 들어 다희는 두 번의 중대한 실수를 했다.
첫 번째 실수는 혜주가 승원을 짝사랑하는 걸 진즉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 일로 친구를 잃고 짝사랑도 잃었지만 혜주는 다희를 이해하려 애썼다.
‘오죽 좋았으면 그랬을까. 승원이에 대한 다희의 감정이 나보다 컸겠지.’
그렇게 생각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다희의 두 번째 실수는 주원을 ‘아무나’ 취급하면서 사귀라고 압박한 것이었다. 친구 사이에 그 정도 말은 할 수 있지는 않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의도가 문제였다.
다희는 처음부터 혜주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승원을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 주원과 사귀어달라고 부탁까지 한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 감정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겠지.’
친구의 행복을 위해 끝까지 짝사랑을 숨기려 발버둥 쳤던 노력이 무색하게 다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혜주는 그게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오늘, 다희는 세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천다희, 나 뭐 하나만 물어보자.”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나버린 회의 이후.
혜주는 회사 근처 커피숍에서 다희와 마주하고 있었다. 딱딱한 호칭에 담긴 뉘앙스를 읽은 다희가 안절부절못하며 손톱을 딱딱거렸다.
“응…… 물어봐.”
“고의였니?”
다희에게 마지막으로 묻고 싶었다. 루비가 이보석 사장의 딸이란 걸 욱 팀장에게 말한 의도가 뭐였는지.
“루비 씨가 태양식품과 관련 있는 사람이란 걸 알리면 내 수상이 취소될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었지? 내 일을 방해하고 싶었어?”
예상대로 다희는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야, 혜주야! 내가 네 일을 왜 방해해! 나도 우연히 알게 된 거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나에게도, 루비 씨에게도 입 한 번 벙긋하지 않던 네가 굳이 그걸 욱 팀장에게 가서 귀띔한 이유, 난 그게 궁금한 거야.”
“무슨 의도가 있어 그런 건 아니야! 어쩌다가 실수로 흘린 말이었어. 진짜야.”
“저번에 사무실에 사진을 흘렸을 때도 실수라고 했었지. 사실은 고의였지만.”
상황이 이 정도까지 되니 혜주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다.
승원과 사귀기 시작한 후 부쩍 이상해졌던 다희. 묘하게 자신을 경계하는 듯한 그 시선이 뭘 뜻하는지,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왔다.
선을 몇 번이나 넘나들던 다희가 기어이 목에 비수를 들이댈 때까지 믿고 또 믿었다. 찬란한 20대를 함께 해준 친구였기에, 때로는 가족보다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지켜준 친구였기에 마지막까지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혜주는 끊어내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승원이가 헤어지자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잖아! 그 일과 지금 일은 상관없어.”
“정말 상관이 없어?”
혜주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성큼 다가섰다.
“얼마 전에 아주 웃기는 얘길 들었어. 강승원이 술에 취해 나랑 잤다고 착각하고 있더라고. 그때 강승원이랑 잔 거 너였지?”
“그건 승원이가 멋대로 착각한 거야. 나도 상처받았다고!”
“술에 깬 후에도 나였다고 단단히 믿고 있었던 걸 보면 그날은 볼 만했겠네. 그날 승원이가 침대에서 내 이름 부르디?”
“그만해!”
“얼마나 미웠을까. 그래, 이해해.”
이해는 해. 딱 거기까지.
“네가 뭘 알아. 아무것도 빼앗겨본 적 없는 네가 대체 뭘 이해한다고 잘난 척이야!”
“빼앗겨본 적이 없다고? 내 마음 뻔히 알면서 선수 친 게 누군데?”
“누가 먼저 좋아한 게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승원이랑 사귄 건 나고 너 때문에 헤어졌으니 네 탓이잖아! 그리고 너 지금 강주원이랑 사귄다며. 지금 행복하면 된 거 아니야?”
뻔뻔하게도 다희는 마지막까지 혜주의 탓을 했다. 주원과의 교제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따윈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한 꺼풀 벗겨진 다희의 민낯을 목도한 혜주는 허무함에 화도 나지 않았다.
“그것도 욱 팀장님한테 말했어?”
“그래! 왜, 그러면 안 돼? 두 사람 사귀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안 될 거 없지. 그런데 너는 그러면 안 됐어.”
눈물이 그대로 얼어버린 듯했다. 혜주는 냉기가 어린 눈동자로 다희를 바라보았다. 움찔. 다희가 어깨를 떨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차라리 화를 내!”
“내가 왜.”
무겁게 가라앉은 혜주의 눈빛은 지독히 무감정했다.
불같이 화를 내던 아까보다 다희는 지금이 더 무서웠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누가 내게 화를 낼 땐 그만한 애정이 있어서라고 했다.
그러나 혜주는 묵묵히 다희를 쏘아보기만 했다.
화낼 가치조차 없다는 듯. 넌 이미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욱 팀장이 어떤 사람인지 뻔히 아는 너야. 그걸 다 알면서 말했다는 건 나한테 엿 먹이고 싶었다는 의도밖에 안 돼. 너 나를 친구로 생각하긴 한 거야?”
혜주가 돌아서며 말했다.
“대답할 필요는 없어.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뚜벅뚜벅 걸어가는 혜주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다희는 뒤늦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했다.
‘혜주가 나를 버렸다.’
엄마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무한한 이해와 사랑을 주던 친구가 이제 나를 떠나려 한다.
덜컥 겁이 난 다희가 부리나케 혜주를 쫓아갔다.
“잠깐 기다려!”
혜주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다희를 돌아보았다.
“내가 너한테 무릎 꿇었던 날 기억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에 혜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굳이 대표님 아니라도 좋아. 아무나 좀 사귀어주라. 승원이가 온전히 나만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줘…….
이제 와 왜 그 일을 입에 올리는지 모르겠지만 혜주는 선선히 대꾸했다.
“살려달라고 했었지. 제발 좀 도와달라고.”
다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럼 그때 네가 나한테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해?”
“내 마음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아무리 너라도 안 된다고 했었지.”
“왜 안 돼?”
“……뭐?”
“넌 다 가졌잖아. 좋은 아빠도, 상냥한 새엄마도, 친구도 많았잖아! 지금은 남들 다 부러워하는 애인도 있지.”
다희가 울먹이며 두 팔을 펼쳤다.
“날 좀 봐. 아무것도 없어. 너까지 떠나면 정말 외톨이라고.”
“그게 내 잘못이라는 거야?”
“네 잘못이라고 하지 않았어! 네가 정말 날 친구로 생각한다면 이번에도 봐줄 수 있지 않냐고 묻고 있는 거야!”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고 했나. 혜주는 할 말이 없어 실소했다. 다희는 그런 혜주의 팔을 붙잡고 절박하게 매달렸다.
“한 번만 봐줘, 혜주야. 너에 대한 얘기 남들한테 떠들어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럼에도 대답이 없자 다희가 악다구니를 썼다.
“난 네가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줄 알았어! 우리 친구잖아.”
때아닌 신파극에 주위의 시선이 몰렸다. 혜주는 다희의 손을 떼어내고 문을 열었다. 이런 곳에서 실랑이를 하기도 싫었지만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법한 생떼에 지치기도 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상황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두 사람의 인연이 이미 끝나버렸단 사실이었다.
“네가 이래 봐야 변하는 건 없어.”
냉정한 한마디에 다희가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가지 마! 혜주야, 가지 마!”
팔을 뿌리치고 돌아선 혜주의 뒤통수에 대고 다희가 울부짖었다.
“진짜 나만 두고 가는 거야? 나쁜 X! 오혜주 너 진짜 나쁜 X이야.”
혜주는 기계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욕설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그 긴 세월 동안 나 혼자 친구였었네.’
허탈함에 뒤늦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