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 모지리와 목석 (67/121)


#67. 모지리와 목석
2023.01.19.



 
며칠 후 주원은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해인신녀를 찾아갔다.


“유품은 찾았나?”

안색이 밝아진 주원을 보고 해인신녀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주원은 담담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찾지 못했습니다.”

바쁜 와중에 굳이 해인신녀를 찾은 건 악몽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었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서였다. 혜주 덕분에 지난 일주일간 푹 잘 수 있었지만 원귀가 사라진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인신녀의 대답은 냉담했다.


“유품을 찾지 못했다면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 셈이야! 꼼수를 부려 잠을 좀 자게 된 모양인데 그걸로 안심하기엔 일러!”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막상 들으니 아득해졌다.

주원은 눈을 지그시 내려 깐 채 혜주와 보낸 일주일을 설명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혜주를 안으니 오히려 원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에 해인신녀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 여인이 자네에게 부적이 되어 준 것 같다고?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자네에게 붙은 원귀는 보통의 영이 아니네. 보통 원귀의 경우 굿을 하거나 부적을 쓰면 물러나기 마련이지. 기가 센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귀신을 보지 않는다는 말도 일맥상통해. 하나 자네에게 붙은 영은 원귀가 되어 찾아온 것과 달라.”

해인신녀는 눈을 감은 채 묵주를 굴렸다.


“원혜림의 혼령은 매개체를 통해 발이 묶여 있는 거야. 영의 자유의지로 자네를 찾아간 것이 아니란 말일세! 즉, 매개체가 된 유품을 찾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야! 지금 당장 상황이 나아졌다고 해봐야 임시방편일 뿐이야.”

주원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찾아온 곳에서 확인 사살을 받으니 암담하기만 했다.


‘혜림의 유품이라.’

집을 뒤집어엎어도 없는 것을 어딜 가서 찾는단 말인가.

주원은 찜찜한 기분으로 신당을 나섰다.


‘괜찮아. 나에겐 혜주가 있으니까.’

그는 애써 불안을 잠재웠다.

그러나 임시방편은 어디까지나 ‘임시’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출장이 잡혔다. 홍콩에서 각 지사의 대표들이 모여 진행하는 애뉴얼 포럼이었다. 대타를 보낼 수도 없고, 스케줄상 혜주가 같이 갈 수도 없었다.

포럼 장소는 한국에서 약 4시간이나 떨어진 홍콩.

강주원이 그의 부적과 처음으로 떨어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

삼성동 본가.

승원은 오랜만에 부모님을 찾아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얼굴 보기가 왜 이리 힘드냐? 네 형은 더해. 정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에이, 다 큰 아들들 끼고 살아 뭐 하시게요. 언제는 두 분이 오붓하게 데이트하는 게 소원이라더니 벌써 시들해지신 거예요?”

“시들하긴 누가? 네 엄마에 대한 내 사랑과 존경은 평생을 가도 식지 않아. 날로 깊어지면 깊어졌지.”

투정하는 필연에게 애교로 응수하는 승원은 명실상부 강씨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적적하던 대저택이 오랜만에 활기를 띠었다.


“그래, 주원이는 잘 지내냐? 그 녀석은 한 달이 지나도록 전화 한 통이 없어.”

“형 바쁜 거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하는 게 마음 편해요.”

“만나는 애인도 없고?”

“!”

필연의 기습 질문에 승원은 마시던 물이 목구멍에 탁 걸렸다.


‘없긴 왜 없어요. 요새 일찍 퇴근하려고 혈안이 돼서 점심도 거르는 인간인데.’

입 끝에까지 치민 말을 왠지 뱉기가 싫었다. 혜주와 주원의 사이를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치기 어린 마음이었다.


“어라? 뭔가 있는 모양인데?”

필연의 눈이 번뜩 뜨였다.


“있기는 뭐가 있어요. 저도 잘 몰라요.”

“그럼 내가 전화해봐? 어디 옆구리 한 번 쿡 찔러봐야지.”

“아! 그러지 마요. 말할 때 되면 형이 알아서 얘기하겠죠. 중간에서 스파이 노릇하기 싫어요.”

승원은 당장 휴대폰을 찾아드는 필연을 말리며 진땀을 흘렸다. 필연이 대뜸 전화해 묻는다고 주원이 당황할 인간은 아니지만 그의 입에서 혜주 얘기가 나오는 순간 자신에게 남은 티끌만 한 기회마저 박탈될 것만 같았다.


‘참 치사하다, 강승원.’

겨우 필연을 뜯어말리며 승원은 자조했다.

이미 형의 여자가 되어버린 사람을 이제 와서 어쩌겠다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징글징글하게 미련이 남았다. 뭐라도 해봤으면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그런가 보다.

혜주의 곁에 머문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넋 놓고 있었던 자신이 머저리 같아서, 꼭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필연을 뜯어말리느라 식사 시간이 다 지나버린 후 승원은 홀로 정원에 나왔다.

선우연 여사가 정성스레 가꾼 정원은 경치 좋은 카페처럼 근사했다. 한여름의 무더위를 견뎌낸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고 정원 중앙의 연못엔 팔뚝만 한 잉어가 노닐었다.

큰 아름드리나무 아래엔 하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평소 선우연 여사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어깨에 숄을 두르고 가만히 앉아 시집을 읽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승원이 맥주를 땄다.

치익-

경쾌한 소리를 내며 캔맥주가 열렸다. 승원은 차가운 맥주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더워진 머리를 식히려 노력했다.


‘생각을 하지 말자. 아무것도.’

머리를 비우려 부단히 애를 써도 어느새 스멀스멀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혜주와 처음 만났던 열일곱의 초봄, 그녀와 친구가 된 후 여기저기 싸돌아다닌 기억들.

컵이며 휴대폰 케이스며 안경 거치대며 어떻게 필요한 걸 딱딱 알고 사다 나르던 그녀의 배려와 술 마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해장국을 사주던 따뜻한 마음까지.

모든 시간이 그녀였다.

지나온 세월에 묻은 그녀의 자취에 이제 와서 이렇게 가슴이 저민다.


“뭐 한다고 여기서 청승 떨고 있니?”

하얀 머그컵을 들고 선우연 여사가 다가왔다. 승원은 얼른 맥주를 내려놓으며 의자를 빼주었다.


“잠이 안 와서 맥주 한 캔 하고 자려고요. 왜 나왔어, 엄마?”

“네 아버지 오늘 약주 많이 하셨는지 곯아떨어졌어. 코를 너무 골길래 등짝 한 대 때려주고 나온 길이야.”

“아빠 내일 강의 있는 날 아닌가?”

“술 냄새 풀풀 풍기며 강의하겠지. 내 알 바 뭐람.”

말은 그렇게 해도 내일 아침이면 뜨끈한 북엇국이 식탁에 올라올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승원은 나이가 먹어도 다정한 두 사람이 부러워졌다.


“좀 앉을까?”

“그러세요.”

승원이 내어준 자리에 선우연 여사가 앉았다.

나란한 두 사람의 뒷모습은 연인처럼 다정했다. 별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자아내는 분위기만으로 따뜻함이 감돌았다.

불어온 바람에 사르르 흔들리는 나뭇잎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승원이 말문을 열었다.


“엄마, 만약에 나랑 형이랑 같은 여자를 좋아하면 어떨 거 같아?”

힐끗, 선우연의 눈썹이 올라갔다.


“누구니? 그 억세게 운 나쁜 여자가.”

“왜! 우리가 뭐 어때서!”

“한 놈은 나무젓가락도 못 뜯는 모지리에 한 놈은 제 아빠 생일에 전화 한 통 안 하는 냉혈한에. 어휴, 생각만 해도 불쌍하다, 얘.”

그렇게 말하며 선우연은 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툭 던져본 말치고는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라 속으로 놀랐으나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어떤 여자니?”

“아냐.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상상해본 거야. 형이랑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니 무슨.”

얼버무리는 승원을 선우연이 빤히 바라보았다.

추궁하는 시선은 아니었다. 다만 상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승원이 굳이 말을 꺼냈다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기 때문이리라. 아들이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엄마였다.


‘괜찮아. 내겐 얘기해도 돼.’

시선을 돌린 채 느긋이 기다리는 선우연을 보며 승원은 몇 번이나 입술을 벙긋거렸다. 속이 답답해 미칠 지경인데 차마 털어놓긴 창피한 내용이라 선뜻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선우연이 만들어낸 적막은 기어이 승원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따뜻해.”

“그러니?”

“그리고 예뻐.”

선우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털어놓은 힘겨운 진심에 그녀의 가슴도 무거워졌다.


“따뜻한 사람에게 끌리는 건 당연한 이치지. 죽상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주원이가 이긴 모양이네?”

“엄마 혹시 우리 말고 자식 더 있어? 자식이라고 딱 둘밖에 없는데 그 둘이 한 여자를 좋아한다는데 왜 그리 태연해?”

“니들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잖니.”

 

 
와, 우리 엄마 진짜 대단하다.

설령 두 아들놈이 서로를 좋아한다고 해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할 사람인 걸 알고 있지만, 정말이지 저 여유는 따라갈 수가 없다.


“그리고 그런 상황 나도 겪어봤어.”

“……진짜로?”

“네 아빠가 책방에 왔다가 나한테 홀딱 반한 거 알고 있지?”

“응. 워낙 유명한 러브스토리잖아.”

“상견례 자리에서 네 막내 삼촌을 보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내가 가르쳤던 학생이었지 뭐니. 내가 첫사랑이라나 뭐라나.”

온몸에 쫙 돋은 닭살에 승원이 몸부림쳤다.

해외로 이민 간 막내 삼촌과 아빠 사이에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다니,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막내 삼촌이랑 엄마 나이 차이가 몇인데 첫사랑이래. 심각했어?”

“제법 그랬지. 결혼해서 사는 모습 옆에서 못 보겠다며 이민까지 갔으니까.”

“헉, 막내 삼촌 이민 간 게 엄마 때문이었다는 거야?”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지. 거기서 단짝 만나서 잘살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는지 선우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난생처음 들어본 ‘막내 삼촌 이민 사건’의 진실은 꽤 충격적이었지만 당사자가 하도 태연하게 말하니 승원도 제법 의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좀 웃기긴 했다. 같은 여자에게 끌리는 게 집안 내력인가 싶었다.


“엄마는 왜 아빠를 선택했는데?”

선우연이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한결같아서.”

“……그랬어?”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사람 헷갈리게 하지 않더라.”

승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혜주를 헷갈리게 했을까.

친구로서 베푼 호의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던 언행들. 가끔 혜주는 헷갈렸을 거고 기대는 점점 커졌을 거다. 그러니 고백할 생각도 했던 거겠지.

아니, 차라리 그건 괜찮다. 다희와 사귄 후 평소 하지 않는 짓을 골라가며 해대며 혜주를 혼란하게 했다. 어디 가서 나쁜 놈 소리는 안 듣고 살았는데 혜주에겐 새삼 나쁜 놈이란 게 실감이 난다.

미안했다.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남자라서.

만회할 기회를 얻고 싶은 이 마음조차도 욕심이라 더 미안했다.


“그리고 잘생기기도 했고.”

어둑해진 승원을 눈치챈 선우연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승원은 낙담한 기운을 금세 지우고 대꾸했다.


“얼굴은 나도 안 빠지거든.”

“내 자식이지만 그건 인정해. 상대가 강주원이 아니었으면 승산이 있었을 거야.”

“아, 엄마! 나 그냥 들어갈래.”

승원이 다 비운 맥주캔을 들고 일어났다. 휘적휘적 정원을 가로지르는 승원의 귀에 잔잔한 음성이 스몄다.


“흘러가게 둬. 인연이라면 모로 가도 만날 거고 인연이 아니면 죽어라 노력해도 안 돼.”

승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우연은 유독 무거워 보이는 아들의 어깨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승원의 말을 듣는 내내 가슴이 버거웠다.

어찌 닮아도 그런 걸 닮았는지, 여자 보는 눈이 꼭 닮아버린 두 아들이 안타까웠다.

힘든 길이라면 걷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굳이 갈 수밖에 없다면 돌아오는 길을 잊지 않기를.


“그나저나 대체 어떤 여자길래 모지리랑 목석이 저 난리들이야?”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 일어선 선우연이 중얼거렸다.

두 아들을 홀린 여자가 누군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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