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마음이 바뀔 거란 얘기도 안 했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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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마음이 바뀔 거란 얘기도 안 했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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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마음이 바뀔 거란 얘기도 안 했지, 내가
2023.01.22.
주원이 홍콩 출장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주원은 해외 출장을 많이 다니는 편이라 짐을 간소하게 꾸리는데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가장 큰 캐리어를 동원해 짐을 가득 채웠다.
며칠 전부터 주원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오혜주를 끼고 자면 부적의 효험이 있다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한 이후 그녀와 처음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당장 달려올 수도 없는 이역만리에서 다시 악몽이 시작된다면 뭐라도 대처할 방안이 필요했다.
“동전 잘 챙겼어요? 다른 거랑 헷갈린 건 아니죠?”
“잘 챙겼어. 집에 있는 동전이라곤 네가 준 것밖에 없어서.”
그중에서도 주원이 가장 중요하게 챙긴 건 혜주가 선물한 동전이었다. 동전처럼 앞뒤 확실한 사람이 오혜주라며 주원에게 단단히 확신을 준 날 받은 것이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백 원짜리 동전이지만 주원에겐 세상 단 하나뿐인 보물이라 평소에도 사무실 서랍에 넣어놓고 자주 들여다보는 편이었는데 이번엔 아예 지갑 속에 쏙 넣었다. 혹시나 빠질까 봐 테이프로 단단히 고정도 했다.
“그런데 과연 이 동전이 효과가 있을까요? 차라리 십자가나 묵주 같은 거 넣어가는 게 어때요?”
“그런 것도 이미 다 챙겼어.”
어디 그것뿐인가. 127만 원짜리 파란색 니트와 신경안정제, 혜주의 증명사진도 챙겼다. 빵빵한 캐리어를 점검하는 주원의 시선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비장했다.
“차라리 잘 됐어. 이참에 확인해보지, 뭐.”
정말로 오혜주가 부적인 건지, 아님 그 빌어먹을 원귀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건지.
악몽이 이대로 사라진 거라면 더없이 좋을 거다. 그러나 혜주의 곁을 떠나자마자 다시 나타난다 해도 예전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오혜주를 확 낚아채 올 핑곗거리가 생기는 거지.’
거기서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제 삼십 분 후면 출발해야 해요. 마지막으로 빠진 거 없나 다시 확인해봐요.”
걱정스러운 혜주는 새벽부터 몇 번이나 가방을 확인했다. 마음 같아서는 홍콩까지 따라가고 싶었지만 줄줄이 잡혀 있는 거래처 미팅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대표를 따라 홍콩까지 갈 명분도 없었고.
일주일 남짓 주원이 편하게 자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놓았는데 당장 달려갈 수도 없는 곳으로 떠난다니 걱정이 되는 게 당연했다.
“방금 생각이 났는데.”
주원이 조금 전 닫은 캐리어를 다시 열어 짐을 확인하는 혜주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뒤에서 안아오는 손길에 혜주의 배에 힘이 훅 들어갔다. 주원은 옷 안으로 손을 넣어 그녀의 보드라운 허리를 만지작거렸다.
“네 옷을 한 벌 가져갈까 싶어.”
“옷을 왜요?”
“오혜주 냄새 묻어 있으면 귀신이 얼씬도 못 할 거 같아서.”
생각해 보니 그럴싸한 말이었다. 혜주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에요. 방에 가서 옷 하나 챙겨올게요. 부피가 크면 좀 그렇고…… 세탁된 옷보다는 기왕이면 어제 입은 잠옷이 좋겠죠?”
“너 어제 아무것도 안 입고 잤잖아.”
“그래도 씻고 나와서 잠시 입고 있긴 했잖아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깨어난 아침의 풍경을 떠올린 혜주의 귓불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니 이 집에 온 후로 옷을 입고 있었던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깔 맞춤한 속옷이며 귀여운 란제리며 참 많이도 준비했는데 막상 주원에게 보일 일이 없었다. 샤워를 끝내자마자 낚아채듯 침대로 데려가는 주원 때문이었다.
“아무튼 가장 최근에 입은 옷은 그 잠옷이에요. 방에 두었으니 지금 가지고 나올게요.”
“아니.”
주원이 나른하게 웃으며 혜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어깨를 움츠린 순간 목 뒤의 블라우스 단추가 툭 풀렸다.
“네 옷은 내가 직접 챙길게.”
“!”
“가장 최근에 입은 옷으로.”
목 뒤에 쪼르르 달린 단추 세 개가 시간차를 두지 않고 열렸다. 마치 이 순간만을 노린 사람처럼 지체 없는 손길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등을 더듬어 내려오는 감촉은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그가 챙겨간다는 옷이 설마하니 지금 입고 있는 옷일 줄은 몰랐던 터라 혜주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지금 비행기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놀란 혜주가 입을 벌리자 그 안으로 불쑥, 매끄러운 살덩이가 침범했다. 노련하게 혜주의 것과 뒤섞인 그의 숨이 가파르게 혜주의 입안에 차올랐다.
“이보세요. 좀 진정하시고요. 출발할 시간 삼십 분도 안 남았다고요.”
순식간에 상체가 허전해졌다. 혜주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가는 손길은 서울역 소매치기보다 더 재빠르고 노련했다. 등에 닿은 날것 그대로의 공기에 혜주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주원은 붉어진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나른하게 웃었다.
“옷 벗는데 십 분이 걸려, 이십 분이 걸려? 대체 뭘 상상하는 거야.”
“옷만 벗길 거 아니잖아요!”
“내가 옷만 가져간다고 했지 다른 짓 한다고는 안 했잖아.”
어디 그 약속 지키나 두고 봅시다.
체념한 혜주가 두 팔을 벌리고 가만히 섰다. 주원의 입가가 유려하게 호선을 그렸다.
“역시 우리 혜주 착하네.”
위에서부터 아래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거한 옷이 툭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위가 조용하니 더욱 크게 울리는 소리에 혜주의 얼굴로 열이 몰렸다.
‘아…….’
동이 터올 무렵이라 이미 사위가 밝은 가운데 옷을 벗고 있자니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온전히 나신이 된 혜주가 침대에 흐트러진 이불로 대충 몸을 가리며 돌아섰다.
“이제 됐죠? 캐리어에 옷 챙겨요.”
“그런데 혜주야.”
바로 그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정수리를 폭 덮었다. 기다란 팔이 가슴 위를 한 바퀴 두르나 싶더니 이불째로 번쩍 들렸다.
“꺅!”
그대로 침대로 던져진 혜주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뭐예요? 옷만 가져간다면서요!”
맹수의 앞발이 거친 황야를 디디듯 주원의 손바닥이 바로 얼굴 옆을 짚었다. 느긋하게 몸 위로 올라온 주원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마음이 바뀔 거란 얘기도 안 했지 내가.”
“이 사기꾼……!”
“속아줘서 고마워.”
미소 띤 입술이 붉은 공간을 벌리고 들어왔다. 대충 두른 이불은 너무나 허술해서 그의 손길 한 번에 구석으로 밀려났다.
‘비행기 시간 가까워질 때까지 왜 옷을 안 입나 했더니 꿍꿍이속이 있었네. 강주원 이 변태!’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혜주의 뇌리가 점차 하얘졌다. 손목시계를 흘깃 본 후 남은 시간을 계산한 주원의 손길이 대담해진 까닭이다.
“시간이 없어 차분하게는 못할 거 같아.”
옷을 벗긴 순서와 반대로 그의 입술이 지나갔다. 스쳐 간 곳마다 상흔과 같은 붉은 흔적이 남았다. 평소보다 거칠게 몰아붙이는 그의 힘에 혜주의 가슴이 가파르게 오르내렸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한……!”
혜주가 힘겹게 내뱉은 투정은 곧장 주원에게 먹혀들었다. 땀에 젖은 혜주의 이마에 키스를 하며 주원이 속삭였다.
“다녀와선 더 잘해줄게.”
이내 간간이 내뱉던 투정마저 사라졌다.
침대 위를 가득 채운 건 창밖에서 들어온 아침 햇살과 젖은 숨소리뿐이었다.
*
출근해 한참 업무를 보고 있자니 주원에게서 출발한단 메시지가 도착했다.
곧 이륙이라 몇 시간 동안 연락 못 할 것 같다는 말에 덜컥 걱정이 되었지만 혜주는 내색하지 않고 도착하면 바로 연락해달라는 말만 남겼다.
‘별 탈 없이 잘 다녀와야 할 텐데.’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이렇게 누군가를 걱정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 먼 곳에서 악몽이 되살아나기라도 하면 두려운 건 둘째치고 그 절망감을 어찌해야 할지.
‘강한 사람이니 잘 버텨내겠지.’
혜주는 불안을 애써 잠재우며 하루를 보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수철이 와 있었다. 미옥 아주머니가 담근 양념게장을 가져다주겠다고 오후에 연락이 왔기에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오오, 아빠 밥도 해놨어? 집에서 밥 냄새 나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고소한 냄새에 혜주가 반색했다. 대궐 같은 집에서 며칠 살다 와서 그런지 유난히 좁아 보이는 집이었지만 그래도 내 집이라 편하기는 했다.
“너 이리 좀 앉아 봐.”
평소 같으면 부둥부둥하며 우리 딸 손 씻고 와서 좀 누워 있으라고 말했을 수철의 안색이 굳어있다. 왠지 싸늘한 수철의 분위기에 혜주는 괜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혹시 집을 오랫동안 비운 사실을 들킨 건가? 멀쩡한 집 놔두고 애인 집에서 동거하다시피 살았다고 하면…….’
물론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수철에게 툭 까놓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첫 만남에 미운털 박힌 주원인데 귀신까지 들렸다고 하면 누가 곱게 보겠는가!
꽤 보수적인 수철은 애지중지 키운 딸이 결혼도 하기 전에 남자 집을 들락날락거리는 걸 이해하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상대가 시원찮으면 더더욱!
“왜……?”
혜주는 쭈뼛쭈뼛 수철의 맞은편에 앉았다. 앉은뱅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부녀의 분위기가 사뭇 엄중했다.
부스럭부스럭.
수철이 탁자 아래 숨겨두었던 물건을 꺼냈을 때 혜주는 기함했다.
“이게 웬 남자 팬티냐? 베란다 청소하다가 발견하고 네 아빠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놈 자식 물건이야?”
헉. 수철이 내놓은 건 까만 비닐봉지에 곱게 싸인 주원의 팬티였다.
귀국 후 첫 만남 때 그의 집에서 엉겁결에 들고나왔다가 확 태워버려야지 했었는데 마땅한 드럼통을 찾지 못해 차일피일 미루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그거! 버리려고 한 건데 깜빡했어. 이리 줘.”
“그러니까 남자 팬티가 왜 집구석에 있냐고! 설마 자취방에 그놈 자식이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아냐! 전에 살던 사람이 깜빡하고 놔두고 간 건데 치우는 걸 잊었어. 당장 버리면 되잖아.”
“여기 여성 전용 원룸 아니냐?”
“어. 아닌데?”
“너 그때 집 구할 때 여성 전용 원룸이라고…….”
“아빠 편하게 드나들라고 여기로 구한 거야!”
거짓말을 하려니 절로 목소리가 커졌다. 수철이 뭐라 더 잔소리를 하기 전에 혜주가 얼른 비닐봉지를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됐지?”
탁탁 손을 털고 돌아서려는데 불현듯 삐죽 튀어나온 밴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실오라기가 풀린 듯 검은 실 한 가닥이 나풀거리는 모습이 영 거슬려 혜주가 눈매를 좁히고 들여다보았다.
‘뭐지?’
저번에 봤을 때는 새것처럼 단정했던 팬티였다. 베란다에 몇 달 방치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실밥이 풀린다고?
뭔가 이상했다.
“아빠, 이거 혹시 무슨 글자야?”
“글자?”
밴드 봉합선에 까슬까슬하게 새겨진 글자를 가리키는 혜주의 손짓에 수철이 다가왔다.
주원의 드로즈는 허리 부분이 밴딩 처리된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밴드 위에 제품 로고가 적힌 것 외에 다른 무늬는 없었다.
밴드 봉합선 부위에 새겨진 까슬까슬한 글자는 새끼손톱보다 작은 크기인 데다 검은색이라 눈에 거의 띄지 않았다. 처음엔 선물한 사람의 시그니처라도 되나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조금 이상했다.
선물한 걸 티 내려면 좀 큼지막하게 쓰던가 눈에 띄는 색상으로 했을 텐데 봉합선에 딱 걸쳐진 그 글자는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거기에 글자가 있는 걸 숨기려는 것처럼.
“어디 보자.”
수철이 겉옷에서 돋보기안경을 꺼내왔다.
밴드의 봉합선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던 그가 혜주의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어이구, 무식아! 어렸을 때 구먼 한자를 몇 년을 했는데 이런 것도 모르냐. 헛돈 썼네, 헛돈 썼어!”
“이거 한자야?”
“살면서 청첩장 한 번 안 받아봤냐? 혼(婚)이잖아! 결혼할 혼!”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결혼할……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