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 검은 실 (69/121)


#69. 검은 실
202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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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주는 얼른 휴대폰으로 한자를 검색해보았다.

획수가 많은 한자라 언뜻 봤을 때 그냥 뭉뚱그려진 문양 같아 보였는데 수철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婚’자와 비슷해 보였다.

검은 실로 수를 놓은 글자.

다른 글자도 아니고 ‘결혼할 혼’ 자라고 하니 뭔가 촉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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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설마 원혜림과 관련된 사람이 벌인 일 아니야?’

해인신녀는 혜림의 유품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거라고 했다. 주원은 끝내 그걸 찾지 못했다고 했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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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속옷이 그녀가 남긴 유품일 리는 없을 테고…… 이 글자에 의미가 있다는 소린데.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제일 가망성이 높은 건 주원이 해인신녀를 찾아간 것처럼 무속인이 개입했을 확률이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주원의 속옷에 남겼느냐 하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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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팬티 쪼가리에 뭐 문제라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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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아무것도.”

혜주는 얼버무리며 쓰레기통을 닫았다.

수철은 몹시 수상쩍은 눈길로 혜주를 훑어보았으나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지니 더 입을 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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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번 한 번은 모른 척 넘어가 주지만 다음번엔 얄짤없어! 집에 함부로 누구 들이고 그러는 거 아니다.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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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알았어. 다 큰 딸내미 구속해봤자 노처녀밖에 더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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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한 놈한테 코 꿰이는 것보다는 노처녀로 늙어 죽는 게 차라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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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 오빠 그렇게 엄한 놈은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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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아빠 제치고 애인 편드냐? 하이고, 서럽다, 서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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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미옥 아주머니 있잖아! 됐고 아주머니가 해준 게장이나 먹어보자. 나 진짜 먹고 싶었어.”

티격태격하면서도 수철은 부지런히 상을 차렸다.

떡하니 한 상 차려진 식탁 앞에서 혜주는 태연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닫힌 쓰레기통으로 자꾸만 향하는 시선을 붙잡아두려 부단히 노력하며.

*

수철이 돌아가자마자 혜주는 비닐봉지부터 수거했다. 다행히 수철이 쓰레기통을 비워준다 어쩐다 수선을 떨지 않아서 팬티를 사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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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거 때문에 악몽이 시작된 걸까? 고작 이 글자 하나로?’

선뜻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다희에게서 무속인에 대해 들은 얘기가 없었다면, 그리고 주원에게서 해인신녀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아마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하지만 주원의 악몽이 상식적이지 않듯, 그 원인 또한 상식적이지 않은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무속인 개입설’이 영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었다.

혜주는 비닐봉지를 앞에 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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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대부분의 옷을 본가에서 가져다 입는다고 했어. 속옷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이건 오빠의 손에 들어가기 전부터 새겨진 글자인 걸까?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거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주원의 어머니였다. 아무래도 주원의 옷가지를 직접 보내는 사람이니 가장 손쉽게 속옷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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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승원에게 들어보니 별문제 없이 화목한 가족 같았어. 이런 짓을 할 만한 동기가 전혀 없단 말이지.’

누군가에게 속아서 이런 일을 벌인 거라면 그나마 납득이 간다. 하지만 혜주의 본능적인 직감은 그보다 다른 가능성에 무게를 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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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누군가가 있어. 오빠의 물건에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행여 누군가에게 들킨다 해도 의심받지 않을 만한 위치에 있는…….’

혜주의 뇌리에 퍼뜩 가사도우미가 떠올랐다.

예전에 승원에게 얼핏 듣기로 그의 본가에서는 세 명의 가사도우미를 두고 있다고 했다.

정원관리인과 기사, 필연의 조수를 포함하면 본가에 상주하는 사람은 그보다 많을 테지만 속옷에 대한 접근성만 따져보면 가사도우미가 가장 유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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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확인해봐야겠어.’

혜주는 벌떡 일어나 주원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밤이 깊은 시각이었지만 한시가 급했다.

자신이 세운 가정이 터무니없게 느껴졌지만,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원한이 그토록 오래 주원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면 당장 주원에게 알려야 했다.

주원의 집에 며칠간 살았기에 비밀번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혜주는 익숙하게 도어록을 열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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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속옷을 어디에 뒀더라?”

벗는 모습만 봤지 얌전하게 개켜져 있는 모습은 보지 못해서 허둥지둥 헤매던 혜주는 네 개의 방문을 죄다 열어보고 나서야 속옷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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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다!”

눈에 보이는 몇 개를 꺼내 밴드부터 확인해본 혜주는 살갗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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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있잖아?”

꺼낸 속옷엔 하나도 빠짐없이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검은 실로 수를 놓은 ‘婚’이라는 한자가.

이제 보니 속옷의 색깔은 각양각색이었으나 밴드 부분만은 교묘하게 모두 까만색이었다. 게다가 쉽게 눈에 띄지 않게 봉합 부분에 새겨진 터라 혜주 역시 처음엔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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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굴려보자, 머리를.”

혜주는 착잡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얼토당토않게 팬티에서 실마리를 찾게 되니 황당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대체 얼마나 원한이 깊으면 이런 짓까지 하며 해코지를 하려 한 거지?’

주원이 악몽을 꾸게 된 건 혜림이 죽고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부터라고 했다. 십 년이란 세월 동안 그런 음험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 주원의 곁에 머물렀다는 게 소름이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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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빠 집에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오빠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고 했어. 정말 속옷이 문제였던 거라면 다 설명이 돼.’

혜주가 아침에 깨어났을 때 주원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일 때가 많았다. 아니, 하루도 빠짐없이 그랬다.

언젠가 한 번은 원시인이냐고 놀렸더니 주원은 원시인도 그 부분은 가린다며, 보기 좋은 물건은 잔말 말고 즐기라고 응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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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나랑 잘 때는 한 번도 속옷을 입고 자지 않았어.’

딱 맞아떨어지는 전개에 혜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귓불이 화끈할 정도로 민망하긴 했지만 지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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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다. 확실하든 아니든 일단 오빠에게 말해줘야겠어.”

혜주는 곧바로 주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임에도 그는 연락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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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받아라, 좀…….”

두 번, 세 번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여러 번 걸린 전화에 행여 놀랄까 봐 따로 메시지를 남긴 혜주는 우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거의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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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 왜 연락이 안 되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본 혜주는 통화연결이 되지 않자 덜컥 불안해졌다.

혹시 오빠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

혜주가 주원에게 열심히 전화를 걸던 그 시각, 주원은 홍콩의 한 병원에서 수액을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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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호흡으로 인한 일시적인 실신 증상입니다. 아무래도 환자가 과한 불안이나 흥분 상태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의사의 목소리가 꼭 외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몸이 엿가락처럼 쭉쭉 늘어지는 기분에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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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상태를 좀 지켜보시죠. 보호자와 연락은 닿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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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법인에 있는 담당자가 보호자로 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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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군요.

 
잠시 후 현지 법인 담당자라는 사람이 왔다. 주원이 본사에서 일할 때 알고 지내던 인사팀 직원이었다.

목소리를 듣고 에드워드라는 이름을 떠올렸으나 도저히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주원은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뇌리엔 아까 비행기에서 일어났던 일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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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그래, 방심했을 수도 있다. 혜주와 붙어 있는 동안 한 번도 꾼 적이 없어서 악몽이 아예 사라졌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끔찍한 걸 볼 거라 예상한 건 아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노트북을 켜놓고 업무를 보고 있던 주원은 깜빡 잠이 들었다. 집 외의 장소에서 잠드는 일이 드문 주원이지만 새벽부터 힘을 빼서 그런지 조금 고단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누군가 옷깃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번쩍 눈을 뜬 주원은 캄캄한 실내에 당황했다. 장거리 비행에 실내등을 소등하는 경우야 많았지만 이렇게 어두운 것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절대로.

차가운 공기가 익숙했다. 끈끈한 점액질에 갇힌 듯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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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거구나.’

주원은 차분하게 손가락부터 움직였다. 가위에 눌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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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날 수 있어. 당황하지 말자.’

눈을 감고 싶었지만 그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핏발 선 눈으로 앞 좌석을 노려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손끝 하나 움직여지지 않는데 이마엔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질식할 것 같은 공포 속에서 주원은 혜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얀 뺨과 동그란 이마, 살짝 옅은 색깔의 눈동자. 닿으면 녹아버릴 것처럼 달콤한 입술.

움찔.

손가락 끝이 움직여졌다. 주원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다른 손가락도 움직이기 위해 용을 썼다. 바로 그때였다.

스르륵.

응축된 공기가 바로 옆에서 움직였다. 뱀처럼 차가운 감촉의 입술이 귓불에 닿는 순간 주원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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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있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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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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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같이 가자, 주원아…….’

입 밖으로 터지지 않은 비명은 주원의 안에서 팽창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프고 고막은 이명으로 가득 찼다.

끔찍한 공포가 발밑부터 차올랐다. 검은 액체가 기내 바닥에 번졌다. 타이어가 녹은 것처럼 끈적하고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액체였다.

그것은 점점 차오르다 주원의 발목을 덮었다. 검은 액체에 뒤덮이면 살아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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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주원은 필사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주머니를 더듬었다. 다행히 혜주가 챙겨준 동전이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단지 손에 쥐었을 뿐인데 캄캄한 시야가 조금은 밝아지는 듯했다.

그래, 난 살아야만 한다. 여기서 벗어나 혜주를 만나야 해.

주원은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몸속에서 드글드글 끓던 아우성이 입 밖으로 표출되는 순간, 앞 좌석, 그 앞 좌석, 또 그 앞 좌석에 앉은 승객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스윽.

새하얀 얼굴, 실핏줄이 가득한 눈동자, 하얗게 말라 버석거리는 입술…….

수십 명의 원혜림이 동시에 입술을 벌려 고함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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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원한 가득한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주원은 정신을 잃었다.

백 원짜리 동전을 손에 꽉 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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