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 당장 팬티부터 벗어요! (70/121)


#70. 당장 팬티부터 벗어요!
2023.01.29.



 
주원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휴대폰은 불이 나 있었다. 홍콩에서 온 연락과 한국에서 온 연락이 수십 통이나 쌓여 하나하나 보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주원은 제일 먼저 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괜찮아요?

통화연결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혜주는 주원이 뭐라 말을 꺼낼 시간도 주지 않았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혜주야, 사실은…….”

-우선 당장 팬티부터 벗어요!

갑자기 뭘 벗어?

맞게 들었나 의심이 돼서 주원은 손가락으로 귀를 한 번 후볐다. 아무 이상이 없는 걸 보니 제대로 들은 건 맞는 것 같은데.

손목시계를 흘깃 보니 한국 시간으로는 자정이 가까워진 무렵이었다.


‘아무래도 자다 깨서 비몽사몽인가 보군.’

잠꼬대를 꽤나 야하게 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주원이 건조하게 웃었다.


“너도 없는데 뭐하러.”

정신 들면 민망할까 봐 일부러 가볍게 받아주었다. 그러나 혜주의 음성은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 진지했다.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라고요. 놀라지 말고 들어요. 사실 그 팬티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문제?”

-지금 입고 있죠? 밴드 봉합 부위 쪽 바로 확인해봐요. 거기 만져보면 까슬까슬한 게 있을 거예요.

주원은 무의식중에 환자복을 까뒤집어 보았다.

입고 있던 드로즈는 평상시와 다를 게 없었다. 붉은 줄이 들어간 까만색 밴드는 특별할 거 하나 없이 평범했고 딱히 거슬릴 만한 부분은 없었다.

손가락 끝으로 대충 만져본 주원이 아무 이상 없다고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음?’

혜주가 말한 봉합 부위에서 까슬까슬한 감촉을 느낀 주원이 미간을 좁혔다.


“이게 뭐지?”

-있죠? 그게 뭔지 알겠어요?

수화기 너머 혜주의 목소리가 잔뜩 격앙되어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주원이 병실 구석에 놓인 캐리어에서 속옷 몇 장을 꺼냈다.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글자가 봉합선마다 새겨져 있었다. 매일같이 챙겨 입으면서도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던 문양이었다.


“처음 보는 거야. 이게 뭔데?”

-어떻게 된 건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지금껏 그런 게 있는 줄 몰랐던 거죠?

“몰랐어.”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속옷을 챙겨 보내는 건 늘 선우연 여사의 몫이었다. 세탁은 일주일에 두 번씩 집을 방문하는 가사도우미의 몫이었고 주원은 그저 차곡차곡 개여 옷장에 정리된 속옷을 꺼내서 입기만 하면 되었다.

매일같이 입는 속옷이기에 더욱 무심했고, 눈에 힘을 주고 봐야만 겨우 보이는 글자를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게 작게 수놓아진 글자가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속옷에 왜 이런 게 있는지 모르겠어. 뭔가 짐작되는 거라도 있는 거야?”

-확실하진 않아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악몽을 꾸게 된 건지도 몰라요.

“뭐?”

혜주는 수철과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속옷에 새겨진 글자의 의미와 같이 잔 날엔 악몽을 꾸지 않았던 사실.

혹시나 몰라 오피스텔에 가서 확인해보니 한 벌도 빼놓지 않고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말하자 주원이 침음을 흘렸다.


“어떻게 그런 일이…….”

-주위에 그런 짓을 할 만한 수상한 사람 없어요?

주원은 순간적으로 도 씨를 떠올렸다. 사근사근하고 상냥하지만 간혹 음침하게 느껴지던 인상, 지나치게 주원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이상한 여자였다. 주원의 옷장에 가장 접근성이 높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도 씨 아주머니가 본가에 도우미로 온 게 혜림이 죽은 이듬해군.’

공교롭게도 악몽이 시작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 명 있어.”

-누군데요? 혹시 오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확실하지는 않아. 다만 꺼림칙한 부분이 좀 있어서.”

주원은 혜주에게 도 씨에 대한 얘기를 했다.

주원이 태어나기 전부터 본가에서 일한 다른 이들과 다르게 혜림이 죽은 이듬해에 들어온 가사도우미라는 것만으로도 의심할 여지는 충분했다.


“일단 어머니께 연락을 해봐야겠군.”

-네, 누가 그런 짓을 한 건지 꼭 밝혀내야 해요. 하지만 제 짐작이 틀리기라도 하면…….

“걱정 마. 속옷에 그런 게 있는지 알고 계셨는지 정도만 여쭤볼 테니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혜주가 손가락 튕기는 소리를 냈다.


-오빠,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우리 덫을 한 번 쳐보죠!

“덫?”

혜주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주원에게 풀어놓았다. 속옷에 그런 짓을 한 사람이 정말 도 씨인지 확인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음. 너구리를 잡으려면 굴에 불을 질러야 한다는 소리지?”

“딱 그 얘기예요! 어머님을 통해 이쪽에서 뭔가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 알아서 기어 나오지 않을까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잖아요.”

듣고 보니 꽤 그럴싸한 방법이라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어머니와 통화할 때 그렇게 얘기해 볼게.”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최대한 의심 사지 않게요.

“내 전문이야.”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니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악몽의 원인이 정말 속옷 때문인지 확인하려면 잠자리에 들어야 했지만 주원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꾼 악몽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오혜주 파워가 필요한 타이밍이군.’

주원은 나른하게 베개에 얼굴을 기댄 채 혜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한국은 몇 시야?”

-열두 시 조금 지났어요.

“출장만 아니면 지금쯤 너 끌어안고 자고 있을 텐데.”

상상만 해도 좋았다. 혜주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지만.


-누구 맘대로요. 저 이제 제 집으로 돌아왔거든요?

“다시 잡아 올 거야.”

-어우, 사양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어제 집에서 오빠 팬티가 나와서 아빠한테 얼마나 들볶였는데요. 결혼도 안 한 처자가 자취방에 남자를 들이고 잘하는 짓이라고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 귀에서 피 나는 줄 알았어요.

재잘대는 목소리를 들으니 그리움이 배가되었다. 주원은 혜주가 준 동전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옳은 말씀 하셨네.”

-어머? 내가 누구 때문에 안 들어도 되는 잔소리를 들은 건데! 너무 뻔뻔한 거 아니에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팬티 훔쳐 간 게 누군데.”

-아, 네. 다 제가 잘못 생각했네요. 죽든지 말든지 모르는 척해야겠네! 결혼도 안 한 처자가 총각 집에 드나들면 안 되는 거니까! 맞죠?

편 안 들어준다고 급발진하는 것도 귀엽고.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누가 손해인지 봐요. 나 앞으로 오빠 집에 절대 안 갈 거예요!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앵그리버드 같은 표정이 그려진다.

얼굴이 그려지니 보고 싶다.

그녀를 안고 잠들었던 기억, 함께 요리를 나누어 먹던 기억,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에 그녀가 있을 때 충만하게 차오르던 행복감.

같이 있고 싶다. 만지고 싶다. 욕심이 난다.


“우리 결혼할까?”

가만히 혜주의 음성을 듣고 있던 주원의 입에서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곧바로 먹던 물을 뿜는 소리가 들렸다.


-푸읍……! 뭘…… 해요?

 

 
저런. 옆에 있었으면 입술로 닦아주는 건데.

주원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너랑 같이 살고 싶어. 결혼도 안 한 처자랑 같이 살 방법은 하나뿐이잖아. 결혼하자.”

-이 오빠 진짜 미쳤나 봐.

“나 아버님한테 미운털 박혀서 한 번 더 찍히면 그땐 아웃일지도 몰라. 곱게 키운 딸내미 결혼도 하기 전에 남자 집에 드나들게 했다고 후드려 패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안 드나들 거라니까요? 이제 오빠 집에 안 가면 그만인데 무슨 결혼을, 하하…….

혜주는 몹시 당황한 듯 헛웃음을 지었다.

상대가 누구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결혼이란 걸 하겠지, 막연히 생각한 적은 있다. 하지만 파릇파릇한 이십 대에, 사귄 지 몇 달도 되지 않은 남자와 할 거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물론 그 상대가 강주원이라 솔깃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안 되지. 누굴 말려 죽이려고.”

-그럼 아빠 몰래 드나들면…….

“그것도 안 되지. 난 아버님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럼 어쩌자고요.

“결혼하자고.”

이 오빠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닌 거 같은데?

수화기 건너편에서 눈알을 뎅굴뎅굴 굴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당황한 혜주의 반응이 귀여워 흐뭇하게 미소 짓는 주원의 귓가로 이윽고 대답이 들려왔다.


-오빠, 침대에 간호사 벨 있죠?

“있는데 왜.”

-간호사 불러서 열나는지 한번 재봐요. 그럼 끊을게요!

“야, 오혜주. 결혼하자ㄱ……!”

디릭.

얄짤 없이 끊긴 전화에 주원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줄행랑치는 스킬이 날로 느네.”

그 모습조차 오혜주다워서 자꾸 웃음이 났다.

보고 싶다.

차오른 그리움에 두려움이 저만치 물러났다.

질식할 것 같은 공포의 순간은 어느새 아주 작은 부분이 되었다. 혜주의 존재가 이렇게 큰 힘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빨리 잡아 와야지, 안 되겠네.”

백 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고 주원이 가만히 읊조렸다.

이어진 밤은 평안했다.

악몽도, 그 흔한 개꿈도 없었다.

*

똑똑.

이른 아침, 노크 소리와 함께 홍콩지사 인사팀 직원이 병실에 들어섰다. 악몽을 꾸지 않았던 지난밤을 떠올리며 혜주의 추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에드워드.”


“이제 정신이 좀 들었습니까?”

금발에 파란 눈.

전형적인 미국인의 모습을 한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로 한때 주원의 비서로 일하던 사람이었다.

주원이 한국으로 발령이 난 후 인사팀으로 배속이 되어 현재는 홍콩 법인 인사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글로벌 IT 기업인 데이터스의 인재답게 4개 국어가 가능했으나 애석하게도 한국어는 할 줄 몰랐다.


“오랜만이야. 미국 돌아오자마자 병원 신세를 지게 될 줄 몰랐군.”


“그러게요. 저도 소식 듣고 많이 놀랐어요. 의사 말로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실신이라고 하더군요. 한국에서의 일이 녹록지 않은 모양이죠?”


“애송이를 대표 자리에 떡하니 앉혀놨으니 체할 수밖에.”


“그거 농담이죠? 대표님을 애송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대표님밖에 없을 겁니다. 한국 가시더니 안 어울리게 겸손해지셨네요.”

 
오랜만에 만난 에드워드는 예전처럼 밝고 활기찼다. 조금 껄렁대기는 해도 일 처리 하나만큼은 똑부러진 사람이라 주원은 그를 신뢰하는 편이었다.

잠시 담소를 나눈 후 에드워드가 본론을 꺼냈다.


“애뉴얼 포럼은 예정대로 오후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참석 가능하신지 확인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참석할 거야.”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직 안색이 창백합니다.”


“안색으로 일하는 거 아니니까.”

에드워드가 숨죽여 웃었다.


“여전하시군요. 조크하시는 거 보니 멀쩡한 것 같습니다.”


“연봉도 많이 받는데 돈 값해야지.”


“그럼 저도 돌아가서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이따 시간 맞춰 기사가 모시러 올 겁니다. 더 필요하신 건?”


“속옷 좀 사다 줄 수 있어?”

의외의 질문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속옷이요. 어떤 걸로?”

난데없이 속옷을 사다 달라는 게 의아했으나 이내 에드워드는 홀로 답을 내렸다. 까먹고 짐을 안 쌌나보다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무거나 상관없어. 기왕이면 드로즈로.”


“네, 그러죠.”


“기왕이면 무채색이 좋겠군.”


“네.”


“기왕이면 무늬는 없었으면 해.”


“네, 네, 알겠습니다. 드로즈, 무채색, 무늬 없는 거!”

에드워드가 꼼꼼이 메모를 하며 신경질을 냈다. 한마디만 더 붙이면 안 사다 줄 거 같아서 주원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십 년 넘게 선우연 여사가 사준 속옷에 길들여진 탓이지.’

새로운 스타일의 속옷을 입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에드워드가 병실을 나간 후 홀로 남은 주원은 휴대폰을 들었다.


-어, 주원이니? 아침부터 웬 전화야?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주원의 눈매가 낮게 가라앉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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