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하나뿐인 내 아이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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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하나뿐인 내 아이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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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하나뿐인 내 아이의 이름
2023.02.02.
딸이 죽은 건 십여 년 전이었다.
마른 몸매에 하얀 얼굴, 들꽃처럼 청초한 아이였다. 손을 잡고 길을 나서면 시선이 단번에 집중되는 귀여운 아이.
착하고, 순하고, 마음이 여렸다. 어디 가서 손해를 보면 봤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한없이 소중한 아이는 공부도 퍽 잘해서 혼자 사는 엄마의 어깨를 매번 으쓱하게 해주었다.
-엄마, 나 이번에도 장학금 받았어! 이번 학기 등록금 걱정은 할 필요 없겠다. 잘했지?
성적표를 들고 와 조잘조잘 떠들어내면 시장에서 온종일 생선을 파느라 녹진해진 피로가 사라졌다.
원혜림.
하나뿐인 내 아이의 이름이었다.
“보고 싶다, 우리 딸…….”
도씨는 사진 속 혜림의 얼굴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남편과 이혼하고 딱 하나 남은 가족이었다. 이젠 그마저도 사라져버렸지만.
혜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도 씨는 시장에서 생선을 자르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유난히 장사가 잘된 날이었다.
처음 생선 요리에 도전한다며 마지막 손님이 까다롭게 손질을 요구해도 기분이 좋았다. 도 씨는 마지막 남은 떨이까지 봉지에 담아주며 인심 좋게 말했다.
“비린내 안 나게 하려면 된장을 푹 퍼서 섞어봐요, 새댁! 맛있으면 또 오고, 응?”
그렇게 마지막 손님을 떠나보냈을 때 경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도우미 씨 되시죠? 따님이 원혜림 양 맞습니까?”
덜컥 가슴이 내려앉은 도 씨가 서둘러 고무장갑을 벗었다.
“네, 그런데요. 우리 딸한테 무슨 일 있나요?”
딸에게 큰일이 난 것 같은데 왜 병원으로 오라고 하는 건지, 왜 경찰서가 아닌 병원인지 도 씨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딸을 마주한 건 영안실이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딸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인사를 했는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지,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몇 번 기절했다 깨어나니 모든 절차가 끝나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빈소가 참 초라했다고 한다. 올 가족도 없고 먹고 사느라 친구도 많이 두지 못한 게 이렇게 한이 될 줄은 몰랐다. 딸의 마지막 걸음까지 외롭게 한 게 꼭 자신의 죄인 것 같아서 도 씨는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장례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무렵 경찰이 찾아왔다.
“원혜림 씨 사망 사건의 조사가 끝났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타살 정황은 없고요. 자살 사건으로 내사종결할 예정입니다.”
“왜요? 우리 딸 자취방에 남자 사진이 떨어져 있었다면서요! 일기장에 그 사람을 원망하는 내용도 있다고 했잖아요! 그 사람 때문에 죽은 게 분명한데 그 사람은 아무 벌도 받지 않나요?”
“어머니 충격받으실까 봐 말씀은 안 드렸는데, 이미 그쪽에서 스토킹으로 원혜림 씨를 신고한 이력이 있더라고요. 아마도 둘이 사귀는 사이였던 듯한데 끝이 안 좋았던 모양입니다. 저희도 참 안타깝습니다.”
도 씨는 납득할 수 없었다.
딸의 일기장에서 ‘강주원’이란 이름을 몇 번이고 보았다.
그놈 때문에 슬퍼하고, 그놈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놈 때문에 하루하루 피폐해져 가는 딸의 마음을 분명히 보았단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놈은 아무 벌도 받지 않는 거지?
내 딸을 죽음으로 몰아간 놈이 하하호호 웃으며 사는 꼴은 절대로 볼 수 없다.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일 수 없다면 평생 내 딸을 가슴에 품고 살게 하리라.’
슬픔과 복수심에 식음을 전폐했던 도 씨는 장례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후에야 집에서 나왔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깊은 산중의 한 보살집이었다.
“다희 엄마, 오랜만이에요. 나 혜림이 엄마예요. 기억하죠?”
색색깔의 깃발이 휘날리는 신당을 어색하게 둘러보는 도 씨를 무당이 힐끗 바라보았다.
쪽진 머리에 짙은 눈화장,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은 무당은 바로 귀녀였다.
귀녀와는 예전에 한동네에 살았다. 그녀는 귀여운 딸 하나를 키우며 평범하게 사는 주부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이 아프다고 시름시름 앓더니 이듬해에 신내림을 받았다.
이혼 후 동네를 떠나면서 소식이 뚝 끊기기 전까진 제법 친하게 지냈던 터라 도 씨는 지금의 귀녀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도 씨를 한참이나 뜯어보던 귀녀가 이윽고 한마디를 툭 던졌다.
“혜림이랑 같이 왔군요.”
도 씨는 기함하여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용한 무당이라더니 사실이었구나!’
혜림이 죽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귀녀의 태도에 도 씨의 가슴에 희망의 불씨가 싹텄다.
귀녀의 도움을 받으면 어떻게든 ‘그놈’에게 복수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다희 엄마! 아니, 보살님! 저 좀 도와주세요!”
도 씨는 무작정 귀녀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내 딸을 죽인 놈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그럴 수만 있다면 전 재산, 아니 내 목숨까지도 내놓겠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네?”
절박한 도 씨의 말에 귀녀는 처음엔 당치도 않은 말이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에게 받은 힘을 사사로이 쓸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치지도 않고 찾아오는 도 씨의 절실함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자를 편히 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여럿 있지. 하지만 그런 방법을 썼다간 자네의 인생 역시 순탄히 흐르지는 않을 걸세.”
“상관없습니다! 내 딸이 괴로워했던 것만큼 그놈도 괴로워하길 바라요. 내 딸이 그놈 때문에 힘들어한 만큼 그놈도 고통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귀녀는 도 씨의 간곡한 부탁을 내치치 못했다. 동네에서 마주치면 꼬박꼬박 인사를 하던 해맑던 혜림의 모습이 떠올라 더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필요한 게 있네.”
귀녀는 그 일을 위해서는 혜림의 머리카락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딸의 무덤을 파며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 떠올려도 심장이 뜯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십 년이나 이어졌다.
귀녀는 죽은 혜림의 머리카락을 꼬아 만든 실로 주원의 소지품에 수를 놓으라 조언했다. 주원의 본가에 가사도우미로 들어가,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게 조심히 일을 처리해온 도 씨는 날로 피폐해져 가는 주원의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했다.
‘죽기 직전까지 내 딸이 느꼈을 고통을 너도 느껴봐!’
귀녀의 기도가 깃든 머리카락도 이제 몇 가닥 남지 않았다.
붉은 주머니에 곱게 싸인 머리카락을 보며 도 씨가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
본가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의 숙소는 안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필연의 조수, 운전기사, 정원사, 가사도우미를 포함한 약 십여 명의 사람들이 머무는 그곳은 남자와 여자의 숙소가 분리된 쾌적한 장소였다.
대학교수인 필연이 내로라하는 기업 총수들이나 누릴법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집안이 대대로 소유한 땅 덕택이기도 했지만 투자의 귀재인 선우연 덕분이기도 했다.
주식이며 그림이며 사는 족족 잭팟을 터트려준 덕에 돈이 차고 넘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고용인들의 숙소 역시 호화스러울 정도로 시설이 좋은 편이었다.
이른 아침, 습관처럼 딸의 머리카락이 담긴 주머니를 어루만지던 도 씨가 부지런히 숙소를 나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얼굴이 아주 편안해 보이네요?”
잡풀을 뽑고 있던 정원사가 싱글벙글한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 대부분이 짧게는 십 년, 길게는 삼십 년 이상을 일해온 사람들이라 서로를 잘 알았다.
“네.”
마주 인사를 해주는 것도 귀찮아서 도 씨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쳤다.
그때 도 씨의 눈에 익숙한 인영이 비쳤다.
“음?”
푸릇푸릇한 잔디로 뒤덮인 정원 한 편에 앉아 있는 선우연이었다. 하얀 모자를 쓰고 숄을 어깨에 걸친 모습이 그림의 한 폭처럼 아름다웠다.
‘저년은 무슨 복을 타고났길래 팔자가 저렇게 좋아? 누군 세탁 바구니 들고 출근하는데 누군 아침부터 고상을 떨고 지랄이네.’
이곳 직원들은 선우연을 참 좋아했다. 상냥하진 않지만 의리 있는 성품, 계산에 빠르지만 인색하지 않은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 씨는 도무지 그녀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해도 결국은 제 딸의 원수를 낳은 여자였다.
‘두고 봐. 결국엔 너도 나처럼 자식을 잃게 될 테니까!’
도 씨는 속으로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때 선우연의 고개가 이쪽으로 향했다. 도 씨는 흘겨보던 시선을 황급히 떨구고 상냥한 미소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오늘 일찍 일어나셨네요.”
선우연은 통화 중이라는 듯 손바닥으로 저지하는 시늉을 했다. 평소 같으면 짧게라도 인사를 해주었을 텐데, 이상했다.
무슨 중요한 통화인가 싶어 세탁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느릿하게 곁을 지나던 도 씨의 귀에 충격적인 말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속옷에 무슨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도 씨의 걸음이 삐거덕거리며 멈췄다.
속옷, 그리고 글자.
그 두 마디가 뜻하는 바가 예사롭지 않았다.
‘설마 들킨 걸까? 이제 거의 다 왔는데…….’
쿵쾅쿵쾅 심장이 진동하고 입이 바짝 말랐다.
등줄기엔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했다.
“글쎄. 난 잘 모르겠구나. 네 속옷을 준비한 건 나지만 항상 세탁을 해서 보냈었거든. 우리 집 세탁은 도 씨가 도맡아 하고 있는데 한번 물어볼까?”
도 씨는 직감적으로 오랜 계획이 틀어졌음을 알았다. 주원을 서서히 말려 죽이려던 계획이 어디까지 들통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통화 내용을 미루어보아 정확한 사정까지는 알아내지 못한 것 같았다.
근처에 서성이다 괜히 덜미를 잡힐까 싶어 도 씨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어. 잡히기 전에 도망쳐야 해!’
그녀가 향한 곳은 세탁실이 아닌 숙소였다.
방으로 돌아와 몇 개 되지도 않는 짐을 싸고 마지막으로 혜림의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붉은 주머니를 챙겼다.
“도 씨 아주머니, 일하다 말고 어디 가세요?”
물색없는 정원사가 허둥지둥 집을 나서는 도 씨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들키면 경을 칠지도 모르는데 눈치 없이 말을 거니 짜증이 치밀었다.
“남이야 어딜 가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그쪽은 풀이나 마저 뽑아요!”
도 씨가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정원사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허허…… 오늘 기분 나쁜 일 있으신가 보네. 그럼 잘 다녀와요.”
“하여간 저렇게 눈치가 없으니까 쉰 넘도록 남의 집 일이나 하고 있지!”
도 씨가 위아래로 눈을 흘기며 대문을 쾅 닫았다.
이 집에서 지낸 세월이 십 년인데 들고나온 건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몹시 불안한 마음과 끝이 보인다는 홀가분함이 혼재되어 심장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었다.
“보살님, 나예요. 마지막 작업을 서둘러야겠어요. 네, 지금 갈게요.”
통화를 하는 그녀의 눈이 희번덕하게 빛났다.
이제 정말 끝이다.
십 년을 계획한 딸의 복수를 마무리할 타이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