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병실 안에 승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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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병실 안에 승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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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병실 안에 승원이 있었다
2023.02.09.
애뉴얼 포럼이 시작되기 전 주원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어제 악몽 없이 자기는 했지만 한 번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큰 회의를 앞두고 잠자리에 든다니 평소 같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혜주의 짐작대로 정말 속옷이 악몽의 원인이라면 일단 자보는 수밖에 없었다.
똑똑.
얼마 후 속옷을 가져다주기 위해 에드워드가 병실로 찾아왔다.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깬 주원은 제일 먼저 시계부터 확인했다.
‘두 시간 지났군.’
훌쩍 흐른 시간을 확인한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속옷 때문에 악몽을 꿨던 건가?’
고작 속옷에 수놓은 글자 하나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악몽에 시달렸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잠을 너무 짧게 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면 비행기에서도 긴 잠을 자지는 않았다.
잠든 지 30분 만에 과호흡이 올 정도로 끔찍한 악몽을 꾸고 깨어났으니까.
“대표님, 속옷 준비됐습니다. 바로 필요하신 거죠?”
“응.”
“그럼 전 나가 있겠습니다. 차는 준비됐고요. 한 시간 후에 포럼 시작이니 지금 이동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맙군. 바로 나갈게.”
에드워드가 준비한 무채색의 향연을 만족스럽게 쳐다본 주원이 그중 하나를 골라 입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혜주에게 전화를 걸며 와이셔츠의 소매를 꿰었다. 실크가 섞인 부드러운 와이셔츠가 근육이 잘 잡힌 팔에 착 감기고 단추가 하나씩 채워졌다.
그가 와이셔츠를 완벽히 입을 때까지 혜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회의라도 하고 있는 건가?’
계산을 해보니 한국 시간으론 이미 출근을 마친 시각이었다.
한 번 전화를 건 상대에겐 다시 전화가 올 때까지 재발신하지 않는다는 대원칙까지 깨 가며 다섯 번이나 전화를 건 주원이 시계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닫았다.
“오혜주 목소리 한 번 듣기 더럽게 힘드네.”
아쉽다. 살려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악몽을 꾸지 않았다고 말하면 무척 기뻐했을 말간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안 받으면 너만 손해지.”
주원은 넥타이를 고쳐 매며 병실을 나섰다.
데이터스 코리아의 대표로서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출 시간이었다.
*
애뉴얼 포럼은 홍콩 도심의 호화로운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데이터스 본사 임원들과 약 이십 개국에 달하는 지사의 대표들이 모여 향후 비전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시급한 현안을 논의한다거나 지사의 존망을 결정짓는 중대한 결정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데이터스를 이끌어가는 리더가 한곳에 모여 얼굴이나 보자는 취지의 연례행사였다.
그야말로 눈도장을 찍는 자리.
하지만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리이기도 했다.
“잘 지내셨어요, 맥키리. 영국 지사의 최근 성장률이 대단하더군요. 축하드립니다.”
“한국 지사에 비하면 조금 모자랍니다. 강주원 대표가 부임한 후 매출이 수직 상승했더군요. 본사에서 놓치기 싫어한 이유를 알겠어요, 허허!”
안면이 있는 사이엔 덕담이 오가고 처음 보는 사이엔 인사가 오갔다.
커다란 쟁반에 샴페인 잔 수십 개를 올린 직원이 부지런히 오가는 가운데 주원은 몰려드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강! 오늘도 미모가 눈부시군요. 대체 뭘 먹기에 얼굴에서 빛이 날까? 볼 때마다 탐이 나네요.”
피에르테가 은근히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을 걸었다.
게이인 것을 스스로 당당히 여기는 그는 예전부터 주원에게 관심이 꽤 많았다.
본사에 있을 때 일 년 정도 함께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얼마나 추파를 던지던지, 그가 민머리에 쉰이 넘은 ‘남자’가 아니었다면 둘이 사귄다는 오해를 샀을지도 모른다.
“그만둬요, 피에르테. 선비의 나라에서 온 분에게 그런 짓궂은 농담이라니.”
누군가 만류했지만 술이 오른 피에르테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농담이라니? 난 아무에게나 농담을 하지 않아. 미스터 강처럼 잘생긴 남자는 파리에서도 흔치 않다고. 그가 뭘 먹는지, 뭘 바르는지, 어떤 속옷을 입는지 궁금한 게 당연하지. 아, 속옷 색깔을 확인하려면 옷부터 벗겨야 하나? 클클.”
마디가 얇은 손가락이 근육의 굴곡을 타고 내려왔다. 어깨를 스쳐 가슴에 꾹 닿은 손길은 불쾌할 만큼 노골적이었다.
잘생긴 남자만 보면 일단 찔러보고 보는 피에르테의 추태에 주변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누군가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누군가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둘을 주시했다. 주원의 귓불에 불이 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반, 불같이 화를 낼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반이었다.
그러나 샴페인으로 가볍게 입술을 적신 주원은 한없이 느긋했다.
“다른 목적으로 묻는 말이 아니라면 비결을 알려드리죠, 피에르테. 이따 발코니에서 만나요.”
“오호, 드디어 내 고백을 받아주는 거야?”
“대신 커튼은 열어놓을 겁니다.”
“와하하!”
위트 있게 피에르테의 말을 받아치는 주원에 주변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노골적인 추파에 대한 노골적인 거절이었다.
피에르테는 울긋불긋해진 목덜미로 억지로 미소를 머금었다.
“큭큭! 역시 호락호락한 남자가 아니라니까. 미모 비결은 나중에 듣는 걸로 하지. 커튼 없는 발코니엔 구미가 당기지 않아서 말이야.”
“정 궁금하시면 메일로 보내드리죠. 자리를 자주 비운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면 금세 확인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주원이 그의 업무 태만을 꼬집자 피에르테의 얼굴이 피 칠갑을 한 듯 붉어졌다. 그러나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반박하지는 못했다.
“이거이거, 피에르테가 당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걸? 보통은 피에르테가 추파를 던지면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기 바쁜데 말이야.”
“저번엔 그가 막 부임한 젊은 대표를 울린 적도 있었죠. 그 덕에 포럼 시작하기도 전에 분위기가 엉망이었잖아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이들이 비웃음을 흘렸다.
피에르테는 회사에서 유명한 또라이였다.
입사한 지 하루 만에 커밍아웃을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그 후로 틈만 나면 남자 직원들에게 추파를 던졌다.
무례할 정도로 자유분방한 그의 태도는 공식 석상에서도 간혹 문제를 일으키곤 했는데 그로 인해 회장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주변의 수군거림에 피에르테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봐, 말 다 했어? 내가 누굴 울렸다고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의 화살이 향한 건 바로 옆에서 수군대던 싱가포르의 여대표였다.
괜히 불똥을 맞은 그녀가 아치형 눈썹을 휙 끌어올렸다.
“어머, 이제 와서 발뺌하는 거예요? 그 일이 있었던 게 불과 작년이라고요! 에릭이 당신 때문에 얼마나 곤혹스러워했는지 알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 자식이 당신 밑에 있던 직원이었군 그래? 농담 몇 마디 했다고 곤혹스럽기는! 하긴 생긴 것부터가 질질 짜는 계집애 같았지.”
“그만두죠. 이런 자리에서 당신 같은 사람과 불필요한 대화를 나누고 싶진 않아요.”
“당신 같은 사람? 내가 뭐! 내가 어디가 어때서!”
흥분한 피에르테가 삿대질을 하며 성큼 다가섰다. 공교롭게도 그의 팔이 바로 곁을 지나던 호텔 직원의 쟁반에 부딪쳤다.
와장창!
분주하게 샴페인을 나르던 직원의 쟁반에서 유리잔이 와르르 쏟아졌다.
열 개도 넘는 잔이 깨지며 바닥에 액체를 흩뿌렸다. 파편이 된 유리 조각 일부는 근처로 튀었고 일부는 붉은 양탄자 바닥에 꽂혔다.
“윽!”
운이 나쁘게도 파편을 가장 많이 뒤집어쓴 건 제일 가까이에 있던 주원이었다.
“맙소사!”
주머니 속의 동전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그는 급히 팔을 들어 갑자기 덮친 유리 조각을 막았으나 온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작은 유리 파편에 긁힌 눈썹에서 뚝뚝 피가 떨어졌다.
“어떡해! 괜찮아요?”
주변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다가섰다.
주원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었다. 누군가 건넨 손수건으로 눈가를 꽉 누른 그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철렁했다.
동전이 사라졌다!
“찢어진 거 아니에요? 우선 병원부터 가는 게 좋겠어요.”
주변에서 들리는 수 없는 걱정이 귓가에 하나도 꽂히지 않았다.
‘아까까지 분명히 들고 있었는데?’
주원은 지혈하는 것도 잊고 허리를 숙여 바닥을 살폈다.
아무래도 갑작스레 날아온 유리 조각을 막으면서 손에서 놓친 듯한데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당황한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달려온 호텔 직원들과 무슨 일이 났나 싶어 몰려든 이들의 구둣발뿐이었다.
“이게 대체.”
눈썹에서 뚝뚝 흐르는 피를 보며 그는 혜주를 떠올렸다.
그녀가 부적이라며 쥐여 준 동전이 사라진 것이 몹시 불길하게 느껴졌다.
‘설마 혜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불현듯 아침부터 혜주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뇌리를 강타했다. 가슴이 불쾌할 정도로 쿵쿵 뛰었다.
“잠시만 좀 나가죠.”
그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가 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받지 않았다.
부리나케 인트라넷에 접속하자 갑작스레 휴가를 신청한 상태 창이 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턱의 핏줄이 불끈 솟아났다.
주원은 그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에드워드에게 다급히 말했다.
“에드워드, 한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비행기 편으로 예약해줘.”
“아직 포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입니까?”
“대충 눈도장은 찍었으니 나 하나 빠진다고 큰일 날 일은 없을 거야. 이 얼굴이 쉽게 뇌리에서 잊히는 얼굴도 아니고.”
“그렇다는 데엔 동의합니다만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당황한 에드워드가 주원을 만류했다. 주원이 피 묻은 재킷을 벗어 에드워드의 품으로 툭 던졌다.
“사정 설명은 나중에 하지. 부탁할게.”
*
평일이라 다행히 금방 비행기를 잡을 수 있었다.
짐을 챙길 여유도 없이 공항에 도착한 주원은 곧장 비행기에 올랐다.
“빌어먹을.”
머리가 지끈거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별일’이 일어난 징조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고 소식을 접한 것도 아니고 급한 연락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주원의 예리한 직감은 날카롭게 그를 베어댔다.
오랜 시간 연락이 닿지 않는 혜주, 갑작스러운 연차, 그리고…… 잃어버린 동전.
고작 그런 일로 연회장에서 뛰쳐나온 거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다.
그래, 주원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자친구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그 중요한 미팅에서 뛰쳐나온 미친놈이 그였다.
-아직까진 자네 혼자 괴롭고 말겠지. 하지만 머지않아 화가 그녀에게까지 미칠 걸세!
흉흉했던 해인신녀의 경고가 떠오르자 숨이 막혔다.
주원은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눈을 부릅떴다.
‘침착하자, 강주원. 별일 없을 거야.’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이 뻐근하게 아팠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시각은 이미 해가 저문 후였다.
다행히 혜주에게서 짤막한 메시지가 와 있었다.
-팔을 좀 다쳐서 병원에 왔어요.
팔을 다쳤다고? 얼마나? 대체 어쩌다가?
메시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병원으로 내달렸다.
[오혜주]라고 적힌 명패를 보는데 깊은 안도와 동시에 가슴이 무너졌다. 이 안에 그녀가 숨 쉬고 있어 다행이지만 막상 다쳤다고 하니 얼마나 다쳤을지 걱정이 되었다.
주원은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문고리를 잡았다.
“!”
멈칫.
그러나 그는 문을 열지 못했다.
병실 안에 승원이 있었다.
혜주를 품에 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