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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나 피하지 마, 혜주야 (74/121)


#74. 나 피하지 마, 혜주야
2023.02.12.



 
몇 시간 전.

혜주는 동네 병원에서 눈을 떴다.


“아야…….”

낯선 공간에 놀라 벌떡 일어난 혜주는 순간적으로 골이 띵했다.

하얀 천장, 딱딱한 침대, 코끝에서 느껴지는 소독약 냄새…….

이곳이 병원이란 걸 알아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위험한 곳이 아님에 안도한 혜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다시 베개에 눕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양팔이 홧홧해 팔을 들어보니 화상 치료용 거즈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큰 화상은 아니었지만 자잘하게 불씨가 튄 상처가 보였다.

이마가 묵직하게 느껴져 더듬어보니 밴드가 붙어 있었다. 살짝 만져보니 멍이 든 것처럼 아팠다.


‘그러고 보니 아까 도 씨에게 쫓기고 있었지.’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며 혜주가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을 정리했다.

도 씨가 무당과 함께 작당을 벌이는 걸 목격한 혜주는 곧장 항아리를 들고 신당을 뛰쳐나왔다.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필립이 운전하는 차를 탔었지.


-더 밟아, 더! 바짝 쫓아오잖아!

 
필립이 운전하는 똥차를 도 씨가 맹렬하게 뒤쫓았다. 섬뜩하게 비틀린 얼굴로 그녀가 악을 질렀다.


-멈추지 못해? 내 딸을 당장 내놔!

 
그녀는 눈앞에서 아이를 빼앗긴 여자처럼 필사적이었다. 혜주는 주머니에 쑤셔 넣은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주먹을 꽉 쥐며 필립을 채근했다.


-더 빨리 가라고, 좀! 어떻게 사람보다 차가 느리냐!

-지금 가고 있잖아! 누나 차가 구린 걸 왜 내 탓을 해! 대체 누군데 그래?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쫓아오는 거 보면 몰라?

 
덜컹덜컹.

고르지 않은 산길을 달리기에 필립의 운전 실력은 형편없었다. 뻥 뚫린 아우토반도 기어갔을 게 분명한 장롱면허가 산길 운전을 잘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영 속도를 내지 못하는 고물차 뒤로 도 씨가 바짝 따라붙었다.


-어어, 거의 잡힌다. 그냥 밟아! 밟으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예순이 가까운 여자 하나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막말로 맞짱을 뜬다 해도 젊은이 둘 쪽이 우세한 게 당연했다.

한데 백미러로 보이는 도 씨의 모습이 너무 무시무시했다. 붉게 핏발이 선 눈동자와 풀어헤친 머리가 거의 미친 사람 같았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기도 했고.


-내가 책임질 테니까 일단 밟으라고! 속도계에 30은 찍혀야 할 거 아니야!

-그럼 벨트 꽉 매라. 진짜 달려?

-아, 진짜 입만 나불대지 말고 발에 힘을 주라고, 좀!

 
필립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핸들을 꽉 부여잡았다. 꼴랑 20 밟으면서 이마에 땀은 왜 맺히는 건데.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도 씨를 겨우 따돌리고 산 아래에 도착했다. 중간중간 몇 번이고 박을 뻔한 위기가 있었지만 천운으로 살아남았다.


-어때? 내 환상의 드라이빙 실력이!

-야, 앞! 앞!

 
필립이 제 딴에 가장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리는 순간, 혜주의 안색이 하얗게 식었다.

쾅!

필립이 모는 차는 비탈 아래에 적재된 통나무 더미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막을 새도 없었다. 통나무를 그대로 들이받은 순간, 강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그러곤 이내 정신을 잃었다.

*

옆을 돌아보니 필립이 누워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누워 있는 필립을 보곤 혜주가 몸을 일으켰다.


“야, 오춘택! 괜찮아? 어헝, 어떡해…….”

타박상에 그친 자신에 비해 필립의 상태는 위중해 보였다. 머리에 붕대를 둘둘 말고 있는 걸 보니 사고가 날 때 머리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괜히 나 때문에…… 운전 못 하는 것도 모르고…… 허엉…….”

덜컥 겁이 났다. 지금껏 몇 년을 봐 왔지만 필립이 몸져누운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망아지처럼 혈기왕성한 녀석이 눈을 감고 누워 있는 모습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혹시나 기억을 잃으면 어쩌지? 가뜩이나 똥멍청이인데 머리가 더 나빠지기라도 하면?’

혜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필립의 팔을 흔들었다.


“춘택아, 일어나봐. 누나 여기 있잖아, 응?”

대답이 없다.


“앞으로 다신 운전 안 시킬게. 용돈도 많이 줄게! 그러니까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용돈 얘기면 무덤에서도 벌떡 일어날 녀석은 이번에도 묵묵부답이었다.

혜주의 흐느낌이 짙어졌다.


“누나가 잘못했어, 춘택아…… 그러니까 제발 눈 좀 떠.”

드르렁.

……뭐지, 이 BGM은?

이상함을 느낀 혜주가 흐느낌을 멈추었다.

막 잠에서 깬 듯 눈을 껌뻑거리는 필립을 본 순간 속에서 용이 솟구쳤다.


“야, 놀랐잖아! 멀쩡하면서 왜 누워 있고 난리야, 사람 놀라게!”

따악!

눈물 젖은 주먹이 필립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아야! 그렇다고 다친 데를 때리냐?”

“붕대 감은 쪽은 피했잖아. 너 괜찮은 거야?”

“괜찮지, 그럼. 의사가 그러는데 가벼운 뇌진탕 증세래. 푹 쉬면 나아진다고 해서 자는 중이었어.”

휴우.

혜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그녀의 얼굴에 필립은 괜히 뭉클했다.


‘그래도 누나라고 나 걱정해주네. 진짜 가족도 아니면서.’

하긴, 예전부터 혜주는 그랬다.

만날 때마다 화를 내면서도 어디서 맞고 오는 꼴은 못 보고,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용돈은 챙겨 주었다.

양아치질 그만하고 정신 좀 차리라고 입이 닳도록 잔소리를 한 것도 그녀였다.


“그렇다고 뭘 또 울고 그러냐. 쑥스럽게.”

필립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실실 웃었다.


“그나저나 나 방금 되게 달콤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용돈 많이 준다고…….”

“지금 그게 중요하냐, 이 돌대가리야!”

또다시 번쩍 손이 올라오자 필립이 가드를 쳤다.


“알았어, 알았다고! 대신 약속했던 오만 원은 꼭 주는 거다. 알았지?”

이 와중에도 돈타령이라니. 머리에 감은 붕대가 아깝다, 이 돌머리야.


“근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말하자면 사정이 좀 복잡해. 내가 찾아야 할 물건이 좀 있었는데 그거 찾다가 이렇게 된 거야.”

“아깐 꽤 위험해 보이던데?”

“네가 운전을 위험하게 한 거지. 다 내려와서 그게 뭐냐?”

“장롱면허라고 했잖아. 캐비닛 라이선스, 몰라?”

“그거 세상에 있는 단어는 맞아?”

“장롱이 캐비닛 아니야?”

……말을 말자.


“참, 내 녹음기는?”

혜주가 번뜩 생각이 난 듯 손을 내밀었다. 필립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차에서 챙겨온 녹음기를 내밀었다.


“여기 있어.”

혜주는 제일 먼저 녹음 파일이 잘 살아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녹음은 잘 되어 있었다. 방문을 사이에 두고 녹음을 한 터라 말소리가 온전히 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인 뉘앙스는 파악할 수 있었다.


“아빠랑 아주머니한텐 말하지 마.”

“내가 바보냐.”

스스로 바보가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는 필립이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한 짓은 하지 마. 괜히 아저씨 걱정시키지 말고.”

“웬일로 그런 말을 다 하네.”

“누나도 나 다치면 울잖아. 나도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와…….

이러면 안 되는데 코끝이 찡했다. 혜주는 붉어진 눈시울을 들키지 않으려 지갑을 꺼냈다.


“자, 여기 오만 원.”

“위험수당 안 줘?”

“이게 진짜, 확!”

잔잔바리로 몰려든 감동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습관처럼 팔꿈치를 올리는 필립에게 눈을 부라리던 혜주가 선심 쓰듯 오만 원 한 장을 더 꺼냈다.


“옛다, 그래. 네 덕에 무사히 빠져나온 건 사실이니까.”

“오오, 역시 우리 누나 통 크네!”

쌍 엄지를 치켜드는 필립에게 곱게 눈을 흘기고 있을 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혜주야!”

필립과 혜주의 고개가 동시에 휙 들어갔다.


“강승원……?”

혜주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승원은 성큼성큼 걸어와 혜주의 어깨를 쥐었다.


“혜주야, 너 어떻게 된 거야! 괜찮은 거야?”

“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

“지금 그게 중요해?”

고작 밴드 몇 장 붙인 거 가지고 호들갑을 떠니 혜주는 멋쩍어졌다.


“누나, 그럼 먼저 갈게.”

눈치를 보던 필립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제 병실에 남은 건 두 사람뿐이었다.

*

승원이 혜주의 사고 소식을 들은 건 퇴근하기 30분 전이었다.

사업팀이 요청한 업무가 마무리되어 혜주의 자리를 찾은 승원은 오늘 아침 혜주가 급하게 연차를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혜주가 연차를 써? 술병 나서 기어 다녀도 출근은 꼬박꼬박 했던 애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한 그는 서른 번쯤 고민한 후에야 혜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만 해도 혜주가 교통사고가 났을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웬 남자의 목소리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오혜주 폰 아닙니까?

-아, 맞는데요. 지금 병원이라 전화 못 받아요.

 
전화를 받은 건 필립이었다.


-병원이라고요? 혜주 어디 아파요? 어디 병원입니까?

 
깜짝 놀란 승원이 묻자 필립이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사 분이세요?

-……친굽니다.

-아. 여기 한솔병원이에요. 그럼 끊습니다.

 
귀찮아 죽겠다는 심드렁한 말투에 더는 캐물을 수가 없었던 승원은 곧장 노트북을 끄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오는 내내 걱정이 되어 미칠 뻔했다.


‘장이 꼬였나? 위염? 아니면 술병이 크게 났나? 오혜주 소화기관 안 좋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큰일은 아니겠지?’

별별 생각이 다 들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혜주야, 괜찮아? 팔은 어쩌다 그런 거야?”

승원이 팔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자못 부담스러운 혜주는 부드럽게 그의 팔을 떼어놓았다.


“좀 데였어.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뭘 이런 일로 병원까지 오고 그래. 민망하게.”

“다쳐서 연차 쓴 거야? 나한테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승원이 안타까운 눈으로 상처를 쓰다듬었다.

친구도, 직장 동료도 아닌 남자의 눈.

그의 마음을 알게 된 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눈이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아는 이상 편할 수가 없었다. 혜주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 정말 괜찮아. 이제 퇴원할 건데 괜히 헛걸음하게 했네.”

“어디 가려고?”

“간호사 언니한테 집에 가도 되나 물어보려고.”

“내가 하고 올게.”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당장 병실을 나서려는 승원을 혜주가 만류했다.

병실을 나가려고 일어났던 혜주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을 본 승원의 표정이 흐려졌다.


“나랑 있는 거 불편해서 그래?”

“불편하지 않으면 오히려 네 마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일 때문에 온 거면 일 얘기나 하고 돌아가.”

“내가 일 때문에 왔겠어?”

승원의 가슴에 걷잡을 수 없이 파도가 쳤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뒤늦게 깨달은 마음은 너무나 크고, 깊고, 아팠다.

형의 여자가 되어 버린 그녀를 놓아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끝끝내 미련이 발목을 잡았다.

시도 때도 없이 그녀의 자리를 흘끔거리고, 밤이 되면 가슴이 새카맣게 타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미련이 기대한 것은 단 하나, 세월이었다.

그녀와 알고 지낸 시간이 십 년이었다. 고작 몇 달이 전부인 주원과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는 단 하나에 그는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다.


“나 피하지 마, 혜주야.”

그가 혜주를 등 뒤에서 안았다.

놀란 듯 굳어버린 혜주의 귓가로 까맣게 탄 음성이 흘렀다.


“속상해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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