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 보고 배우겠지. 나랑은 이런 짓도 한다고 (75/121)


#75. 보고 배우겠지. 나랑은 이런 짓도 한다고
2023.02.16.


한창 돼지캠프가 활성화되었던 시절 ‘사랑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알딸딸하게 술이 올라온 다희는 ‘갖고 싶은 욕망’이라고 대답했고, 혜주는 ‘줘도 줘도 아깝지 않은 마음’이라고 대답했다.

젓가락으로 장단을 치다 또 부러트린 승원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TV에서 흘러나온 사랑 노래를 듣다가 뜬금없이 나눈 대화의 결론은 이랬다.


-야, 쓸데없는 개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너도 솔로, 나도 솔로, 솔로 부대에 사랑이 웬 말이냐!

 
안줏거리도 되지 못하고 종료된 대화였지만 한동안 그 주제를 두고 혜주는 꽤 많이 고민했었다.

무엇을 줘도 아깝지 않은 마음, 곁에 있고 싶은 마음, 그립고 가엾은 마음, 누가 가슴에 불을 놓은 듯 활활 타오르는 마음…….

그 모든 게 사랑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모든 것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었음을.


“속상해 미치겠다…….”

귓가에 울리는 승원의 목소리에 혜주는 아무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깨를 꽉 끌어안은 따뜻한 손이, 밀착된 등에서 느껴지는 거센 고동 소리가 아무렇지 않았다.

혜주는 가만히 제 심장 어림을 만져보았다.

쿵, 쿵.

미약하게 들리는 소리가 내 것이 아닌 듯 멀게 느껴졌다.

그가 이렇게 안아준다면 어떤 기분일까, 몇 날 며칠을 상상해도 지루하지 않은 날들이 있었다.

그를 생각하며 밤새 뒤척이고, 그를 그리워하며 설레던 날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강승원, 이거 놔.”

자극조차 되지 않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에 불과했다.

단호한 혜주의 목소리에 승원은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못 놓겠어, 혜주야.”

귓가에 닿은 숨에 물기가 어렸다.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인 것을 아는 사람처럼 그는 필사적이었다.


“포기가 안 돼. 난 아무것도 한 게 없잖아. 제대로 된 고백도 못 했잖아, 난.”

“나랑 뭘 하고 싶어 이러는 건데?”

“다. 전부 다.”

혜주의 몸에서는 어떠한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난 이토록 가슴이 뛰는데…… 일방적으로 널 안은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처럼 좋은데, 너는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일 수가 있어?’

그녀가 뱉어낸 한숨, 표정 없는 얼굴, 딱딱하게 굳은 몸.

모든 것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거절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승원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혜주야, 나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주원이 없는 틈을 타 뭘 해보려는 불순한 의도가 아니었다. 그저, 한 번이라도 솔직하고 싶었다.


“너를 많이 좋아하고 있어. 네가 형과 사귄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

기어이 눈물이 툭 떨어졌다.

어깨에 떨어진 승원의 눈물이 무거웠다.

언제나 느린 강승원. 일어나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심지어 물도 천천히 마시는 그는 이번에도 한발 늦었다.

네가 그런 사람인 걸 알면서도 기다려주지 못한 나는 딱 그만큼만 너를 좋아했었나 보다.

미안하지는 않았다.

내 마음이 거기까지라면 돌고 돌아도 우린 이렇게 되었을 테지.


“너 이렇게 나 껴안은 거 처음이지.”

“……어.”

“나랑 키스해봤어?”

“뭐?”

“나랑 잔 적은 있니?”

예상치 못한 질문에 승원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야, 친구 사이에 어떻게……!”

혜주는 벼락같이 소리쳤다.


“그래, 친구 사이!”

이제 그도 알아야 한다. 그와 나 사이에 대체 뭐가 있는지.


“주원 오빠와는 해도 되는 그 모든 걸 너와는 할 수 없어. 그게 딱 너와 내 거리야. 선 지켜, 강승원.”

충격을 받은 듯 승원의 숨이 잠시 멈췄다.


“노력……해보면 안 될까? 나 진짜 달라졌어. 예전처럼 눈치 없이 굴지 않을게. 네가 하지 말라는 건 절대로 안 할게.”

“이거 놔.”

“혜주야…….”

“내가 뿌리치지 않고 기다려주는 건 네 스스로 나를 놓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야. 이제 놔줘.”

“나 진짜 이건 끝까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네가 원하면 게임도 그만둘 수 있어. 내가 게임을 포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지? 나 그만큼이나 진심이야.”

“하나.”

“다희와의 관계도 깨끗이 정리했어. 알잖아.”

“둘.”

카운트가 더해질수록 승원의 말이 빨라졌다.


“진짜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 포기가 안 되는데 어떡해, 그럼? 형이랑 네가 사귀는 걸 알면서 이러는 거 진짜 이기적인 짓인 거 알아. 하지만…….”

“셋!”

“으헉!”

미끄러지듯 승원의 등으로 올라간 손이 그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불시의 공격을 당한 승원이 고개를 젖힌 채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야! 아파, 아프다고!”

“난 너보다 더 아팠어, 인간아! 너 때문에 마음고생 한 세월이 얼만데 고작 이 정도로 징징대? 진짜 넌 인간이 덜 됐다.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사정없이 승원의 머리끄댕이를 잡은 혜주는 이 기회에 정신머리를 고쳐주겠다는 듯 맹렬히 공격을 이어갔다.

승원은 팔을 치켜올린 채 막는 데만 급급했다. 다친 애를 세게 다룰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머리채를 붙잡혀 질질 끌려다닐 수도 없고 미칠 노릇이었다.

애절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뚝뚝 떨어지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허억, 헉…….”

잠시 후, 너덜너덜해진 승원이 환자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 아무리 그래도 친구 머리끄댕이를 잡냐!”

볼멘소리를 하자 혜주가 앙칼지게 대꾸했다.


“친구로 굴었어야 말이지!”

엉망진창이 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의 입꼬리가 서서히 씰룩거렸다. 처참해진 서로의 몰골을 쳐다보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야, 너 머리 미친놈 같아.”

“넌들 멀쩡한 줄 알아?”

“너보단 낫겠지.”

“거울이나 보고 말해.”

승원의 표정은 후련해 보였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하고 웃던 그가 조금은 서글픈 목소리로 뇌까렸다.


“역시 우린 이런 게 어울리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에서 체념이 느껴졌다.


“물 한 잔 마시고 올 테니까 이제 정말 가. 돌아왔을 때도 여기 있으면 진짜 얼굴 안 볼 거야.”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 혜주가 먼저 일어났다.

승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혜주가 병실을 나섰다.

*



“오빠……?”

병실을 나서자마자 혜주는 주원을 맞닥뜨렸다.


“언제 왔…… 흡!”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그녀의 손목을 강한 힘으로 휙 잡아끈 주원이 거칠게 입술을 부딪쳤다. 벌어진 잇새를 파고든 숨결에 혜주는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

 

 
눈도 끔뻑이지 못하는 혜주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간 주원은 혀뿌리를 뽑을 듯이 강하게 키스했다.

뜨겁게 달궈진 살덩이가 거세게 얽혀 입안을 휘저었다.


“잠시만요, 오빠. 할 말이…….”

겨우 꺼낸 말문은 그의 입안으로 사정없이 먹혀들어 갔다.

주원은 빠져나가려는 혜주를 강하게 끌어당겨 다시 한번 혜주의 입술을 헤집었다. 얕은 숨이 입안을 가득 채우자 그제야 까맣게 죽은 심장이 다시 뛰었다.

그래, 인정한다.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자제력을 잃었다.

말간 얼굴로 병실을 나서는 혜주를 보는데 휘몰아치던 감정이 온몸을 뚫고 나왔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복도라는 것도 잊었고, 병실 안에 승원이 있다는 것도 잊었다.


“내 인내심이 이렇게 얄팍할 줄은 나도 몰랐다.”

입술이 닿은 상태로, 주원이 속삭였다.

짙게 내리깔린 속눈썹과 정염 가득한 눈동자.

되찾았다는 안도감과 절실한 진심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의 눈빛에 혜주는 가슴이 찌릿하게 저렸다.

아까 승원이 껴안았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온도였다.

시간과 공간을 잊은 건 주원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키스하는 내내 혜주도 그랬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입술을 보는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요? 병실 안에 승원이 있어요. 보면 어쩌려고.”

그녀가 속삭이자 주원이 삐뚜름하게 입술을 올렸다.


“보고 배우겠지. 나랑은 이런 짓도 한다고.”

모르면 가르쳐야 한다.

네가 탐내는 여자가 누군지.

네가 이미 늦어버린 그 여자를 향해 나는 전력 질주했고, 그 결과 그녀를 가졌다.

최선을 다했기에 너에게 미안하지 않아.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후회하지도 않아.

그러니 너는 알아야 한다.

네게 남은 미련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축축한 서로의 입술이 진하게 붙었다 떨어졌다. 야릇한 마찰음에 주원이 만족한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제 좀 살겠네.”

그의 손이 환자복 안쪽을 만지작거렸다.

낭창한 허리를 쥐고 따뜻한 살결을 만지자 혜주가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왜요. 그 전엔 죽을 것 같았어요?”

“반쯤 저세상 발 걸치고 왔어.”

조금 전 병실에서 혜주와 승원이 대화하는 걸 듣고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당장 문을 열고 들어가 혜주를 꺼내올 수도 있었다.

무슨 근본 없는 짓이냐고 승원의 낯짝을 후려갈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끝내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못한 건 세월.

너희가 함께 보낸 그 세월에 한 번쯤은 마침표를 찍을 계기가 필요하단 걸 알기 때문이었다.


‘많이 힘들었지, 혜주야.’

‘더 많이 아플 거다, 승원아.’

친구로 지내 온 숱한 세월 안에 쌓인 둘만의 얘기를 헤아릴 수도 없고, 헤아리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마침표를 찍을 시간을 주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끝이 끝답기를.

그리하여 무뎌지고, 익숙해지고, 더는 아프지 않기를.

그렇게 마침표를 찍고 온 그의 연인이 뺨을 붉히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만의 동전은 이곳에 있었다.


“혜주야.”

앞뒤 분명해서 헷갈리지 않게 하는 여자. 때로는 부적 같고 때로는 보물 같은 내 여자.


“사랑해.”

가슴에서 치밀어오른 한마디는 지금껏 뱉은 그 어떤 말보다 진실했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혜주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우리 오빠 지금 불안하구나? 승원이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런 거죠?”

“불안한 건 맞는데 승원이 때문은 아니야.”

주원은 혜주의 어깨를 잡은 채 그녀의 이마에 콩 자신의 이마를 찧었다.


“너 때문에.”

가까워진 얼굴에 혜주의 뺨이 붉어졌다.


“오혜주 놓칠까 싶어서 그랬다, 왜.”

“어…… 음…… 오빠답지 않게 느끼하네요.”

“매운맛도 보여줄게.”

물론 불닭 사준다는 소린 아니고.


“퇴원할까, 혜주야?”

주원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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