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매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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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매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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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매운맛
2023.02.19.
다행히 심한 화상이 아니라 바로 퇴원할 수 있었다.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주원은 한시도 혜주의 손을 놓지 못했다.
예쁜 팔에 상처가 난 것도 속상한데, 그 상처가 자신을 구하려다 생긴 것이라고 하니 가슴이 찢어졌다.
‘망할 놈. 착하게 좀 살지 그랬냐.’
과거에 발목을 잡힌 자신이 이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주는 그간 있었던 일을 풀어내느라 열심이었다.
도 씨가 죽은 혜림의 친모였으며, 그간의 일이 도 씨가 꾸민 흉계였음을 알게 된 주원은 침음을 흘렸다.
“결국 네 짐작이 맞았던 거군.”
“설마설마했는데 진짜였어요. 무당의 힘을 빌려 누군가를 해한다는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일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온전히 믿기지 않아요.”
주원의 마음은 납덩이를 단 듯 무거웠다.
죽은 딸의 머리카락을 꼬아 실을 만들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만큼 복수심이 컸다는 뜻이겠지.’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누군가를 원망하며 사는 심정이 어땠을지 쉬이 상상도 되지 않는다.
컴컴하고, 외롭고, 불안했겠지.
음습한 곳에 축재된 감정들은 도 씨를 돌이킬 수 없는 늪으로 끌어당겼을 거다.
살아보려고,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주원의 발목을 붙잡고 끝없이 매달린 그녀가 밉기보다는 가여웠다.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을 잃은 그녀가 느꼈을 절망감을 왜 모르겠는가.
죄를 짓지 않고서 죄인이 된다는 게 이런 거였다.
혜림을 사지로 떠민 적이 없었다. 죽길 바란 적도 없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떠올린 사람은 강주원이 맞았다.
그리하여 주원은 자신을 저주한 도 씨를 마음껏 원망할 수도 없었다.
“오빠,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원래 귀국하기로 한 날짜는 내일 아니었어요?”
“네가 연락이 안 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주원의 대꾸에 혜주는 입을 딱 벌렸다.
“세상천지에 애인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바로 비행기 잡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른 일로 간 것도 아니고 그 중요한 포럼을 박차고 나오다니…….”
“중요도 따져보고 결정한 거야.”
그 말에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려 했다.
그에게 완벽한 우선순위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러나 중요한 회의에서 내뺀 걸 칭찬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표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전세계 대표들 모두 모인 회의보다 한낱 직원 나부랭이의 안위가 더 중요합니까? 심각한 직무유기입니다!”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꾸짖는 혜주에게 주원이 하나도 안 무서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직무유기 해봐야 잘리기밖에 더해? 그딴 건 하나도 겁 안 나.”
“딸린 직원이 몇 명인데요.”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든 무슨 상관이야.”
주원이 혜주의 뺨을 꽉 꼬집었다.
“오혜주만 중요해.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은 오혜주 한 명뿐이라고. 이 답정너야.”
“치이…….”
꼬집혔는데 왜 기분이 좋은 거지.
혜주는 실실 웃으며 주원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주원은 사랑스러운 손길로 혜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러곤 그녀의 어깨를 꽉 안았다.
*
주원의 집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너저분했다.
이틀 전, 혜주가 팬티를 찾겠다며 온 집 안을 뽈뽈거리며 뒤집어놨기 때문이다. 온통 열린 방문에 옷가지가 삐죽이 튀어나온 서랍을 본 주원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집 안 꼴이.”
뒷말이 생략됐지만 항상 호텔급 깔끔함을 추구하는 주원의 눈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비칠지는 뻔했다.
급하게 속옷만 확인하고 나오느라 미처 집을 치우지 못했던 혜주는 괜히 양심에 찔려 주원의 눈치를 보았다.
“하하, 내가 깜빡하고 서랍을 안 닫았네. 그땐 정신이 없었다고요…… 내가 치우고 있을 테니 오빠는 씻고 나와요.”
“너한테 뭐라고 한 거 아니거든.”
“한숨 쉬었잖아요.”
“좋아서 그런다. 좋아서.”
“엥?”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주원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너저분한 집이 적군이라도 되는 듯 진지하게 스캔하는 눈빛에는 희열이 어려 있었다.
헉, 설마 이 오빠 정리벽 있나?
혜주는 몹시 거리감을 느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먼저 씻고 있어.”
“네…….”
승원이 퀘스트를 해치울 때의 진지함에 버금가는 주원의 눈빛에 혜주는 찍소리 못하고 욕실로 향했다.
잠시 후.
샤워 가운을 두르고 나왔을 때 펼쳐진 풍경에 혜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와…….”
집 요정 도비라도 다녀갔는지 집 안에서 빛이 났다. 심지어 샤워도 마쳤는지 뽀송하기까지 하다.
“집 깨끗해진 것 좀 봐. 손에 모터 달았어요? 세상에, 그새 샤워도 싹 했네?”
“이 정도는 가뿐하지. 좀 더 어지르지 그랬어.”
“항상 집이 깨끗하기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깔끔한 성격인가보다 했는데 오빠 솜씨였네요.”
“청소는 남한테 안 맡겨. 취미생활이라.”
양심의 가책을 느낀 혜주가 넌지시 물었다.
“남이 어지르는 건 괜찮아요? 막 좀 덜렁대고 너저분하고 그런 여자랑 살 수 있나?”
“입장 바꿔 생각하면 간단하잖아.”
입장 바꿔 생각하니 싫긴 하겠다…….
혜주는 잔뜩 풀이 죽었다.
주원은 어둑해진 그녀의 뺨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쥐었다.
“네가 요리를 좋아해. 상대가 무지막지하게 잘 먹는 사람이라 한 번 요리할 때 십 인분씩 해야 해. 그럼 좋아, 안 좋아?”
“글쎄요.”
“난 좋아.”
엥?
“난 불결한 상태를 참지 못하는 게 아니야. 치우는 행위 그 자체에서 희열을 느낄 뿐.”
“변ㅌ…….”
“변태는 아니고.”
이 오빠 좀 무섭다…… 청소에 뭔 희열까지 느끼고 그래.
주원은 아직도 의심하는 혜주에게 단언했다.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어질러. 치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도 백 프로의 진심에 혜주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캐리어를 정리하는 주원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거만 하면 끝이에요?”
“응.”
주원이 빈 캐리어의 지퍼를 닫아 팬트리에 넣었다. 씻은 손을 수건에 닦으며 돌아온 그가 말을 이었다.
“동전을 잃어버렸어.”
“동전이요?”
“결론적으로 그거 때문에 급히 귀국한 거지만.”
“아…….”
“아침부터 너랑 연락은 안 되지, 동전은 사라졌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고. 전날 너한테 의심 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잖아. 네 성격에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고, 혹시 설레발치다가 사고라도 난 건 아닌가 했어.”
그의 말마따나 설레발치다 사고를 내버린 혜주는 속으로 뜨끔했다. 물론 주원을 위한 일이었지만 그와 충분히 상의를 했어야 했다.
‘도 씨가 바로 나올 줄 알았나, 뭐……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가 그때 안 갔으면 오빠가 지금처럼 무사히 옆에 없을 수도 있잖아?’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지만 주원이 걱정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혜주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가슴을 졸였다는 주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연회장을 뛰쳐나왔는지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귀국하자마자 연신 밀려드는 연락에 택시에서 내내 태블릿을 볼 정도로 바쁜 사람이 만사 제쳐두고 달려와 준 게 고마웠다.
“오빠는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당신은 언제부터 나를 사랑하게 됐을까.
내 무엇이 당신의 차가운 가슴을 움직였는지 두 귀로 직접 듣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궁금해서. 워크홀릭 강주원이 그 중요한 회의를 째고 나온 거면 내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잖아요.”
“정말 궁금해?”
맞은편에서 턱을 괴고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왠지 모르게 짜릿했다.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가슴이 뛴다. 살짝 피로감이 묻어 나른한 눈이 묘하게 색정적이었다.
혜주는 심장 부여잡을 준비를 단단히 하며 엄포를 놓았다.
“식상한 대답은 사양합니다. 예쁜 얼굴이랑 귀염뽀짝한 성격은 빼고 대답해요.”
“별 시답잖은 것들만 다 빼놨네.”
이보세요.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시답잖다니! 내 얼굴이랑 성격이 어디가 어때서!
“이 감동파괴자!”
잔뜩 골이 난 혜주가 눈을 흘기자 주원이 훅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흠칫. 혜주의 어깨가 떨렸다.
코끝이 닿을랑 말랑 가까운 거리, 깊은숨을 들이켠 혜주가 호흡을 멈추었다.
“여기 있네. 내가 좋아하는 거.”
기다란 손가락 끝이 입술에 닿았다.
“오빠…….”
그가 가까워진 만큼 혜주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던 혜주의 뒤통수를 주원이 부드럽게 잡았다.
그대로 밀치며 깊게 입술을 묻자 혜주의 몸이 저절로 소파로 쓰러졌다.
부드럽게 아랫입술을 물고 타이밍을 가져가는 능수능란함에 혜주는 하마터면 홀랑 넘어갈 뻔했다.
‘그러고 보니 내 물음에 대답도 제대로 안 해놓고! 이 사기꾼!’
뭔가 억울한 마음에 혜주는 억지로 주원을 밀어냈다.
“저기요. 얼굴은 시답잖다면서요. 입술은 얼굴에 포함이거든요?”
“몰랐네.”
주원은 가슴에 닿은 혜주의 손목을 움켜쥐며 픽 웃었다.
“그럼 이것도 포함인가?”
어디 이것까지 밀어낼 수 있나 보자.
주원이 한 손으로 혜주의 턱을 붙잡았다. 도톰한 입술이 계절에 폭 파묻힌 꽃잎처럼 벌어졌다.
활짝 열린 그녀의 안으로 주원이 들어갔다. 붉은 봉오리를 감아올리자 혜주가 얕은 숨을 내쉬었다.
주원은 애무하듯 혜주의 붉은 입안을 핥고 빨았다. 쭉 당겼다 놓는 호흡을 몇 번 반복하자 온몸이 금세 녹진해졌다.
농밀한 키스에 혜주의 입술이 젖어갔다.
‘내 질문은 날로 먹으려고 하네. 이 사기꾼…….’
혜주는 나른해진 눈으로 주원을 흘겨보았다.
아까처럼 밀어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만약 이게 내기였다면 이미 강주원에게 졌다.
입술 안의 것이 얼굴에 포함인지 아닌지 그딴 건 이제 의미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 몸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하…….”
잇새로 새는 뜨거운 숨에 주원 역시 숨이 가빠졌다.
“오혜주의 모든 게 좋아.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건.”
“아……!”
한껏 그녀의 입안을 유린한 그가 목선을 타고 내려갔다. 부드러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 입술이 쇄골을 스쳐 지나갔다.
여미었던 가운이 벌어졌다.
심장 위에 아슬아슬하게 멈춘 그의 입술이 속삭였다.
“다른 누군가를 나보다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거든.”
살짝 치뜬 눈으로 시선을 맞추는 얼굴 위로 젖은 머리칼이 흩어졌다. 묘하게 흐트러진 모습이 더없이 섹시했다.
“실은 지금도 그 생각은 같고.”
“강주원 자기애 강한 사람인 거 누구보다 잘 알죠. 그런데 왜 일도 팽개치고 나한테 왔어요?”
주원은 혜주의 심장 위에 입을 맞췄다.
“네가 나라서.”
“그게 뭔 개똥 같은 소리예요? 우리 자웅동체예요?”
“분위기 흐리지 마라.”
요망한 입술이 분위기 깨기 전에 막아버려야겠다.
스르륵.
주원이 끈을 잡아당기자 헐거운 가운 매듭이 풀렸다. 주원은 그 상태로 혜주의 배꼽을 따라 내려갔다.
“아니, 오빠 이렇게 갑자기……!”
공기가 직접 피부에 닿자 닭살이 돋았으나 추워할 새도 없었다.
뜨거운 숨결이 곧바로 밀어닥쳤으니까.
“매운맛이라고 했잖아.”
“아……”
금세 나른해진 혜주의 몸을 주원이 구석구석 채워나갔다.
세세하게 반응하는 떨림을 입술 안에 가두고, 천천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그녀를 소중히 어루만졌다.
두 팔 안에 갇힌 그녀는 지금껏 주원이 보아온 어떤 세상보다 아름다웠다. 눈을 감은 채 숨을 헐떡이는 그녀를 향해 주원은 못다 한 고백을 속삭였다.
진짜 내 대답은, 혜주야.
네가 이미 내 전부라서 그런 거야.
내 안이 너로 가득 차서,
내가 이미 너라서,
강주원의 전부가 되어버린 오혜주를 사랑한다.
나를 사랑하는 딱 그만큼 너를 사랑해.
낯간지러운 말 대신 파도처럼 드나드는 몸짓이 열과 성을 다해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밤보다 사랑이 먼저 깊었다.
서로를 향해 나아가는 미로에 갇혀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