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 가자, 우리 병아리 (77/121)


#77. 가자, 우리 병아리
2023.02.23.


주원의 본가가 발칵 뒤집혔다.

십 년이나 주원을 괴롭힌 악몽이 도 씨의 흉계였음을 알게 된 필연과 우연은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 속옷에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새겼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내 집에서 벌어지다니……!”

우연은 부들부들 떨다가 잠깐 실신하기도 했다.

십 년 동안 물심양면으로 도 씨를 챙긴 그녀였기에 배신감은 더 컸다. 도 씨는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집에 들이는 법이 없는 우연이 처음으로 집에 들인 ‘낯선 사람’이었다.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 떠돌게 되었다는 그녀를 외면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아무리 억울해도 그런 식으로 분풀이를 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젊디젊은 아이의 죽음이 안타까워 나로서도 최선을 다했다. 장례도 치러주었고 49재까지 챙겼어! 장례식 땐 정작 코빼기도 안 비추더니 이제 와서 복수를 해? 대체 네가 뭘 잘못했기에?”

우연은 그녀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

더 화가 나는 건 도 씨가 이미 떠나고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들을 십 년이나 괴롭힌 원수에게 꼬박꼬박 인센티브 챙겨가며, 명절 선물까지 쥐여 주었다. 눈앞에 있으면 당장 찬물을 끼얹고 싶을 정도로 치가 떨리는데 화풀이할 대상조차 눈앞에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안 되겠어. 당장 경찰에 신고부터 하자.”

우연은 그 길로 경찰에 전화를 넣었다.

죽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꼬아 만든 실로 속옷에 저주를 새겼고, 그로 말미암아 악몽에 시달렸다는 얘기에 경찰은 처음엔 코웃음만 쳤다.

필연이 경찰총장으로 있는 친구를 만나고 온 후에야 사건이 정식으로 접수되었는데, 과연 무슨 죄목으로 도 씨를 처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우연은 서랍에 들어있는 주원의 속옷을 모조리 불태웠다. 그것도 모자라 집에 남아 있는 도 씨의 물건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활활 태웠다.

나풀나풀 재로 흩어지는 옷가지를 보며 우연은 가슴을 치며 울었다.


‘내 아들에게 칼을 겨눌지도 모르고 악마를 내 집에 들였구나. 내가 죄인이다. 죄인이야…….’

그러나 주원의 앞에서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가뜩이나 죄책감에 시달리던 주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며칠 후 주말.

혜주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단장하고 집을 나섰다.

원룸 앞에는 어울리지 않게 번쩍번쩍한 외제차가 서 있었다. 좁은 골목에서 단연 눈에 띄는 비주얼이었다.


‘와…….’

더 시선을 끄는 것은 차 앞에 서 있는 주원이었다.

그는 평소 와이셔츠를 즐겨 입는 것과 다르게 오늘은 캐주얼한 복장이었다. 탄탄한 근육을 적당히 드러내는 베이지색 티셔츠에 화이트 슬랙스를 입었는데 멀리서 봐도 훈남 분위기가 좔좔 흘렀다.

살짝 고개를 기울여 손목시계를 바라보는 모습이 화보 같았다.


‘잘생겨도 어지간히 잘생겼어야 말이지.’

봐도 봐도 놀라운 비주얼엔 도통 적응이 안 돼서 가슴이 쿵쿵 뛰었다.


“오빠, 일찍 왔네요.”

수줍게 다가선 혜주를 그가 힐끗 쳐다보았다.


“오늘은 병아리네.”

자잘한 들꽃 패턴이 들어간 노란 원피스를 입은 그녀를 보고 주원이 픽 웃었다.


“소풍 가냐?”

혜주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아침부터 옷 고른다고 설친 걸 들킨 것 같아서.


“놀러 가는 거 아닌 거 알아요. 그래도 기왕 나가는 길에 기분 내면 좋죠.”

“그럴 줄 알고 김밥은 내가 싸 왔어.”

헐, 대박. 이 오빠 센스 보소.


“기중기도 아니고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스킬이 수준급이네요.”

쇼핑백을 들어 보이는 주원을 보고 혜주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주원은 그런 혜주를 보고 싱긋 웃었다.


“예쁘다, 혜주야.”

“어머.”

혜주는 발그레한 뺨을 감싸며 주원의 가슴을 콩 때렸다. 아름드리나무처럼 탄탄한 근육의 반탄력에 다시 한번 귓불이 물든다.


“가자, 우리 병아리.”

주원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은 도 씨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신당을 찾아가는 날이었다.

경찰에 신고를 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사안이 해괴하다 보니 경찰에서도 집중력 있게 수사를 하지는 않는 듯했다.

주원이 몇 번이나 피해자 진술을 하고, 혜주가 신당에서 녹음한 녹음 파일을 증거로 제출했음에도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무당 최귀녀와 도 씨가 잠적했다는 말만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탓에 두 사람은 직접 신당에 가보기로 했다.


“도 씨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글쎄. 자기가 한 짓이 발각이 되었으니 어디든 숨었겠지. 본가에 취직할 때 제출한 서류에 적힌 주소지엔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어.”

“경찰에 잡히면 무슨 벌을 받게 될까요? 따지고 보면 직접적으로 해를 가한 건 없잖아요. 주술이나 저주로 사람에게 해코지를 한 것도 처벌이 되나? 그런 규정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경찰도 그게 곤혹스러운 모양이더라. 무속 행위로 사람에게 해를 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사실이니까.”

두 사람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양평으로 향했다.

가을에 접어든 숲길은 온갖 색색의 옷을 갈아입은 나무가 지천이었다. 붉게 물든 단풍부터 요정 부채처럼 귀여운 은행잎까지, 창문을 살짝 열어 숨을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렸다.

지난번에 혜주가 차를 세워두었던 자리에 주차를 하고 두 사람은 신당을 들어섰다.

끼이익. 닫혀 있던 대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허둥지둥 내뺐는지 집 안은 엉망이었다. 커다란 가마솥에 눌어붙은 밥알은 열흘은 지난 듯 곰팡이가 슬어 있었고 빨래도 그대로였다.


“어디 단서가 될 만한 게 있나 찾아봐요.”

“응.”

사실 무속 행위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당 최귀녀와 도우미 도 씨가 살인을 공모했더라도 그것이 주원에게 직접적, 물리적으로 해를 가한 게 아닌 이상 증거가 있어도 무죄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일례로 혜주가 집어 든 흙 한 움큼에 섞여 있던 혜림의 머리카락만 해도 그랬다. 그것으로 도 씨의 범죄 목적은 추정할 수 있지만 그 머리카락이 주원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증거로 쓰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곳을 찾은 건 잠적한 도 씨를 찾아낼 어떠한 실마리라도 발견하고 싶어서였다. 죄를 물을 수 있을지 여부는 차치하고 그저 묻고 싶었다.

본심을 숨기고 본가에 머무른 십 년 동안 가족처럼 잘 대해주는 우연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냐고.

악몽으로 고통받는 내 모습을 보며 조금은 편안해졌냐고.


“응?”

안채를 뒤지던 혜주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뭐 발견했어?”

“여기 사진이 있어요. 먼지가 쌓여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혹시 물티슈 있어요?”

부엌 쪽을 살펴보고 있던 주원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다가갔다.

혜주의 손에 들린 건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낡은 액자였다.

뒤집힌 채 장롱 위에 놓여 있는 걸 용케 찾아냈다.


“이 사람이 그 무당인가?”

“네. 젊을 때 사진이긴 한데 맞는 거 같아요. 가족사진인가 보네요.”

고개를 끄덕이던 혜주의 눈매가 흠칫 굳었다.


“!!!”

“왜 그래?”

주원은 너무 놀라 숨을 멈춘 혜주에게 다가섰다.


“이거…….”

혜주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 속 소녀를 가리켰다.


“다희 아니에요?”

“여기서 천다희가 왜 나와.”

“잘 봐봐요.”

주원은 눈매를 좁히며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양갈래 머리. 커다란 눈망울을 한 소녀의 얼굴이 낯이 익다. 지금과 이목구비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 속 여자아이는 다희가 맞았다.


 

*

다희의 엄마가 무당이라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런 일로 그녀와 얽히게 될 줄은 몰랐다.

적잖이 당황한 혜주는 한동안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다희 엄마가 무당이라고 했어요. 남에게 알려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해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아마 승원이도 모를걸요.”

혜주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떠벌리고 싶지 않았던 다희의 가정사를 털어놓게 되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오빠를 십 년이나 괴롭힌 악몽이 다희 엄마와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잡아야지.”

“다희 엄마라도요?”

“내 장모님 될 사람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역시 강주원은 냉철했다.

그래도 알고 지내던 사이니 아량을 베풀어줄 만도 한데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했다.

그가 단호하게 말하니 혜주 역시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다희한테 한번 물어볼까요?”

“너희 엄마 어디 있냐고 묻게? 다짜고짜 캐물으면 오히려 더 깊이 숨어버릴 거야. 작전을 짜야지.”

그리하여 강주원과 오혜주, 두 명의 연합작전이 시작되었다.

도망간 무당을 잡기 위한 일명 ‘전화번호부 탈취’ 작전이었다.

*

이튿날, 사업팀 회의가 끝난 후 혜주는 회의실을 나서려는 다희에게 말을 걸었다.


“나 휴대폰 좀 빌려줄래? 내 휴대폰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어. 네 폰으로 전화 좀 걸어보게.”

노트북을 챙겨 막 나가려던 다희가 샐쭉한 눈으로 혜주를 훑어보았다. 몇 주간 말도 안 걸더니 필요할 때 되니까 말을 거네? 딱 그런 눈빛이었다.


“백만 년 만에 말 걸어놓고 용건이 고작 그거야? 너 이제 나랑 친구 안 한다면서. 애인 놔뒀다 뭐해? 대표실 문만 열고 들어가면 되는데 강주원한테 빌려.”

“네가 여기 있는데 대표실까지 왔다 갔다 할 필요 없잖아. 전화 한 번만 걸어보고 돌려줄게. 부탁해.”

“싫어. 요새 루비 씨랑 친해 보이던데 그쪽에 한번 얘기해보지 그러니?”

예상보다 단호한 거절에 혜주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아, 천다희 호락호락하지 않네. 휴대폰 빌려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혜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번 작전은 주원의 머리에서 나와 혜주의 실행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노리는 것은 정확히 ‘귀녀의 폰번호’였다.

경찰에서는 내부시스템에 등록된 귀녀의 정보는 주민등록번호밖에 없다고 했다.

숲속에 칩거해 십 년을 넘게 살아온 그녀는 계좌도, 그 흔한 휴대폰 번호도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자주는 아니지만 다희가 엄마랑 통화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휴대폰이 없으면 그 깊은 산중에서 어떻게 전화를 걸 수 있었겠어요? 아까 그 집에서 집 전화 못 봤죠?

-그런 거 없었어.

주원은 귀녀가 차명 번호를 쓰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의 번호를 알아내 경찰에게 넘기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경찰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다희에게서 귀녀의 번호를 알아내는 건 혜주가 담당하기로 했다. 눈치 빠른 다희를 속여넘겨야 했기에 책임이 막중했다.


“휴대폰 잠깐 빌려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말할 시간에 빌려줬겠다!”

“그러니까 내가 뭐하러 그러냐고. 너 나랑 친구 아니잖아?”

“꼭 친구 사이에만 빌려주는 거야? 와, 되게 치사하네.”

“치사한 게 아니라 꼼꼼한 거지. 내가 널 뭘 믿고 빌려줘?”

“너 뭐 찔리는 거 있어? 너 아직도 휴대폰으로 야동 보니?”

“야동은 무슨! 나 그런 거 안 보거든?”

“개가 똥을 끊지. 얼굴 빨개진 거 봐. 있네, 있어.”

“없다고 했잖아! 자! 확인해보든가!”

다희가 씩씩거리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혜주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천다희, 야동에 약한 건 여전하네.’

과거 다희는 혼밥하며 야동을 보다가 깜짝 방문한 승원과 혜주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그 후 ‘야동’은 그녀의 발작 버튼이 되었다.


“금방 쓰고 줄게.”

속으로 쾌재를 부른 혜주가 다희의 휴대폰을 냉큼 받아들었다.

그러곤 자기 폰에 전화를 걸어놓고 재빨리 다희의 연락처를 뒤졌다.

[엄마] 없고.

[어머니] 없고.

[마미] 없고.


‘……최귀녀도 아니네?’

생각해둔 갖가지 검색어를 입력해봐도 나오는 게 없자 식은땀이 흘렀다.

왜지? 대체 왜?

째깍째깍 시간이 갔다.


‘빨리 찾아야 하는데!’

다희의 날카로운 시선에 몹시 초조해진 혜주는 하는 수 없이 연락처 목록을 통째로 훑기 시작했다.

수능 볼 때도 발휘되지 않던 집중력이 최고도로 올라갔다.


“회의실에서 진동 안 들리잖아! 여기 없는 것 같은데 내 폰 돌려줘.”

“잠시만. 어디서 소리 들리는 거 같아.”

“하나도 안 들리거든? 얼른 안 내놔?”

인내심이 바닥난 다희가 짜증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꿀꺽.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냥 휴대폰 가지고 냅다 튀어버릴까?’

휴대폰을 쥔 손아귀에 힘이 꽉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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