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발닦개도 되고 세바스찬도 되고 도비도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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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발닦개도 되고 세바스찬도 되고 도비도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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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발닦개도 되고 세바스찬도 되고 도비도 될 거야
2023.02.26.
발바닥에 모터 장착하고 몸을 딱 돌리는 순간 달칵, 회의실 문이 열렸다.
‘으악!’
막 내빼려던 혜주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눈앞에 나타난 건 주원이었다. 태연한 표정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가 혜주를 향해 눈짓했다.
‘어떻게 됐어?’
‘망했어요.’
혜주가 절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주원의 표정이 와락 구겨진 건 그때였다.
“천다희 씨, 큰일 났습니다. 지금 승원이가……!”
임무에 실패했단 소리에 인상부터 쓰기에 구박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웬 강승원?
“승원이가 왜요? 승원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
“승원이가 사무실에서 사라졌습니다!”
“네? 승원이가 왜요?”
얼떨떨하던 혜주는 이내 그것이 강주원식 임기응변이란 걸 깨달았다.
와, 식은땀까지 흘리네. 저 연기력 무엇?
“무슨 일인데요, 네?”
깜빡 넘어간 다희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주원은 한술 더 떠서 눈시울을 붉히기까지 했다.
“아침부터 평소와 다르긴 했습니다.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도 했고 해서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뭐라셨는데요?”
“여기서 얘기하기엔 좀 복잡합니다. 저도 확실한 건 모르겠어요. 일단 가보죠.”
“네, 네. 얼른 가요.”
승원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다희가 사색이 되어 따라갔다.
혜주에게 맡긴 휴대폰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다.
*
“승원아!”
어이없게도 다희는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승원을 발견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휘적휘적 사무실로 걸어오는 모습에 다희가 울상이 되어 뛰어갔다.
“너 어디 갔었어!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어? 왜?”
승원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영문 모르는 표정이었으나 걱정이 한가득인 다희의 눈엔 기운이 쭉 빠진 쭉정이로만 보였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무단결근한 일도 있고, 최근 들어 무기력한 모습을 자주 보여줬으니 그녀가 속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뭐야? 얘 왜 이래?’
승원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원을 쳐다보았다. 주원은 한술 더 떴다.
“잘 돌아왔다.”
덥석.
그가 멀뚱히 서 있는 승원의 어깨를 껴안았다. 승원은 그만 소름이 돋아버렸다.
“뭐야. 형까지 왜 이래. 나 어디 갔었어?”
“아침에 엄마한테 연락받았어. 너 또 잠수 타려고 했다면서. 힘들면 형한테 얘기를 하지, 인마.”
“나 오늘 엄마랑 통화한 적 없…….”
탁. 탁.
주원이 찰지게 등을 두드리는 소리에 승원의 말소리가 묻혔다. 주원은 승원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로 나직이 협박했다.
“대답 똑바로 해라.”
왜들 이래? 대체 무슨 대답을 똑바로 하라는 거야?
승원은 당장 되묻고 싶었으나 형형하게 눈을 부라리는 주원을 보곤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느꼈지만 피가 섞인 사이에 돈을 털거나 장기를 빼가진 않겠지.
“승원아, 너 괜찮은 거야? 진짜 어디 있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다희가 울먹이며 물었다. 승원은 주원을 힐끗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 옥상에?”
“옥상엔 왜 간 거야!”
“어…… 담배 피우러?”
“너 담배 끊었잖아. 대체 얼마나 힘들면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워. 옥상에서 대체 뭐 하려고 했던 거야. 설마 아니지? 흐윽!”
이미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기 시작한 다희의 귀엔 승원의 모든 대답이 절망처럼 들려왔다.
다희는 회사라는 것도 잊고 승원을 붙잡고 울었다.
“그렇게 힘들 땐 나한테 연락해도 됐었잖아. 회사 그만두지 마, 승원아…… 응?”
“어…… 뭐, 알았어.”
“진짜지?”
“어.”
때아닌 신파극에 주원은 속이 거북해졌다.
‘자길 매몰차게 차버린 남자 뭐가 좋다고 저렇게 매달리는지, 원.’
혀를 쯧쯧 차며 휴대폰을 보니 혜주에게서 메시지가 와있었다.
-임무 완료!
드디어 해냈군.
주원은 승원의 어깨를 건성건성 두드려주고 돌아섰다.
“수고해라.”
“뭐야. 이 깽판을 쳐놓고 그냥 가는 거야?”
“멀쩡한 거 확인했으면 됐어. 상황 정리하고 복귀해.”
“아니, 형!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형! 형!”
난처한 승원이 주원을 부르짖었다. 주원은 씩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짜식, 간만에 쓸 만했다.
*
혜주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다희의 휴대폰을 뒤졌다.
다행히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다희라 저장된 번호는 백 개 남짓이었다.
“가족 폴더도 아니고…… 동창도 아니고 직장도 아니고.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설마 번호 저장도 안 해놓은 걸까.
불안함이 슬슬 올라올 때쯤 어디에도 분류되지 않은 번호 하나가 들어왔다.
[양평]
이거다!
혜주는 양평이라 저장된 그 번호가 귀녀의 것임을 확신했다.
바로 어제 주원과 함께 갔던 신당이 양평에 있었으니 틀림없었다. 혜주는 얼른 번호를 메모장에 적어놓고 주원에게 메시지를 전송했다.
-임무 완료!
잠시 후 다희가 회의실로 돌아왔다. 눈가가 벌게진 그녀를 보니 양심이 쿡쿡 찔렸다.
“왜 울었어? 승원이한테 무슨 일 있어?”
“너하곤 상관없잖아!”
다희는 홱 낚아채듯 혜주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갔다.
“걱정해줘도 난리야.”
혜주는 혼잣말을 하며 다희가 나간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후엔 속전속결이었다.
전화번호를 확보한 경찰은 금세 귀녀를 찾아냈다.
고향인 순천에 숨어 있던 그녀는 발각될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순순히 경찰에게 잡혔다.
불구속 수사가 결정되어 조사가 끝나면 귀가 조치를 한다는 말에 혜주는 분통을 터트렸다.
‘사람을 죽이려고 했는데 이대로 풀려난다고?’
아직 도 씨의 흔적은 찾지도 못한 상태였다.
행여 두 사람이 다시 공모해 주원에게 해코지를 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혜주는 불안하기만 했다.
*
귀녀가 잡히고 이틀이 흘렀다.
주말이라 주원과 커피숍 데이트 중이던 혜주는 거의 다 마신 라떼 얼음으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혼자 있으니 심심하네. 빨리 오지.”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주원이 경찰과 통화를 한다고 나갔다. 옆에 앉아 손을 쪼물딱거리던 사람이 사라지니 옆구리가 허전했다.
언제부터인가 그와 함께 있는 게 일상이 되었다. 회사에서도, 퇴근 후에도, 주말에도 늘 함께 있으니 혼자 남겨진 시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매일 보면 질릴 법도 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은 건 왜인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연애를 하는 기분이었다.
“하긴, 저 얼굴에 질리면 눈 반납해야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주원을 바라보며 혜주가 생긋 웃었다.
아이보리색 티셔츠에 청바지. 흰 운동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의상이 그가 걸치면 화보가 되었다.
문을 가볍게 열고 습관처럼 고개를 숙여 들어오는 일련의 모습에서 아우라가 철철 넘쳤다.
딸랑, 문틀에 달린 방울이 울림과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홱 돌아가는 건 이미 익숙했다. 문제는 그 시선이 나에게까지 쭉 따라온다는 거지.
‘나 또 매니저로 보이려나?’
각별히 힘주고 나왔는데 괜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혜주는 멀쩡한 매무새를 다시 한번 점검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됐어요?”
“조사가 대충 끝난 모양이야.”
경찰과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주원이 머리를 쓸어올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경찰이 추궁하니 오히려 저주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게 가능한 일이냐며 발뺌을 했다더군.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 사건이라 경찰도 곤혹스러운가 봐. 참 우습지.”
“그럼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풀려나는 거예요?”
“좀 두고 봐야겠지만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처음 신고할 때부터 경찰의 반응은 꽤 미온적이었다. ‘저주’라는 수단 자체가 형법상 인정되는 개념이 아니기에 사실상 처벌 규정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만약 피해자에게 금전을 갈취했다거나 기망을 했다면 사기죄로 처벌은 가능하다는데 주원이 귀녀에게 돈을 뜯긴 것도 아니었고.
“그랬군요.”
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얼굴이 왜 우거지상이야?”
주원이 혜주의 두 뺨을 딱 들어 올렸다.
하여간 이 남자 눈치하고는.
혜주는 곱게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기분이 좀 꿀꿀해서요.”
“왜?”
“다희가 결근했어요.”
이틀 전, 귀녀가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사무실을 뛰쳐나간 다희는 금요일까지 출근하지 않았다.
무단결근이었다.
주원을 해코지하려 한 건 괘씸하지만 친구의 엄마를 제 손으로 경찰에 넘기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좋았을걸.’
안도가 되면서도 불편하고, 미우면서도 미안하고, 시시때때로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굉장히 양가적인 감정이었다.
“다희랑 나, 그래도 한때는 가족보다 더 자주 본 사이잖아요. 나쁜 짓을 했다곤 해도 다희의 엄마를 내 손으로 경찰에 넘긴 것 같아 조금 씁쓸해요.”
“착한 것도 그 정도면 병이다. 쓸데없이 자책하지 마.”
신랄한 핀잔에 혜주의 볼이 불룩 나왔다.
“그래도 옛정이란 게 있잖아요. 오빠 같으면 아무렇지 않겠어요?”
“응,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데. 너희 둘 친구도 뭣도 아니잖아.”
단호박도 이런 단호박이 따로 없다.
강주원 냉정한 거야 익히 알고 있지만 이 정도면 공감 능력 결여 아니야?
“나랑 헤어져도 그렇게 칼같이 굴 거예요? 아, 지나간 인연이니 얘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그럴 거냐고요.”
“어.”
“헐?”
“사귀는 동안엔 네 발닦개도 되고 세바스찬도 되고 도비도 될 거야. 끝나면 얄짤 없어.”
기분이 좋아야 하나, 나빠야 하나.
사귀는 동안 발닦개 해준다니 좋기는 한데 끝나면 얄짤 없다니 서운하기도 하다.
보통 이럴 땐 ‘헤어져도 너에게만은 다정하게 대해줄게’가 국룰 아닌가.
“왜 내가 찰 거라고 생각해요? 오빠가 변심할 수도 있잖아요.”
혜주가 투정 부리듯 말했다. 주원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뚫어져라 혜주를 바라보았다.
“살아생전 내가 널 찰 일은 없어. 만약 우리가 헤어진다면 네가 나를 찬 거야. 난 나를 찬 여자한테 신경 쓸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와…… 진짜 냉정하네. 하긴, 가끔 보면 차일 짓을 하긴 하더라고요. 방금도 좀 정 털린 거 알아요?”
“하지만 만회도 제법 잘하지.”
드르륵. 그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쇼핑 가자.”
커피 마시다가 갑자기 웬 쇼핑?
혜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분 꿀꿀할 땐 돈 쓰는 게 최고야.”
주원이 지갑을 꺼내 툭 두드렸다.
“돈을 물 쓰듯이 쓴다는 게 뭔지 경험하게 해줄게. 가자.”
만류할 틈도 없이 쌩하니 커피숍을 나가버리는 그를 혜주가 졸졸 따라나섰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