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 이건 벗어야겠다 (79/121)


#79. 이건 벗어야겠다
2023.03.02.



 
주원이 데려간 곳은 백화점 VVIP를 위한 쇼핑 공간인 퍼스널 숍이었다.

명품관 안쪽에 그런 공간이 있는 것도, VVIP를 위한 퍼스널 쇼퍼가 따로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혜주는 신세계를 접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와, 나름 백화점 자주 와 봤는데 이런 건 처음 봐요. 오빠는 항상 여기서 쇼핑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건 아니고 어머니가.”

“와……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대충 그림이 그려지네요. 엄청 우아하실 것 같아요.”

“돈 쓰는 게 낙인 분이라.”

주원이 간단히 한 말이 묵직하게 목구멍에 걸렸다.

돈 쓰는 게 낙인 삶은 대체 어떤 삶일까.

가난하진 않았지만 근검절약이 몸에 밴 수철과 살다 보니 어느새 짠순이가 된 혜주였다.

테이블이 딱 세 개인 작은 가게에서 국밥을 팔던 수철은 종업원을 여섯 명이나 둔 사장님이 된 후로도 습관처럼 아꼈다. 누구에게 손 벌려가며 살진 않아도 돈을 물 쓰듯 펑펑 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오춘택 그 자식이 내 재산 거덜 내는 데 한몫했지.’

작게 한숨을 내쉰 혜주는 불현듯 강주원의 인생이 조금 부러워졌다.

좋겠다, 돈 많아서.

좋겠다, 잘생겨서.

좋겠다, 머리 좋아서.

그런데……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나잖아!

그토록 완벽한 남자가 기꺼이 발닦개가 되어 주겠다고 말하는 여자가 나, 오혜주다.

어디 한번 누려봐?


“역시 사람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니까.”

“응?”

“아니에요, 아무것도.”

혜주는 배시시 웃으며 주원에게 팔짱을 꼈다.


“오늘 오빠가 사는 거죠?”

“이런 데서 너한테 사라고 하면 양아치지.”

“앗싸, 그럼 저 진짜 사고 싶은 거 골라요?”

“가격표 보지 말고 골라라.”

강주원과 처음 하는 쇼핑인 것도 신나는데 마음껏 사도 된다니 더욱 신이 났다.

여기서 손 떨면 지는 거다.

가격표 절대 보지 말아야지.

드르륵-

쇼퍼 두 명이 기다란 행어를 밀고 들어왔다.


‘오, 드라마에서 본 거랑 똑같아!’

주원이 미리 언질을 준 혜주의 사이즈에 맞게 준비된 옷이 색깔별로 걸려 있었다.

어떤 매장에 두어도 단박에 메인 코너에 걸릴 법한 고급스러운 의상에 혜주의 눈이 돌아갔다.


“강주원 대표님, 안녕하세요? 퍼스널 쇼퍼 안주미입니다.”

“오랜만이네요.”

“네. 몇 해 전에 사모님과 함께 오신 후 처음 뵙는 것 같네요.”

주원은 익숙한 듯 소파에 앉아 쇼퍼와 인사를 나누었다.

잔머리 하나 없이 올백으로 묶은 머리에 붉은 입술.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기가 팍 죽을 것 같은 강한 인상의 쇼퍼와 오랜 지인처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낯설었다.


‘저 사람이 정녕 나랑 한강에서 라면 끓여 먹던 남자가 맞는 것인가.’

혜주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양한 스타일로 보고 싶다고 하셔서 원피스와 블라우스, 스커트와 그에 맞는 액세서리까지 준비해 보았습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의상 개수가 적어 보이는데.”

“급하게 준비하느라 그렇습니다. 하지만 말씀해주신 신체 사이즈와 고객님 이미지를 매치업하여 최대한 잘 어울릴 만한 옷으로 준비했으니 제 안목을 한번 믿어보세요.”

“그러죠.”

주원이 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에서 보는 강주원과 이곳에서 보는 강주원은 사뭇 달랐다. 회사에서는 냉철한 리더의 모습이라면 지금은 돈 무서운 줄 모르는 재벌가 도련님, 딱 느낌이었다.

한쪽 다리를 꼰 모습에서 부티가 좌르르 흘렀다. 그 모습도 나쁘진 않았지만 왠지 위화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객님, 편하게 둘러보시고 말씀해주세요. 피팅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혜주는 황홀한 눈빛으로 행어를 둘러보았다. 원단이며 디자인이며 하나같이 고급스럽다.


‘면장갑이라도 끼고 만져야 하는 거 아니야?’

대충 훑어봐도 눈 돌아가게 예뻐서 혜주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뭐가 제일 예뻐요?”

혜주가 비비드한 색감의 주황색 블라우스를 몸에 대며 물었다. 주원은 팔짱을 낀 채 대꾸했다.


“아무것도 안 입은 오혜주.”

“어머, 미쳤나 봐!”

혜주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주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직원들은 듣지 못한 듯했다.

주원은 곁눈질로 대충 몇 개의 옷을 골라주었다.


“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 입어 봐.”

어차피 뭘 입어도 예쁠 텐데 공들여 고를 필요가 있나.

그러나 혜주는 성의 없는 그의 태도에 입이 뾰로통해졌다.


“입고 나올게요.”

피팅룸은 신부대기실을 방불케 할 정도로 넓었다. 사람 다섯이 나란히 서도 남을 법한 커다란 전면 거울을 중심으로 양쪽에 흰색 레이스 커튼이 내려와 있고, 선반에는 조그마한 화병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의상에 어울리는 슈즈를 피팅할 수 있게 열 개도 넘는 구두가 쪼르르 줄지어 진열돼 있었는데 하나같이 새것처럼 번쩍거렸다.

혜주는 주원이 골라준 옷 중에서 노란색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딱 떨어지는 핏의 트위드 원피스였다. 스퀘어 넥에 민소매, 허리에는 금장 벨트를 매치해 깔끔하면서도 페니민한 느낌이었다.


“카디건이랑 입으면 회사에도 입고 갈 수 있겠는데? 아니다…… 조금 짧나?”

혜주는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치마 길이를 살폈다.

이제 피팅할 구두를 고를 차례였다.

나란히 놓인 다양한 스타일의 구두 중 혜주가 고른 것은 하얀색 가죽에 금장으로 띠가 들어간 메리제인 구두였다.

거울을 보며 신발을 꿰는 순간이었다.

찌이익.

구두 코에 장식된 금장에 발바닥이 살짝 스치는가 싶더니 스타킹 올이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혜주는 화들짝 놀라 발뒤꿈치를 보았다.


“헉.”

아니나 다를까, 뾰족한 금장 부분에 걸린 발뒤꿈치에 올이 나가 있었다. 엉겁결에 신발을 벗다가 다시 한번 찌익.

발뒤꿈치부터 종아리 중앙까지 길게 이어진 고랑에 혜주의 미간이 옴폭 파였다.


“망했다. 스타킹 이거 하나밖에 없는데!”

하필이면 피팅한 옷이 무릎 위로 겅중 올라간 미니스커트다. 이대로 나가기엔 창피하고 맨다리로 나가긴 부끄럽고.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한 혜주가 문을 빼꼼 열었다.


“저기요.”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근처에 있는 직원에게 여분의 스타킹이 있나 살짝 물어보려 했던 혜주는 주원과 딱 눈이 마주치자 난감해졌다.


“왜?”

“스타킹에 올이 나갔어요. 이대로 나가기엔 좀 창피한데 그냥 다른 옷 입어 볼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원이 직원에게 손짓하자 안주미 쇼퍼가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주원은 그녀에게 물 한잔 요청하듯 담담하게 물었다.


“혹시 스타킹도 준비되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대표님. 아까 고객님께서 착용하신 것과 동일한 색상으로 드릴까요?”

“그럽시다.”

잠시 후 안주미 쇼퍼가 새 스타킹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의 대단한 눈썰미는 찰나에 보았던 혜주의 스타킹 색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에, 무슨 스타킹이 저렇게 으리번쩍해?’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보고 있던 혜주는 명품 마크가 떡하니 찍혀 있는 상자에 기가 질렸다.

보통 스타킹이라 하면 묶음 아니면 비닐 포장이 정석 아니냐고.


‘팔자에도 없는 명품 스타킹을 신어보게 생겼네.’

혜주는 그제야 몹시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툭툭 상자를 벗겨낸 주원이 안주미 쇼퍼에게 말했다.


“잠시 나가주시죠.”

아니, 왜? 갑자기 직원을 왜 내보내는 건데?

혜주의 눈알이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럼 필요할 때 부르십시오.”

안주미 쇼퍼가 군말 없이 허리를 숙이고 나간 뒤 탁, 문이 닫혔다.

타박타박. 주원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혜주는 저도 모르게 한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잠시 들어갈게.”

허락을 하지도 않았는데 문이 열렸다. 혜주는 꿈뻑꿈뻑 눈을 깜빡였다.


“어…… 갖다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너 왜 안 나가니.


“앉아봐.”

주원이 거울 앞에 놓인 동그란 의자를 툭툭 두드렸다.

스타킹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던 혜주는 뻘쭘하게 손을 감추며 주춤주춤 다가섰다.


“그것만 주고 나가면 되는데 왜 들어와요?”

“주러 왔잖아.”

주원이 혜주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신겨주러.”

그의 입술에 진한 미소가 번졌다. 엉겁결에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혜주의 눈이 혼란해졌다.

저 오빠 애초부터 스타킹만 주고 나갈 생각이 아니었어! 이 앙큼한 남자 같으니라고.


“내가 신을게요!”

“딱 보기에도 타이트해 보이는데 옷도 찢어먹으려고?”

주원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혜주의 발목을 잡았다.

그의 말마따나 피팅한 옷이 꽤 타이트했다. 스타킹을 벗는다고 몸을 숙이는 순간 등 쪽의 지퍼가 툭 터질 것 같은 불안감에 혜주는 움직임을 멈췄다.


“발 줘.”

주원이 눈을 들어 올려 혜주를 바라보았다.


“아뇨, 내가……!”

애석하게도 작은 저항은 우람한 손에 가로막혔다. 주원은 혜주의 발목을 잡은 채 입으로 새 스타킹의 비닐을 벗겼다.

그러곤 신발을 신지 않은 그녀의 발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구멍이 크게 났네.”

기다란 손가락이 발목 뒤 올이 나간 부분을 어루만졌다. 손이 닿은 부분은 아주 조금인데 온몸에 찌릿하게 전기가 올랐다.

혜주는 귓불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주원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건 벗어야겠다.”

주원의 손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발목에서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날씬하게 뻗은 종아리를 따라 느릿하게 이동한 손가락에 스타킹의 끝이 걸렸다. 돌돌 말려 쭉 딸려 내려오는 스타킹 아래로 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머리 위에 환하게 켜진 전등 때문에 더욱 아찔하게 느껴지는 새하얀 피부는 당장이라도 치아를 박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힘이 잔뜩 들어간 허벅지가 타는 듯 뜨거워졌다.


“입는 건 내가 할게요.”

“좋을 대로.”

얼굴이 붉어진 혜주가 얼른 주원의 손에서 스타킹을 건네받았다.

치마 아래로 살짝 스친 허벅지의 마찰음에 주원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이대로 어떻게 해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었다. 벌건 대낮인 것도, 백화점이란 것도 아는데 머릿속엔 난잡한 장면만 떠올랐다.

뒹굴고, 빨고 싶었다.

주원은 거울 앞 선반에 걸터앉은 채 혀로 붉은 입술을 축였다.

그의 목젖이 크게 한 번 움직였다.


“눈 뜨지 마요. 알았죠?”

눈을 감으니 사부작사부작 스타킹 신는 소리가 더욱 잘 들렸다. 뭐가 잘 안되는지 낑낑거리는 모습도, 이쪽을 흘끔거리며 부지런히 스타킹을 올리는 모습도 눈에 훤했다.

미치겠다, 상상돼서.

허리 아래로 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다 됐어요. 이제 나가면 돼…… 흐읍!”

혜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원이 성큼 다가섰다. 키 낮은 의자에 앉은 혜주의 목덜미를 붙잡고 숨을 터트리듯 입술을 베어 물었다.


“너 지금 못 나가, 혜주야.”

 

 
고개가 들린 탓에 자연스레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달아오른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피부의 돌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진하게 얽힌 살결이 축축한 소리를 내며 마찰했다.

콜록, 콜록!

갑작스러운 키스에 혜주가 잔기침을 내뱉었다.

그 기침마저도 모조리 핥아먹은 주원이 혜주의 고개를 들어 올린 채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 그만 집에 갈까, 혜주야.”

붙은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은실이 반짝였다.


“쇼핑 더 길어졌다간 누구 하나 죽겠어.”

그의 숨결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밀착한 몸에서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그를 느끼고 동공이 확장된 혜주의 손목을 그가 묵직하게 잡아끌었다.


“가자.”

아니, 가는 건 좋은데요, 오빠. 그럼 내 옷은요?

돈을 물 쓰듯 하는 거 보여주겠다더니 이거 순 사기꾼이네! 생각한 순간 주원이 문 앞에 공손히 대기 중인 직원에게 말했다.


“구경 끝났습니다. 옷은 집으로 보내주시죠.”

“어떤 걸로 보내드릴까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싹 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