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너 내가 중요해? 스타킹이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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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너 내가 중요해? 스타킹이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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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너 내가 중요해? 스타킹이 중요해?
2023.03.05.
일요일 아침.
주원은 한쪽 팔을 괸 채 곤히 잠든 혜주를 바라보았다.
새벽 내내 괴롭힌 탓인지 정오가 다 되어가는데도 일어나지 못하는 그녀다.
샤워하고, 운동하고, 간단히 커피까지 내려 마신 주원은 심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자는 모습도 왜 이렇게 예쁘냐.”
주원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좋아할 수 있게 만든 건 신의 명백한 실수다.
사랑 때문에 공들여 일군 인생을 포기할 수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명성을 포기할 수도, 심지어 바보천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는 나날이다.
잠든 그녀를 보는 일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일상이 되고, 주말에 함께 있을 때면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이라도 연마하고 싶어진다.
혼자 있는 시간을 누구보다 즐기던 강주원에게 일어난 믿지 못할 변화였다.
“좀 일어나 봐, 혜주야. 나랑 놀자.”
주원이 혜주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었다. 동그란 이마에도, 말간 뺨에도, 살짝 부어 있는 입술에도 자잘한 키스가 눈송이처럼 차곡차곡 떨어진다.
“우웅…….”
혜주가 잠결에 뒤척였다. 파리 날리듯 휘휘 손을 내저은 혜주가 홱 돌아눕자 주원은 못내 서운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줄 알고.’
주원은 혜주의 곁에 누워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따뜻한 호흡이 손바닥으로 번졌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맞닿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더없이 충만하게 주원을 채운다.
혜주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게 깊어질 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 주원은 이번 생에 이렇게 뜨거운 사랑을 하게 될 거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누가 그러던데.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한 사람은 연애를 못 한다고.
그 말이 딱 맞았다. 삶에서 맞부닥치는 수많은 상황에서 그의 기준은 오로지 자신이었다. 유학 시절, 몇 번 썸을 타면서 느낀 건 자신이 연애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뒤돌아서면 다가오는 시험 기간, 잊을 만하면 던져지는 과제들.
풋풋한 감정은 우선순위에 밀려 어느새 사라지고 강주원의 미래는 차곡차곡 적립되었다. 첫사랑이던 혜림을 수능 준비한답시고 매몰차게 차버린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나 혜주는 달랐다.
그녀가 위험에 처한 걸 직감하고 연회장에서 뛰쳐나와 비행기를 잡는 제 모습은 다시 생각해도 미친놈이었다.
그 중요한 포럼을 내팽개치고 혜주에게 내달리다니.
상황을 되돌려도 선택은 달라지지 않을 거란 걸 깨달은 후에야 주원은 확신했다.
오혜주는 강주원이 모든 걸 걸고 사랑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자였다.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이제 오혜주만 있으면 되는데.’
사랑의 깊이가 만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으니 자꾸 욕심이 난다. 그녀와 함께 눈을 뜨는 아침이 매일이면 좋겠다.
24시간 붙어 있을 수는 없겠지만, 오롯이 혼자이던 시간 안에 그녀를 들이고 싶다.
“널 어떻게 데려올까, 혜주야.”
주원은 잠든 혜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 전 결혼하잔 소리에 학을 떼던 그녀가 떠오른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결혼이냐며 어찌나 구박을 하던지, 서운해서 진짜로 울 뻔했다.
마음 같아서는 삼보일배라도 하면서 조르고 싶다. 없어 보이는 건 괜찮은데 너무 막 나가면 도망갈까 봐 그렇지.
“우음…….”
“일어났어?”
아랫배를 지분거리는 주원의 기척에 혜주가 뒤척였다.
“응, 잘 잤어요?”
“나야 오혜주만 있으면 잘 자지.”
쪽쪽. 주원이 사정없이 얼굴에 키스 질을 했다.
혜주는 자다 깨서 부스스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침부터 뭐예요. 오빠가 이렇게 뽀뽀 좋아하는 남자인 줄 꿈에도 몰랐네.”
“나 원래 스킨십에 인색한 남자야. 너니까 하는 거지.”
고막이 녹아내릴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에 혜주는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지었다.
제 앞에서만 보여주는 의외의 모습이 볼 때마다 새롭다. 회사에서 날카롭게 서 있던 칼 각이 그녀 앞에서만 무뎌지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다.
이렇게 멍뭉이 같은 모습을 보고 누가 ‘칼주원’이라고 하겠어.
주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사랑스럽게 뺨을 비비던 혜주의 눈동자가 문득 경악으로 물들었다.
“으악, 내 스타킹!”
그녀의 시선이 닿은 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스타킹이었다.
무려 70만원 짜리 명품 스타킹!
주원 몰래 영수증 확인하다가 손이 떨려 영수증까지 떨어뜨리게 만든 바로 그 스타킹이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집에 오자마자 며칠 굶은 사람처럼 그렇게 달려들더니 결국 이 사달을 내고!”
혜주가 주원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문 앞에서부터 키스하면서 들어오느라 벗은 건지 찢은 건지도 몰랐는데 지금 보니 아주 작살을 내놨다.
“너 내가 중요해? 스타킹이 중요해?”
“오빠가 더 중요해도 스타킹을 찢는 건 안 되죠. 저게 얼마짜린데!”
혜주가 거의 영정사진 대하듯 스타킹을 품에 안고 흐느꼈다.
저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주원이 성의 없이 어깨를 두드렸다.
“별것도 아닌 거에 스트레스받지 마. 건강에 안 좋아.”
선우연 여사가 그랬다.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세상에서 제일 풀기 쉬운 문제라고.
건강, 사랑, 우정, 성취 등등 돈으로 해결 못 하는 문제가 얼마나 많은데, 그깟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면 오히려 다행인 거라고.
하지만 혜주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별것도 아닌 게 아니거든요? 저 스타킹 지금까지 내가 산 어떤 옷보다도 비싼 거라고요. 내가 뭐 그런 거 신경 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명품 로고 찍힌 스타킹 신어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우리 혜주 저 스타킹이 엄청 마음에 들었구나. 지금 당장 백화점 가자. 박스째 사줄게.”
“그건 너무 낭비잖아요! 오빠 같은 사람이 돈을 팍팍 써줘야 경제가 돌아간다는 건 알겠는데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반대편에서는 굶어 죽는 애들이 있다고요.”
“내 애 아니잖아.”
……와, 놀라울 만큼 이기적인 남자 같으니라고.
혜주는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렸다.
저 남자 믿고 가도 되는 거야, 진짜?
“농담이야, 바보야.”
주원이 픽 웃으며 혜주의 정수리를 흐트러뜨렸다.
“날 뭘로 보고.”
선우연 여사의 가르침 덕에 기부가 몸에 밴 그였다. 우연은 주식투자를 가르치기 전에 봉사와 기부를 먼저 가르쳤다.
해외 결연을 맺어 정기 후원까지 하는 남자란 말이다, 내가.
잔뜩 생색내고 싶은 걸 꾹 참은 주원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커피 마실래?”
스르르 떨어진 이불 아래로 조각 같은 몸매가 드러났다.
통창에 드리운 블라인드 사이로 은은하게 들어오는 햇빛에 버무려져 근육의 굴곡이 더욱 도드라졌다.
거울에 비친 완벽한 모습을 확인한 주원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너도 감탄하겠지?
“힝, 아까워…….”
그러나 혜주는 주원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찢어진 스타킹을 든 채 울상을 짓고 있는 그녀를 흘끔거리며 주원이 다시 말을 붙였다.
“아메리카노?”
여기 좀 보라고, 혜주야. 나 지금 되게 멋지다고.
“뜨거운 걸로 줄까?”
대답은 안 해도 되니까 고개만 좀 돌려볼래? 나 지금 되게 펌핑된 상태라고.
“아무거나 주세요.”
……혜주는 끝내 시선을 주지 않았다.
오혜주, 하여간 어려운 여자.
주원은 아쉬움에 주섬주섬 옷을 주워입었다.
하얗게 불태우려던 아침은 물 건너간 것 같다, 젠장.
*
다희가 귀녀가 경찰에 잡힌 걸 알게 된 건 그 일이 있고 이틀이 지난 후였다.
도무지 진전이 없는 승원과의 관계에 답답함을 느낀 그녀가 직접 신당을 찾아갔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마침 경찰 조사를 끝내고 양평으로 돌아온 귀녀는 그간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얘기해 주었다.
십 년 전 혜림의 엄마가 찾아온 얘기, 그녀의 절실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 그녀가 앙심을 품은 대상이 강주원이라는 것까지.
“그 남자 이름이 강주원이라고?”
기절할 것처럼 놀란 다희가 두 번, 세 번 거듭 확인했다.
사술을 행했던 귀녀는 도 씨에게 들은 정보를 다희에게 말해주었다. 나이와 사는 곳, 인상착의와 유학 시기까지 일치하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엄마가 저주를 건 대상은 자신이 아는 강주원이 확실했다.
“엄마 미쳤어? 대체 어쩌자고 그 남자를 건드린 거야!”
다희는 절규했다.
이렇게 되면 승원과의 결혼도 물 건너간 거 아닌가!
금쪽같은 장남에게 저주를 퍼부은 무당을 엄마로 둔 자신을 그 집안에서 받아들일 리 없었다. 가뜩이나 승원의 마음도 뜬 마당에 집안 반대까지 있으면 결혼은커녕 물싸대기나 안 맞으면 다행이었다.
“올해 나한테 결혼운 들어와 있다며! 결혼은 개뿔, 엄마 때문에 다 망쳤잖아!”
엄마가 경찰에 잡혀간 것 따윈 안중에도 없는 딸의 모습에 귀녀는 몹시 상처를 받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모든 게 내 업보이거늘.’
귀녀는 묵묵히 묵주를 돌리며 홧홧한 가슴을 달랬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간 다희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느라 골머리가 아팠다. 이제 승원의 마음을 돌리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만약 그가 마음을 달리 먹고 다희와 잘해볼 생각을 한다 해도 집안에서 그녀의 엄마가 귀녀, 즉 주원을 해코지하려던 무당인 걸 알게 되면 반대할 게 뻔했다.
“그런데 대체 어쩌다 경찰에까지 잡혀간 거야? 강주원한테서 이상한 낌새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신경질적으로 혼잣말을 되뇌던 다희의 뇌리로 문득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혜주가 내 휴대폰을 빌렸었지.”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그땐 승원에게 다급한 일이 생긴 줄 알고 부리나케 따라나섰는데 막상 가보니 별일도 아니었다.
“그래, 뭔가 석연치 않았어. 혜주가 뜬금없이 휴대폰을 빌린 것도 그렇고…… 그럼 내 휴대폰을 보려고 강주원까지 합세한 건가? 대체 왜?”
다희는 황급히 휴대폰을 뒤져보았다.
연락처 목록에 엄마, 어머니, 마미 등을 검색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뭐야, 그럼 강주원이랑 오혜주가 우리 엄마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오혜주가…… 엄마를 직접 신고한 거라고?”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다희는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오혜주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아악!”
다희는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내동댕이쳤다. 주원이 귀녀의 정체를 눈치챈 것도 절망스러웠지만 그건 혜주에게 느낀 배신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친구였다. 한때는 누구보다 서로를 아꼈던.
설마하니 혜주가 자신을 배신할 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한 다희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우지끈, 쾅!
내던진 리모콘에 화병이 박살이 났다.
엉망진창이 된 방 안에서 짐승처럼 울부짖던 다희의 눈매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혜주 네가 나를 이렇게 엿먹일 줄은 몰랐네. 나라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다희가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향한 곳은 집 근처의 파충류 숍이었다.
“아저씨, 여기 벌레 팔아요? 바퀴벌레 같은 거.”
산발이 된 머리로 가게를 둘러보는 다희의 모습은 흡사 이 구역의 미친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