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스위트룸 38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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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스위트룸 38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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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스위트룸 3819호
2023.03.09.
9월 1일.
드디어 혜주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왔다.
오늘은 상반기 최우수 직원을 표창하는 [그레잇 어워드]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다.
상반기와 하반기를 나누어 딱 두 번밖에 없는 시상이고, 데이터스 코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상이다 보니 전 직원의 관심이 쏠린 자리였다.
백여 명의 직원 앞에서 수상을 하려니 전날부터 가슴이 설렜다.
혜주는 아침 일찍 일어나 경건하게 샤워를 마친 후 옷을 갖춰 입었다.
원래는 이런 날 입을 옷이 없어 몇 번이고 옷을 입었다 벗었다 했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얼마 전 주원이 행어째 선물한 옷이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날이니만큼 점잖게 입는 게 좋겠지? 치마가 짧으면 단상 아래서 보일 수도 있으니 무릎까지 내려오는 걸로.”
혜주는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골랐다.
위아래 곤색으로 깔맞춤한 명품 정장이었다.
자칫 밋밋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쉬폰 소재의 블라우스를 곁들이니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핏이 나왔다.
“좋았어.”
혜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시상식은 회사 근처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진행되었다. 오후에 시상식을 하고 준비된 만찬을 즐긴 후 곧바로 퇴근하는 일정이었다.
오랜만에 호텔 밥 먹는다며 신이 난 명환과, 퇴근 시간이 앞당겨져 데이트하기 딱이라며 좋아하는 루비 덕에 사업팀 분위기는 아침부터 화기애애했다.
단, 욱 팀장만 빼고.
그녀는 자신이 추천한 루비 대신 혜주가 수상하게 되자 기분이 몹시 불쾌했다.
단순히 추천이 반려된 거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 과정에서 주원에게 대차게 깨지기까지 했다.
쫙 차려입고 나온 혜주를 째려보며 욱 팀장은 속으로 분을 삭였다.
‘얄미워 죽겠네. 남자 하나 잘 물어서 승승장구하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안 들어!’
불만은 한가득이었지만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나.
욱 팀장은 하루 종일 틱틱거리며 혜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시간은 착실히 흘러 드디어 시상식 순서가 되었다.
백여 명이 모인 시상식은 여느 때보다 성대했다.
그랜드볼룸에 꽉 들어찬 의자와 휘황찬란하게 걸린 현수막, 높디높은 단상에 웬일로 레드카펫까지 쫙 깔려 있다.
연예 대상 뺨치는 규모에 직원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리 회사 올해 매출이 오르긴 올랐나 보네. 직원 시상식에 이 정도로 돈을 들인 걸 보면!”
수상자 명단에 오혜주 이름 석 자가 없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호화 시상식에 직원들은 잔뜩 고무되었다.
4시 정각이 되자 드디어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데이터스 코리아의 임직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시상식의 진행을 맡은 홍보팀 우규범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상반기 데이터스 코리아에서 가장 우수한 실적을 낸 직원을 선정해 포상과 상장을 수여하는 ‘그레잇 어워드’ 시상식입니다. 수상자에게는 본봉의 300퍼센트에 해당하는 인센티브와 포상 휴가까지 주어지니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시상은 우리 데이터스 코리아의 얼굴! 강주원 대표님이 진행해주시겠습니다. 큰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우와아!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잠시 후 주원이 장막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몸 선에 딱 떨어지는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를 입고 머리를 쓸어넘긴 그는 시상식의 주인공처럼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그의 등장에 홀린 듯 시선을 빼앗긴 이들이 물개처럼 박수만 쳐대는 가운데 그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강주원입니다.”
연회장에 쫙 깔린 묵직한 음성에 일부 직원이 탄성을 흘렸다.
“목소리 쩔어…….”
누군가는 간식 씹던 입도 멈추고 멍하니 시선을 빼앗겼다.
연회장의 공기는 그를 중심으로 흘렀고 독보적인 존재감은 수많은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도 퇴색되지 않았다.
“지금부터 상반기 그레잇 어워드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각 팀에서 올라온 추천서를 바탕으로 총 세 명의 수상자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럼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개발팀, 마케팅팀 수상자가 먼저 호명되었다.
그들이 주원으로부터 표창을 받는 모습을 보며 혜주는 점점 가슴이 뛰었다.
‘너무 떨려, 어떡해!’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상을 받는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저 많은 이의 시선이 제게로 쏠린다 생각하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마지막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
혜주는 맨 앞줄에서 심호흡을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올라가기 전에 치마 뒤집어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계단에서 자빠지지 않기. 상 받을 때 손 떨지 않기. 이것만 기억하면 돼. 오혜주, 할 수 있다!’
주원이 잔뜩 긴장한 혜주를 보고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떨지 마.’
부드러운 시선이 긴장한 어깨를 다독이듯 내려앉자 펄떡거리던 심장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사업팀 오혜주 씨, 단상으로 올라오세요. 임직원 여러분께서는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짝짝짝짝짝!
혜주는 스커트를 정돈한 후 어깨를 당당히 펴고 단상 위로 걸어 올라갔다.
주원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오혜주 씨.”
주원이 마이크 앞에서 내려왔다.
뒤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혜주의 성과와 수상자 선정 이유에 대해 줄줄이 읊은 후 상장을 건네주었다.
남색 케이스에 갈무리된 상장을 손에 든 주원이 혜주를 마주 보았다.
살짝 휘어진 눈매로 그가 축하를 건넸다.
“축하합니다, 오혜주 씨.”
장하다, 내 여자.
“데이터스 코리아와 오혜주 씨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정말 잘했어, 우리 애기.
오가는 눈빛 속에 마음이 있었다. 예뻐 죽겠다는 시선에,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다는 듯 뿌듯해하는 시선에 마음이 벅찼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두 손이 허공에서 얽혔다.
가볍게 악수를 나누고 손을 빼려는데 주원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가볍게 미소를 띤 채 손끝으로 더듬는 손길이 제법 대담해 혜주의 가슴이 쿵쿵거렸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
‘뭐 어때. 아무도 몰라.’
‘지금 지켜보는 눈이 백 쌍이거든요? 좋은 말로 할 때 손 놔라.’
누가 볼세라 얼른 손을 빼낸 혜주가 직원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힘찬 박수가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
만찬이 끝나니 어느덧 여덟 시였다.
상장을 품에 안은 혜주는 너무 뿌듯해서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축하를 건네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언젠가부터 주원이 보이지 않았다.
“대표님은 들어가셨어요?”
“응. 아까 만찬 끝 무렵에 가시는 것 같더라. 혜주 씨, 기분도 좋은데 2차 콜?”
명환이 ‘똑’ 소리를 내며 소주잔을 원샷하는 시늉을 했다.
혜주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부드럽게 거절했다.
“오늘은 일이 있어 들어가 보려고요. 제가 다음에 정식으로 쏘겠습니다!”
“오, 인센티브 받은 걸로 쏘는 거야? 한우 가나요?”
“1차 한우, 2차 참치회 갑니다.”
“콜!”
주위에 있던 팀원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
대부분의 직원이 홀을 빠져나간 후 혜주가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오늘 같은 날은 남친이랑 보내야지! 근데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그녀가 2차 제안을 거절한 건 다름 아닌 주원 때문이었다.
혹시나 호텔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해서 로비를 샅샅이 훑어봤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진짜 간 거야?’
사람들 없을 때 전화를 걸어봐야겠다 생각한 혜주는 택시를 잡기 위해 길가로 나왔다.
앞서 나간 직원들이 다들 택시를 잡았는지 당장 눈에 띄는 택시가 없었다.
혜주는 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황홀한 눈으로 상장을 바라보았다.
‘이게 드디어 내 품에 들어왔구나!’
아까는 남들 앞에서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낼 수가 없어 상장을 펼쳐보지도 못했다.
지금은 혼자 있으니 마음껏 좋아해도 되겠지?
“이 영롱한 자태 좀 봐. 두 번 봐도 좋고 세 번 봐도 좋네. 캬.”
혜주는 케이스에 뽀뽀를 날리며 상장을 펼쳤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상장 위에 떡하니 붙어 있는 빨간색 포스트잇이었다.
[3819호로 와.]
“!”
8을 눈사람처럼 그린 걸 보니 강주원 글씨체였다.
혜주는 누가 볼세라 얼른 상장을 닫았다. 주변을 휘휘 둘러보곤 아무도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한 후 다시 상장을 열었다.
“3819호로 오라고? 거기가 어딘데?”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주원의 오피스텔이었다. 하지만 주원의 오피스텔은 38층이 아닐뿐더러 만약 집으로 부를 거였으면 ‘집으로 와’라고 쪽지를 남겼을 게 분명했다.
다음으로 떠오른 건 회사였는데, 회사 건물에 38층은 없었다.
‘그럼 어디지?’
혜주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로 향했다.
깎아지른 듯 솟아오른 호텔은 대충 봐도 40층은 넘어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호텔 룸으로 오란 소리지?
‘이 응큼한 남자 같으니라고.’
의도가 너무 훤히 읽히니 덥석 물기가 뭐 했다.
그냥 메모를 못 본 척할까 0.1초쯤 고민했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3819호 앞이었다.
딩동! 딩동!
벨을 누르기가 무섭게 커다란 손이 문틈으로 나와 휙 혜주를 끌어당겼다.
“엄마얏!”
혜주는 종이 인형처럼 팔랑이며 룸 안으로 들어섰다.
주원의 얼굴보다 먼저 들어온 것은 휘황찬란한 스위트룸의 전경이었다.
“뭐예요, 여기……?”
세상에, 단언컨대 이렇게 호화로운 호텔은 처음 봤다.
호텔 룸이라고 해봐야 스탠다드, 슈페리어, 정말 큰 마음 먹으면 디럭스 정도만 경험해 봤던 혜주에게 이곳은 신세계였다.
“뭐긴 뭐야. 스위트룸이지.”
“와, 이런 게 스위트룸이구나.”
혜주는 촌닭처럼 두리번거리며 룸을 둘러보았다.
먼지 한 톨 없는 대리석이 깔린 접객실, 야경이 그대로 비치는 통창,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접객실 중앙에 놓여 있는 소파는 열 명이 누워도 충분할 만큼 넓었다.
“왜 여기로 오라고 했어요?”
“이유를 모르진 않을 텐데.”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주원이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와.”
하얀 와이셔츠 아래로 단단한 가슴팍이 펼쳐졌다.
혜주는 조금 전까지 한번 튕겨볼까 작정했던 것도 잊고 총총총 뛰어가 너른 품에 덥석 안겼다.
“아, 좋다. 오빠 먼저 가버린 줄 알고 서운할 뻔했잖아요.”
“축하 파티는 해야지.”
병아리처럼 품에 안긴 그녀의 머리를 주원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박동을 들으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혜주는 고개를 올려 주원과 눈을 마주쳤다.
“직접 준비한 거예요?”
“오혜주는 특별하니까.”
축하해주려고 스위트룸까지 빌리다니, 이런 깜찍한 남자를 봤나.
혜주는 진심으로 감동했다.
“고마워요, 정말.”
혜주는 주원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한껏 행복감을 만끽했다.
큰 상을 받은 것도 기쁘지만 주원이 선사한 행복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백 명도 넘는 사람들 앞에서 상을 받을 때보다 지금이 더 가슴이 뛰었다.
벅차게 행복해서 눈웃음을 짓던 그녀의 눈에 문득 룸 안의 광경이 비쳤다.
“!”
저 장미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