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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달래줘, 그럼 (82/121)


#82. 달래줘, 그럼
2023.03.12.



 
혜주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아까부터 어디서 꽃향기가 난다고 했더니 룸 안의 커다란 침대 위에 장미 꽃잎이 흐드러져 있었다.

새하얀 시트 위에 한 겹 한 겹 펼쳐진 꽃잎이 유혹하듯 혜주를 반겼다.

존재 자체로 야한 무드를 물씬 풍기는 자태였다.


‘이런 건 에로영화에서나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멀쩡한 장미를 왜 뜯어서 뿌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걸로 끝이면 다행이게?

더 당황스러운 건 꽃잎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물건이었다.

새하얀 정사각형 케이스에 금색 필기체로 로고가 딱 박혀 있는 걸 보고 혜주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모양이 딱 반지 케이스잖아!’

머리털 나고 이런 이벤트를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받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어…….’

로맨틱한 분위기에 항마력이 딸리는 체질인 혜주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짠.”

암담한 혜주의 속내를 알지 못한 주원이 의기양양하여 케이스를 열었다.

널 위해 준비했어, 딱 그 표정으로.


“축하에 선물이 빠질 순 없으니까.”

“우와…… 너무 예쁘다. 진짜 너무 예뻐요.”

혜주가 영혼 없이 멘트를 중얼거렸다.

두 개의 케이스에 들어있는 두 개의 반지. 누가 봐도 커플링이다.


“마음에 들어?”

“네, 마음에 들어요.”

심플한 플래티늄 밴드에 브릴리언트 다이아몬드가 셋팅된 아주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반지가 불빛에 반짝였다.

눈이 확 돌아갈 정도로 예쁜 건 사실이었으나 표면에 새겨진 브랜드 네임을 보니 부담이 짙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사귄 지 백 일 만에 받을 만한 선물은 아니었다. 결단코.


“그런데 이거 끼고 다녀야 해요?”

혜주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반지를 끼고 다니지 그럼 이고 다니냐.”

“그건 좀……”

주원의 눈썹이 힐끗 올라갔다.


“왜, 너무 화려해?”

예쁘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딴소리야.

가뜩이나 혜주의 반응이 예상보다 미미해 마음이 상하려던 주원은 몹시 서운해졌다.

일하는 와중에도 짬짬이 이벤트를 준비하면서 얼마나 스스로 대견했던가!

이렇게 로맨틱한 남자를 애인으로 둔 오혜주는 참 행복하겠군. 반지를 받고 울면 어떡하지? 감동 받아서 엉엉 울면 어떻게 달래줄까.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짜며 몹시도 기꺼웠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반지를 못 끼고 다녀?


“회사에 커플링을 어떻게 끼고 다녀요. 내 손가락에 반지 하나 얹은들 아무도 신경 안 쓰겠지만 오빠 손가락에 반지 끼워진 거 보면 여직원들 난리 날걸요.”

하루 꼬박 발품을 팔아 준비한 커플링이 거절당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삐딱해질 테다.


“난리 좀 나면 어때서.”

주원이 미간을 구기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너 미혼, 나도 미혼, 너랑 나 나이 차이 적당하고 결혼할 때도 됐고 바람 피운 것도 아니고 서로 좋아 죽고! 이 정도면 티 좀 내도 되지 않아?”

“난 싫어요.”

“싫어?”

혜주의 단호함에 주원은 욱하고 말았다.


“왜 싫어? 내가 뭐 홍길동이야? 내가 사귀는 남자가 강주원이다, 말 못 해?”

“오빠 화내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요.”

“직원들이 내 욕 많이 해? 데리고 다니기 쪽팔려서 그래?”

“그게 아니라…….”

“아니면 대충 사귀다 차버릴 생각이야? 그것도 아니면 왜 말을 못 하는데.”

“워워, 진정 좀 하십쇼,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우리 오빠 숨넘어가게 생겼네.”

혜주가 주원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딱 눈을 마주 보았다.

처음부터 너무 단호하게 거절을 했나 보다.

준비한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싫은 게 아니에요. 아직 알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맞지만.”

혜주가 부드럽게 주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주원은 여전히 불퉁했으나 그녀의 손이 진정제라도 되는 듯 조금씩 누그러졌다.


“남들 시선을 왜 그렇게 신경 써.”

“오빠는 대표실에 딱 앉아서 혼자 일하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출퇴근하잖아요. 나는 달라요. 앞, 뒤, 옆, 사방이 같은 팀 직원이라고요. 괜한 소문에 휩싸이면 얼마나 인생이 고달파지는지 알아요? 당장 욱 팀장만 봐도 그래. 오빠랑 나랑 사귀는 거 알게 된 후 얼마나 까칠해졌는데요.”

“일하라고 월급 주는데 뒷말이나 하고 다니면 잘라야지.”

“대놓고 뭐라고 하면 차라리 다행이죠. 뒤에서 꼽 주는 게 더 싫다고요.”

“그런 놈 있으면 얘기해. 나한테 데스노트 있어.”

“진짜 그럴까 봐 무섭네.”

혜주가 눈으로 웃으며 주원을 올려다보았다.


“이 반지는 정말, 정말로 소중히 간직할게요. 언젠가 사람들 앞에서 밝힐 준비가 되면 그때 끼는 걸로 해요.”

“이 반지 비싼 거야. 그렇게 묵힐 물건이 아니라고.”

“비싼 거니까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잖아요. 대신 나중에 끼게 되면 평생 빼지 않을게요.”

생긋. 사랑스러운 미소에 폭격당한 주원의 가슴이 뻐근해졌다.


‘뽀뽀도 아니고 키스도 아니고 고작 눈웃음 한 방에 넘어가다니 치욕스럽군.’

주원은 속으로 구시렁대며 투덜거렸다.


“생각해 볼게.”

“삐졌어요?”

“그럴 리가. 난 삐지는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야.”

딱 삐진 얼굴인데, 뭐.

혜주는 속으로 웃음을 감추며 주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강주원 마음 풀리게 하는 덴 오혜주 애교만 한 게 없지.


“에잇, 인심 후하게 썼다. 그럼 올해 넘기기 전에 끼는 걸로 해요.”

올해 석 달 남은 거 알고 하는 소린가.


“설마하니 석 달도 못 기다릴 만큼 인내심 없는 남자는 아니잖아요. 그쵸? 너무 시끄러워지지 않게 살살 밑밥부터 깔아볼게요.”

알고 하는 소리군.

그제야 주원의 미간이 반듯하게 펴졌다.

혜주는 강아지처럼 주원의 가슴에 코를 비비며 눈매를 곱게 휘었다.


“그전까진 목걸이로 만들어서 걸고 다니면 좋을 거 같은데. 어때요?”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 향기가, 목덜미에 자잘하게 난 솜털이 얼어붙은 마음을 사르르 녹였다.

반지를 끼고 다니냐 마느냐 하는 게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네가 이렇게 내 곁에 있다는 것, 그 사랑스러운 미소를 나만 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목걸이는 됐고. 그럼 다른 선물로 골라.”

선심 쓰듯 주원이 턱을 치켜들었다.


“다른 선물요?”

“확 티 나는 거. 볼 때마다 내 생각나는 거. 누가 봐도 애인이 선물한 거 같은 걸로.”

반지가 안 된다면 다른 거라도 오혜주 옆에 놔둬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단 말이지.

씩 웃음 짓는 주원의 꿍꿍이에 혜주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부지런히 눈알을 굴리던 혜주가 손뼉을 짝 쳤다.


“아! 생각났어요! 그럼 나 금붕어 사줘요.”

과연 뭘 사달라고 할까 기대하던 주원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뭘 사줘?”

“금붕어요.”

아니, 집도 차도 가방도 아니고 고작 금붕어?

금으로 만든 ‘금’붕어 말하는 건가?


“네가 말하는 게 주황색, 작고 귀여운 그거 맞아?”

“네! 책상에 놓을 작은 어항이랑 같이요.”

주원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예전부터 키워보고 싶었거든요. 어릴 때요, 수족관 되게 가고 싶었는데 아빠 혼자 나를 키우다 보니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가게 보느라 주말엔 더 바빴거든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주원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류는 좀 그렇지 않냐.”

“금붕어 싫어해요?”

“그런 건 아니지만.”

“꼬리 살랑살랑 치는 거 보면 강주원 생각날 거 같아.”

“!”

혜주가 생글거리며 주원을 올려다보았다.


“입술 툭 튀어나온 거 보면 강주원이랑 뽀뽀하는 생각도 할 거고요.”

이 여우가 진짜.

살다 살다 어류에 비견되는 일은 처음이지만 도저히 안 사줄 수가 없네.


“세상에 그렇게 잘생긴 어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생각해 볼게.”

주원이 승낙하자 혜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서운하게 해서 미안하고.”

“달래줘, 그럼.”

“강주원 달래는 특효약이 어디 있더라…….”

혜주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짜잔, 요기 있네!”

그녀의 주머니에서 손 하트가 짠 나오는 순간 주원의 심장이 와르르 진동했다.

살면서 받은 선물 중 이보다 깜찍한 건 없었다.

이 귀여운 걸 어떻게 잡아먹지.

큰 걸음으로 성큼 다가서자 혜주의 등이 벽에 닿았다.

순식간에 위험해진 눈빛을 탐지한 혜주가 커다래진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주원은 지그시 혜주의 눈을 바라보며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잘 먹을게.”

할짝. 예쁘게 모인 엄지와 검지가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막대 사탕을 빨아 먹듯이 천천히, 느릿하게 움직이며 가느다란 손가락을 샅샅이 핥았다. 꿀을 발라놓은 것도 아닌데 달콤했다.


“확실히 약효는 있네.”

 

 
목덜미를 발그스레 물들인 모습을 보니 어느새 허벅지가 둔중해졌다.

벽을 짚어 그녀를 가둔 채로 주원이 할짝 입술을 핥았다.


“더 있어?”

붉은 입술이 질척하게 맞닿았다 떨어지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색정적이었다.

스르륵.

축축해진 손가락에 주원의 손가락이 단단히 맞물렸다.

그의 몸과 벽 사이에 갇힌 혜주는 점점 호흡이 가빠졌다.


“지금 약발 필요한 건 저거든요. 하루 종일 긴장했더니 기가 빨린다고요.”

“줄게.”

툭, 툭.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원이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 쫙 갈라진 복근이 보였다. 탄탄하게 벌어진 가슴 위로 쭉 뻗은 쇄골과 툭 튀어나온 목젖, 그리고 단단한 어깨까지도.

주원의 손이 미끄러지듯 혜주의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그녀의 턱을 붙잡고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멈춰 선 그가 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갖다 먹을래, 떠먹여 줄까.”

“알아서 먹을게요.”

확 달아오른 혜주가 두 팔로 주원의 목을 감싸며 발뒤꿈치를 들었다.

그녀의 키에 맞춰 주원이 고개를 숙였다. 벌린 입술 사이를 채운 혜주의 숨을 주원이 진득하게 빨아들였다.

서로를 맹렬히 탐닉하는 둘의 잇새에 갈증이 고였다.

주원은 그대로 혜주의 허벅지를 안아 들었다.

베일을 벗듯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는 옷가지 위로 달뜬 그림자가 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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