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오빠, 나 오늘 사고 한번 칠게요. (83/121)


#83. 오빠, 나 오늘 사고 한번 칠게요.
2023.03.16.



 
다음 날.

주원보다 조금 늦게 출근한 혜주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헉, 이게 뭐야?”

컴퓨터 책상 위에 떡하니 어항이 자리하고 있었다.


“강주원 진짜…….”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실행력 하나는 끝내주는 남자인 건 알고 있었지만 말한 지 하루 만에 금붕어를 구해올 줄은 몰랐다.

텀블러 크기의 둥그런 어항에는 엄지손톱만 한 금붕어 두 마리가 담겨 있었다.

쨍한 주황색 꼬리를 하늘하늘 흔들며 어항 속을 유영하는 모습이 꽤 근사했다.


“와, 예쁘다.”

혜주는 넋을 놓고 한참이나 어항을 들여다보았다.

어릴 때 수족관 한 번 못 가본 한을 이렇게 푸는구나.

뜬금없이 웬 어류냐며 콧방귀를 뀌던 남자가 단번에 선물한 금붕어 두 마리에 행복이 가슴 언저리에 차올랐다.


‘오늘 퇴근하면 진짜 예뻐해 줘야겠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가 뽀뽀를 퍼붓고 싶었다. 저 안에서 홀로 뿌듯해하고 있을 그를 상상하니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좀…… 항상 과하긴 하네.’

투명한 어항 입구엔 핑크색 리본이 묶여 있었다.

길게 늘어진 리본 꼬리에는 짤막한 이니셜이 쓰여 있었는데 그 이니셜이 문제였다.

JU&WON.


‘이 오빠 진짜 미쳤나 봐!’

왼쪽 꼬리에 JU, 오른쪽 꼬리에 WON.

각각 쓰인 이니셜은 아주 눈에 잘 띄는 고딕체에 크기도 큼지막했다.

따로 쓰면 혜주의 JU, 주원의 WON이지만 붙여놓으면 그냥 ‘주원’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 남자친구 이름에 ‘원’이 들어가는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회사에서 강주원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개중 누군가는 눈치를 챌지도 모른다.


‘이 정도면 제발 알아달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거잖아!’

혜주는 황급히 리본을 떼어내 서랍 안에 숨겼다.


“혜주 씨, 웬 금붕어야?”

마침 지나가던 명환이 말을 걸었다.


“아, 누가 선물해줬어요.”

“남자친구?”

“네…… 뭐.”

애매한 혜주의 대답에 명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기 방금 출근하지 않았어? 분명 빈손이었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어항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는 없고, 누가 갖다 놓은 거야? 자기 혹시 사내연애 해?”

헉.

명환은 가뭄에 콩 나듯 예리할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아…… 어젯밤에 갖다 둔 거예요.”

“아닌데? 어제 내가 혜주 씨보다 늦게 퇴근했는데 어항 없었는데?”

집요한 명환의 추궁에 혜주는 진땀을 뻘뻘 흘렸다.


“아, 제가 아니고 루비 씨가요. 아침 출근길에 가져오기엔 짐이 될 거 같아서 어젯밤에 회사 앞에서 만난 김에 부탁 좀 했어요. 맞지, 루비 씨?”

눈치 빠른 루비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오 대리님 얘기가 무조건 다 맞습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보통 이러면 ‘어머 남자친구 생겼어? 언제? 어디서 만났어?’ 이런 반응이 정상 아닌가.

한데 주위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명환과 혜주를 훔쳐보던 몇몇이 눈치를 보며 슬며시 승원의 자리를 흘깃거렸다.


‘뭐야, 왜 거길 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 혜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체 왜들 그러냐고 대놓고 따져보고 싶은데 곁눈질하던 직원들이 얼른 고개를 돌리고 업무에 집중하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후우…….’

혜주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스파이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았다.


“루비 씨, 나 좀 봐.”

혜주가 루비를 향해 손짓했다.


“네, 언니!”

루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달려왔다.

*

그날 오후, 염탐을 마친 루비가 씩씩거리며 혜주를 불러냈다.


“언니! 원래 퇴근하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언니 말 듣고 내가 좀 떠봤는데요.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알아요? 글쎄, 언니 책상에 있는 어항이 강승원 대리가 준 건지 알더라고요!”

아기 용처럼 연기를 뻑뻑 내뿜던 루비가 담뱃불을 끄면서 열변을 토했다.


“어항에 무슨 리본이 묶여 있었다면서요? 거기에 WON자가 들어갔다고 다들 강승원 대리인 줄 알아요. 참나, 회사에 ‘원’자 들어가는 사람이 한두 명인가?”

그래, 거기까진 오케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사실이라 혜주는 놀라지 않았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 승원이랑 다희랑 사귀는 거 다들 알 텐데?”

“헤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천다희가 지 입으로 얘기했대요.”

“……그래?”

“네! 근데 진짜 열 받는 게 뭔지 알아요? 천다희 그 계집애가 두 사람이 헤어진 이유가 여자 때문이라고 그랬대요. 그게 언니라고 정확히 말한 건 아니고 넌지시 흘리기만 했다는데 세 사람이 매일같이 붙어 다닌 걸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게 언니라고 생각하겠죠. 안 그래요? 진짜 열불 나서 원!”

혜주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희 성격에 승원과 헤어지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고.

어쩌면 자신을 물고 늘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그러지 않기를 바랐지만.’

아까 어항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혜주는 대강의 사정을 짐작했다.

다희와 승원이 사귀는 줄 아는 사람들이 뜬금없이 혜주에게 그런 눈빛을 보내는 덴 이유가 있을 테니까.

십중팔구는 다희가 원인일 거라 생각했지만 정말 그렇다고 하니 가슴이 쓰렸다.


‘친구는 아니더라도 적은 되고 싶지 않았는데.’

돌아서면 남이라고 주원이 몇 번이나 주지해 주었지만 마지막 한 걸음까지 돌아서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쪽에서 칼을 뽑아 든 이상 멍청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건드렸으면 꿈틀이라도 해주는 게 도리다.

그래야 다시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


‘천다희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나도 칼춤 출 줄 알거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혜주가 주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나 오늘 사고 한번 칠게요.]

 
혜주는 손을 뻗어 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목엔 주원이 선물한 커플링이 곱게 걸려 있었다.

*

운 좋게도 그날 저녁에 바로 회식이 잡혀 있었다.

그레잇 어워드를 수상한 기념으로 혜주가 한턱 쏘는 자리였다.

며칠 전부터 참치에 한우 노래를 부르던 명환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절로 콧노래가 나는지 연신 어깨를 들썩였다.

하나, 둘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한 팀원들을 보며 혜주는 비장하게 입술을 여몄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야. 이렇게 급작스럽게 밝힐 생각은 아니었지만 니들이 충격을 받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 이거야!’

혜주는 오늘, 그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는 오혜주의 남자가 누군지 똑똑히 보여줄 작정이었다.

주원이 선물한 반지를 끼고 회식에 나설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마도 다희는 내가 정면 돌파를 선택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할 거야.’

고백할 타이밍을 못 잡아 십 년이나 짝사랑만 하던 조심성 많은 오혜주, 승원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라면 뭐든 참고 보는 오혜주.

그녀에게 혜주는 딱 그런 이미지일 테니까.

하지만 이제 그녀가 지켜야 할 사람은 강승원이 아니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애쓰는 다희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네가 지금 내 뒤에서 하고 다니는 짓거리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날 추락시키려 아등바등해봤자 결국 떨어지는 건 네가 될 거라는 사실을.

사귀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을 때 주원의 반응은 간단명료했다.


-오늘 회식 자리 볼 만하겠네. 나 놀러 가도 돼?

물론 그랬다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주원은 개발팀과 회식이 잡혀 있었다. 구경거리를 놓쳐 아쉬워하는 그에게 혜주가 씩씩하게 말했다.


-회식 끝나고 만나요. 반지 꼭 끼고.

혜주는 비장한 표정으로 목걸이를 풀었다.

그러곤 왼손 약지에 반지를 꼈다.

*

드디어 대망의 회식이 시작되었다.

욱 팀장과 명환, 다희를 비롯한 팀원들이 차례로 입장을 하고 마지막에 혜주가 들어섰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구두를 벗는 혜주를 보고 루비가 귀엣말을 했다.


“언니, 괜찮겠어요? 내가 지원사격이라도 해줄까요?”

혜주는 전투에 나서는 장수처럼 굳건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혼자서 충분하니까 걱정 붙들어 매, 루비 씨.”

나 오혜주. 옛정에 약한 여자.

그러나 훗날 주원과의 관계가 밝혀졌을 때 잡음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단단해졌다.

혜주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고깃집 안으로 들어섰다.

룸 안의 테이블은 먼저 도착한 팀원들로 북적였다.

상 위에 쫙 깔린 불판과 반찬을 사이에 두고 네 명씩 한 테이블에 자리했다.

본격적으로 고기를 굽기 전 맥주와 소주로 입가심을 하고 있는 직원들 사이에 다희의 모습이 보였다.

혜주는 자연스럽게 다희의 앞자리로 향했다.


“어…… 왔어?”

다희가 살짝 놀란 눈을 했다.

혜주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응. 요 앞에서 통화 좀 하고 들어오느라 늦었네. 고기 주문했어? 내가 쏘는 거니까 팍팍 시켜.”

단지 같은 테이블에 앉았을 뿐인데 주위의 시선이 쏠렸다.

혜주는 왼손으로 자연스레 머리를 쓸어 넘기며 착석했다.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를 발견한 다희의 동공이 흔들렸다.


“너…….”

 

 
그녀의 당황한 시선을 만끽하며 혜주는 태연하게 맥주잔을 만지작거렸다.


“왜? 뭐 문제라도?”

“아, 아니야. 아무것도.”

다희가 복잡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건배사를 할 타이밍이었다. 혜주는 보란 듯 왼손으로 잔을 잡은 채 큰소리로 외쳤다.


“저를 축하해주기 위해 이 자리에 모여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앞서서 이끌어주시고 뒤에서 밀어주신 우리 사업부 팀원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리며, 오늘 이 자리는 제가 쏠 테니 배 터지게 드세요!”

짝짝짝! 박수와 함께 왁자지껄한 건배 소리가 울렸다.

혜주는 신나게 잔을 부딪히는 팀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말은 안 해도 다들 손가락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다들 봤을까? 봤겠지?’

그녀는 해맑게 대화를 이끌며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만을 기다렸다. 이쪽에서 백치처럼 굴면 성격 급한 누군가는 운을 띄울 거다.

혜주가 노리는 건 그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소고기를 한 판 정도 구웠을 무렵, 맞은편에 앉은 팀원 하나가 말문을 열었다.


“참, 혜주씨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 반지 뭐야? 커플링?”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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