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두 분 진짜 사귀는 사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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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두 분 진짜 사귀는 사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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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두 분 진짜 사귀는 사이예요?
2023.03.19.
혜주는 쑥스러운 듯 뺨을 붉히며 반지를 들어 보였다.
“아, 이거요? 벌써 보셨구나. 커플링 맞아요.”
작은 목소리였지만 단번에 주위가 술렁였다.
맞은편에 앉은 명환이 말을 보탰다.
“아까 어항도 남자친구가 줬다고 했지? 바빠서 연애할 시간도 없다더니 어디서 만났대? 내 예감은 영 사내연애 같단 말이지. 옆 팀원들 얘기하는 거 들어보니 다들 같은 생각인 모양이더라고.”
오지랖 넓고 입 싼 명환이 이럴 때는 참 도움이 된다.
주변의 관심이 하나, 둘 모여드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혜주는 속으로 땡큐를 외치며 수줍게 말을 이었다.
“소문이 거기까지 났어요? 저 연애하는 게 뭐 그리 큰 뉴스라고 옆 팀까지 소문이 나요?”
“혜주 씨 요즘 유명인사잖아. 태양식품 건이 워낙 이슈이기도 하고 전 직원 앞에서 그레잇 어워드도 받아서. 연애한 지는 얼마나 됐어? 뭐 하는 사람? 회사원?”
“오래되진 않았어요. 회사 다니고요.”
“우리랑 같은 IT 계열이야?”
“네.”
스무고개가 시작되었다.
이미 혜주의 애인이 승원일 거라고 결론을 내린 몇몇은 인상을 찌푸리며 수군거렸고 소문에 어두운 몇몇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대화에 참여했다.
다희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혜주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러면 계획이 틀어지는데.’
승원과 헤어진 배경에 혜주가 있다는 걸 은근히 암시하고 다녔던 그녀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혜주는 다희의 꿍꿍이를 모르는 척하며 답변에만 열중했다.
“갑자기 이렇게 주목을 받으니 쑥스럽네요. 커플링이 뭐 대수라고 이렇게들 관심을 주시고.”
“혜주 씨 입사 후에 연애하는 거 처음이잖아. 어떻게 만났어? 동갑?”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였어요.”
혜주와 승원이 고등학교 동창인 걸 아는 몇몇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일방적인 다희의 주장에 세뇌되어 혜주를 고깝게 보는 이들이었다.
‘친구 애인이랑 바람피운 주제에 뻔뻔하네. 저걸 제 입으로 말하고 다니다니!’
혜주는 일부러 그들과 시선을 맞추며 태연스레 덧붙였다.
“동갑은 아니고요. 저보다 나이 많아요.”
엥? 순간적으로 몇 사람의 동공에 균열이 일어났다.
“혜주 씨보다 나이가 많다고?”
“네, 저보다 오빠예요.”
다희의 말만 듣고 혜주의 애인이 승원이라고 짐작했던 이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해명을 요구하듯 다희를 힐끗거렸다. 다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소주잔만 만지작거리자 대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서로 귓속말을 하며 웅성거렸다.
‘강승원이랑 천다희 사이에 여자가 끼어있다고 하길래 당연히 오혜주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천다희가 은연중에 그런 뉘앙스를 풍기긴 했잖아.’
귀에 들리진 않아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뻔했다.
혜주는 맥주만 홀짝이며 개중 용기 있는 누군가가 말을 꺼내주길 기다렸다.
이윽고, 궁금함을 참지 못한 누군가가 총대를 멨다.
“아유, 다들 눈치만 보니 내가 나서야겠네. 그러니까 혜주 씨가 사귀는 사람이 개발팀 강승원 대리가 아니라는 소리지?”
“네에?”
금시초문이라는 듯 혜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혜주 씨가 승원 씨랑 뭐 있는 줄 알았어. 사실 승원 씨가 다희 씨랑 사귄다고 했을 때 이게 뭔가 했다니까?”
“절대 아니에요. 승원이랑 다희랑 사귀는 거 다 아시면서 무슨 그런 소리를……!”
“두 사람 헤어졌다잖아. 하필이면 여자 문제로. 결국엔 승원 씨가 제자리 찾아갔구나, 우린 그런 줄 알았지.”
“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은 누구한테 들으신 거예요?”
“여기 그 소문 모르는 사람 없을걸?”
그녀가 동의를 구하듯 주위를 둘러보자 다들 슬며시 다희를 쳐다보았다.
다희의 턱 근육이 단단히 멍울졌다.
‘진짜 해보자는 거지, 오혜주.’
시끌벅적하던 회식은 어느새 적막이 감돌았다. 모두의 시선이 다희와 혜주, 두 사람에게 쏠렸다.
‘둘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엇갈린 주장에 혼란스러워하는 팀원들을 돌아보며 혜주가 몸을 일으켰다. 밑밥이 충분히 뿌려졌으니 이제는 쇼타임이다.
“다희야, 정말 그런 얘길 했어?”
혜주가 서늘한 시선으로 다희를 내려다보았다.
다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진짜 오혜주 너…….’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승원과의 사이에 끼어든 여자가 혜주란 걸 사람들이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만 은근히 말을 흘리고 다닌 건 언제든 오리발을 내밀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봤자 이득이 될 게 없으니까. 물론 그건 혜주에게도 마찬가지고.
‘지금 강주원과 사귀고 있는데 과거에 승원일 좋아했단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되겠어. 친구 애인에게 마음을 준 걸로도 모자라 형제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고 하면 이미지에 똥칠하는 거지. 혜주가 바보도 아니고 과연 그런 선택을 할까?’
그녀가 아는 혜주라면 이 문제를 그저 묻어둘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거리낌 없이 뒤에서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런데 이렇게 맞짱을 뜬다고?
‘네가 어떻게 나오든 혼자는 절대 안 죽어. 어쨌든 네가 강승원을 좋아했던 건 사실이니까…….’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다희가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너 승원이 좋아했던 거 맞잖아.”
어찌 됐든 지금 불리한 건 혜주였다.
승원과 공식적으로 사귄 건 다희였기 때문에 그녀가 끝까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 혜주는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포지션이었다.
한데 혜주의 반응이 괴랄 맞았다.
“내가?”
뭐지, 저 뻔뻔한 표정은?
개소리를 들은 것처럼 혜주가 펄쩍 뛰었다. 다희는 적잖이 당황했다.
“발뺌하지 마! 너 10년 전부터 강승원 좋아했잖아!”
“주변 사람들이 다 오해해도 너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이래서 남사친 여사친은 없다고 하는 건가? 내가 한 번이라도 너한테 강승원 좋아한다는 말 한 적 있니?”
“말 안 해도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몰라? 너 강승원 좋아했던 거 맞잖아. 승원이한테 고백하려고 선물도 준비했잖아!”
그래, 그 말을 기다렸어.
혜주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여유만만하게 웃은 그녀가 다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선물 준비한 건 맞는데 그게 강승원 거라고는 말 안 했는데?”
“그, 그렇지만 좋아한 건 맞잖아! 날이면 날마다 맛있는 거 사다 바치고 매년 강승원 생일에 줄 선물 고민한다고 밤새 머리 싸매고 걔 썸 타는 여자애 생길 때마다 술 퍼마시고! 이제 와서 부정하기엔 너무 티를 많이 낸 것 같지 않아?”
“그래서 넌!”
혜주가 멱살을 잡을 듯 다희의 코앞에 바짝 다가섰다.
“알면서도 그런 짓을 했냐?”
“……뭐?”
“내가 승원이한테 고백하려고 했던 걸 알면서도 사귀었단 소리잖아, 지금.”
“난……!”
“베프가 십 년이나 짝사랑한 남자란 걸 알고도 가로챘다고, 방금 네 입으로 인정했잖아.”
혜주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모두가 숨을 죽인 탓에 또렷이 울려 퍼졌다.
“물론 모든 건 네 착각일 뿐이지만.”
혜주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눈으로 다희를 바라보았다.
연기가 조금 가미되긴 했지만 이를 악문 다희를 보니 정말로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누, 누가 먼저 좋아했든 무슨 상관이야! 결국에 승원이랑 사귄 건 나고, 네가 우리 둘 사이에 껴서 분탕질한 건 사실이잖아!”
“강승원한테 차인 분풀이로 내 머리 끄댕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다희야.”
끝까지 가해자로 몰아가려 발악하는 다희를 보니 그나마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혜주는 거의 귓속말하듯 다희에게 속삭였다.
“옛정을 생각해 모른 척 넘어가 주기엔 내 남친이 성격이 많이 더러워. 너도 알겠지만.”
“……뭐?”
“그날 그 자리에 한 명 더 있었잖아.”
다희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밝히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뒤에서 헛소문이나 퍼트리고 다녔나 본데.”
혜주는 숙였던 허리를 천천히 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너는 알 거야. 이 반지를 내게 준 사람이 누군지.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혜주 너…….”
“강주원.”
혜주의 입에서 나온 이름 석 자에 삽시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시간이 멈춘 듯 허공에 젓가락이 정지하고, 고기를 씹던 소리도 멈췄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는 직원들을 향해 혜주가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사귀는 사람 강주원이잖아.”
그 한마디는 지금껏 혜주가 준비한 연극의 종착역과도 같았다.
다희의 음흉한 민낯을 낱낱이 까발리고 만천하에 그녀의 거짓을 드러내는 것.
과거에 승원을 짝사랑했단 사실까지 없던 일로 만들어버린 건 아주 조금 찔리기는 했지만 모두를 위해서 그편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우하하하하!”
지금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거, 혜주 씨 장난이 심하네. 자리에 없는 사람 멱살 잡으면 쓰나!”
“오늘 오전에 미팅했을 때 대표님 손가락에 반지 없었어요. 커플링하고 있었으면 진즉 소문 쫙 돌았을걸요?”
“대표님 아시면 어쩌려고 이래. 방금 한 말은 우리끼리 묻어둘 테니까 어디 가서 그런 얘기하지 마. 자칫하다 경을 칠라!”
어라? 이게 아닌데?
빵 터진 직원들의 반응에 혜주는 뺨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아니, 강주원이 유니콘도 아닌데 대체 왜 안 믿냐고오……
혜주는 억울해서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그들의 반응에 힘입은 다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혜주야. 자리에 없는 대표님 팔아서 상황을 모면하려 했던 모양인데 어차피 아무도 안 믿어.”
드르륵.
그때 룸의 문이 열렸다.
거짓말처럼, 마치 환상과도 같이.
“조금 늦었습니다. 개발팀 미팅이 길어지는 바람에.”
장지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건 주원이었다.
“아, 대표님! 오늘 못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미팅 끝나고 보니 시간이 얼추 맞을 것 같아서. 합석할까요?”
그의 등 뒤로 열 명 정도의 개발팀 직원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넉살 좋은 명환이 부리나케 일어나 주원을 맞았다.
“그럼요! 대표님이 와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어서 들어오시죠!”
“네, 그럼.”
허리를 굽혀 신발을 정리하고 룸으로 들어서는 그의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저 손에 과연 반지가 있을까 없을까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던 그때, 주원이 자연스레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한잔할까요?”
“히익!!!”
비싼 반지의 존재감이란 대단했다.
불빛 아래 반짝이는 반지를 본 순간 모두가 경악했다.
“헐, 두 분 진짜 사귀는 사이예요?”
방금 전 혜주의 말에 가장 크게 비웃었던 직원이 헛바람을 들이켜며 물었다.
주원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혜주를 한 번 바라보았다.
누구라고 콕 찍어 말하지도 않았는데 단번에 혜주를 찾아가는 시선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회사 생활 편하게 하고 싶다며.”
주원이 진짜 애인에게 말하듯 다정하게 말했다.
“제발 껴달라고 애원해도 안 받아주더니 웬일로 이쁜 짓을 했어?”
툭툭 와이셔츠를 털고 들어온 그가 자연스레 혜주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단 두 문장이지만 이보다 확실한 긍정은 없었다.
그야말로 확. 인. 사. 살.
‘사귀는 걸로도 모자라 강주원이 애원하는 관계라고? 게다가 저 부드러운 목소리 뭐야…….’
회의실에서 볼 때와 영 딴판인 말랑말랑함은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