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 난 그 불확실성을 현실화할 수 있는 남자지 (85/121)


#85. 난 그 불확실성을 현실화할 수 있는 남자지
2023.03.23.


반지를 선물하며 주원이 기대한 건 딱 하나였다.


‘내 남자가 강주원이다.’

 
혜주가 으스대며 자랑스러워해 주는 것.

그리하여 누구도 혜주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길.

사실 그는 요새 혜주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악몽 문제가 해결되고 보니 슬슬 혜주의 상황이 눈에 보인 것이다.

제일 거슬리는 건 욱 팀장이었다. 그녀는 티 나게 다희를 편애하고 혜주를 배척했다.

그레잇 어워드를 강탈하려던 걸로 모자라 심심찮게 야근을 시키고 일을 몰아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얌체 같은 직원 몇몇은 빠릿빠릿하고 착한 혜주에게 일을 떠넘기기 바빴다.

그 덕에 혜주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것도 사실이지만 하루 걸러 하루씩 야근을 하는 애인을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만 했다.


‘꼴을 보니 꽤 예전부터 그래온 모양인데.’

주원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로서 어느 한 직원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참고 또 참았다.

그래서 준비한 게 반지였다.

‘내 남자가 강주원이다’ 한마디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뒤에서 씹든 말든 그거야 자기들 사정이고 내 귀에 들어오면 박살을 내주면 그만이다.

형제 사이에 어쩌고저쩌고 말이 돌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롭혀 줄 자신이 있었다.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건 혜주의 마음이었다.


-오빠는 대표실에 딱 앉아서 혼자 일하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출퇴근하잖아요. 나는 달라요. 앞, 뒤, 옆, 사방이 같은 팀 직원이라고요. 괜한 소문에 휩싸이면 얼마나 인생이 고달파지는지 알아요?

 
단칼에 거절당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상심이 더 컸다.

반지 고른다고 피 같은 시간을 할애해 이틀이나 발품을 팔았는데.

석 달 안에 껴 주겠다는 약속에 마음이 조금 풀리긴 했으나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한데 오늘 그녀가 반지를 끼고 오라고 말했다.

그 얘길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그녀는 모를 거다.


‘우리 혜주 날을 제대로 잡았네. 어디 장단 좀 맞춰 볼까.’

장지문 밖에서 잠깐 듣는 것만으로도 주원은 대강의 상황을 읽어냈다.

아니, 애초에 회식 장소로 이곳을 택할 때부터 어느 정도 그림은 그려졌지만.

문 안에서는 주원과 사귄다는 혜주의 말에 박장대소를 하는 팀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딱 들어가기 좋은 타이밍이라 주원은 주저 없이 장지문을 열었다.

드르륵-


“헐, 두 분 진짜 사귀는 사이예요?”

보란 듯 반지 낀 손으로 잔을 잡자 곧장 반응이 왔다.

주원은 이 상황을 꿈에도 몰랐던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했다. 혜주와 미리 입을 맞추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회사 생활 편하게 하고 싶다며. 제발 껴달라고 애원해도 안 받아주더니 웬일로 이쁜 짓을 했어?”

마치 혜주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이는 듯했으나 사실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한마디로 주원이 보여주려고 한 건 딱 하나였다.

이 연애에서 갑은 어디까지나 오혜주라는 것.


‘천하의 강주원을 벌벌 기게 만드는 여자가 오혜주다. 그러니 감히 함부로 대하지 마.’

주위는 대번에 충격에 휩싸였다.

털털한 오혜주와 칼주원. 언뜻 봐도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뒤에서 몰래 꽁냥거리고 있었다니!

지금껏 어떠한 낌새도 느끼지 못했기에 놀라움은 더 컸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는 가운데 다희가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거짓말! 지금 둘이 짜고 날 엿 먹이는 거잖아! 그날 혜주가 고백하려 했던 사람은 분명히 승원이었어……!”

혜주가 승원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녀 때문에 승원과의 관계가 파투났다는 전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다희는 필사적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거짓말쟁이가 될 수는 없어!’

진짜 거짓말쟁이는 내가 아니라 오혜주라는 걸 까발려야 했다.

다희는 사람들 사이를 휘적휘적 걸어가 주원의 소매를 붙들었다.


“그날 혜주가 고백하려 한 사람이 강승원이란 거 대표님도 알고 있잖아요! 상식적으로 유학 갔다가 그날 귀국한 사람한테 고백을 한다는 게 말이 돼요? 맞잖아요. 혜주는 그날 대표님이 귀국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고요!”

그러나.


“눈에 빤히 보이는 사실을 왜 자꾸 날조하는지 모르겠네.”

탁.

주원이 벌레를 떼어내듯 차갑게 손을 내쳤다.


“천다희 씨.”

 

 
주원의 싸늘한 눈과 마주한 순간 다희는 그만 어깨를 파르르 떨고 말았다.


“나랑 혜주가 십 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는 거 알죠. 우리의 십 년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해야 합니까?”

“두 사람, 분명 그때는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

“오혜주 씨와 나에 관한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를 타임라인 딱딱 맞게 브리핑이라도 해요? 아니면.”

사악하리만치 감정이 배제된 눈빛으로 주원이 말을 이었다.


“다 보는 앞에서 진하게 키스라도 해줘야 믿을 건가? 그럼 나야 고맙지만.”

주원이 한걸음 크게 다희에게 다가섰다.

정수리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우자 다희는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알았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거다. 설령 승원이 직접 이곳으로 와 사실을 말해준다 해도.


“모르고 떠든 거면 백 번 양보해 타이르는 수준으로 넘어갈 수 있어요. 알고서도 그러니 빡이 치네? 당신 나랑 혜주 사귀는 거 알고 있었잖아.”

주원은 불편한 심기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알면서도 자꾸 헛소릴 지껄이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 거 같아요. 응?”

누구 하나 잡아 죽일 듯 살벌한 기세였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입술만 벙긋거리던 다희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누구 하나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고, 누구 하나 상황을 중재해주지도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고슴도치처럼 그녀의 몸에 꽂혔다.


“흐윽……!”

다희는 압박감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룸을 뛰쳐나갔다.

열린 문 사이로 쫓아오는 시선이 우박처럼 등을 때렸다.

*

회식이 끝난 후.

직원들을 먼저 보낸 후 주원과 혜주는 자연스럽게 함께 집으로 향했다.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연애를 시작한 역사적인 날인데 이대로 헤어지긴 아쉽다며 혜주가 먼저 주원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와, 오빠 어떻게 딱 그 타이밍에 나타났어요? 오빠랑 사귄다고 대차게 질러놓긴 했는데 아무도 안 믿어줘서 등에서 식은땀이 났거든요. 오빠가 문 열고 딱 들어오는데 진짜 빛이 나더라고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무용담을 늘어놓는 혜주를 주원이 빤히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바라보는 시선엔 사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 내가 너무 업 됐나? 다희한테 너무했나 싶긴 한데 솔직히 통쾌하긴 하더라고요.”

“귀여워서 본 거야. 예뻐서.”

“피이…….”

혜주가 싫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그런데 나 아까 진짜 마음에 상처 입었잖아요. 강주원이 뭐 성역이라도 되나, 어떻게 그렇게 아무도 안 믿을 수가 있죠?”

“이유는 너도 알 텐데?”

물론 알긴 알지…….

하지만 대놓고 들으니 오기가 생기네.


“나도 오빠보다 잘난 구석 있거든요!”

“어디.”

“와…… 나 진짜 상처받았어. 각 잡고 한번 따져봐요?”

혜주가 입술을 삐죽이며 다섯 손가락을 쫙 뻗었다. 세세히 따져보면 얼추 다섯 개는 되겠지 싶어서.


“일단 내가 오빠보다 어리잖아요.”

“인정. 그리고?”

“어…… 성격도 좋죠. 아마도?”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그것도 인정해줄게. 또?”

“어…… 오빠보다 친구도 많을 것 같은데……요?”

세 번째 손가락을 접는데 현타가 온다.

아, 이제 나 친구 없구나.

게다가 네 번째가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나 안 해! 말할수록 비참해지는 기분이야. 다들 왜 안 믿었는지 알겠네요.”

혜주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중얼거렸다.


“사귀는 걸로도 이 난린데 나중에 결혼한다 그러면 다들 뒤집어지겠네.”

번쩍. 주원의 동공에 전구가 켜졌다.


“너 지금 결혼이라고 그랬다?”

“제가 ‘만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딴 말 안 했어.”

“‘나중’이라고는 했죠?”

“못 들었는데?”

“아닌데! 한 거 같은데!”

“만약이고 나중이고 간에 어쨌든 결혼은 한다는 거잖아, 나랑.”

와…… 나 제대로 물렸네.

혜주는 단단히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할 수도 있다는 것과 한다는 것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대표님.”

“불리할 때만 직원인 척하지 말고.”

“만약과 나중은 아주 높은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잖아요?”

“난 그 불확실성을 현실화할 수 있는 남자지.”

말발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굶주린 맹수에게 제 손으로 고깃덩어리를 던져준 혜주는 제 입을 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언제쯤으로 생각하는데?”

주원이 턱을 괴고 빙그레 웃었다.

혜주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대답을 망설였다.

솔직히 결혼이야 지금 당장 해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신이 없었다.

내로라하는 부잣집에 국밥집 딸이 가당키나 할 것이며 젊은 나이에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에게 대리 나부랭이가 어울리냔 말이다.

아까 직원들이 안 믿는 것만 봐도 그랬다.

결혼이란 게 급수 정해놓고 딱딱 맞춰서 하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비빌 수나 있어야 말이지.

너무 잘난 남자와 사귀다 보니 자존감이 팍팍 떨어진다.

괜히 결혼한다고 나섰다가 집안 반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딸 하나 키운다고 평생 손에서 물기 가실 날 없던 아빠에게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아서.


“결혼할 여자라고 날 데려가면 오빠 부모님은 뭐라고 하실 거 같아요?”

질문을 던지자마자 한숨이 먼저 나왔다.


“키, 외모, 가방끈, 재력 하나하나 따져보니 다 나보다 월등하네. 심지어 집안일도 더 잘해. 나 같아도 아까워서 못 주겠네요.”

홀로 답을 내리고 괴로워하는 혜주가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주원은 푹 떨군 혜주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들어 올렸다.


“걱정하는 게 그거였어?”

따뜻한 눈빛이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좀 울려보고도 싶지만.


“어렸을 때 맛이 궁금해서 흙을 파먹어 본 적이 있어. 어머니는 그때 채로 곱게 흙을 걸러주셨지.”

풀 죽은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파서 놀려먹을 수도 없었다.


“대단하시네요. 보통은 먹지 말라고 혼을 냈을 텐데.”

혜주는 영혼 없이 대꾸했다. 주원은 그녀와 눈을 맞춘 채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중학생 땐 과학고에 진학할 성적이 충분했는데도 일반고를 선택했어. 어머니는 그때도 반대하지 않으셨고.”

“진학과 결혼은 다른 문제잖아요. 진학은 잘못하면 돌이킬 수라도 있지 결혼은 그런 것도 아니고…….”

“인생의 큰 부분을 결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같아.”

주원이 진지하게 혜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 선택은 항상 옳아. 어머닌 나를 그런 사람으로 키우셨어.”

“오빠…….”

“내가 선택한 건 너야. 네가 날 선택해주길 기다리고 있고.”

어느 때보다 진심 가득한 음성에 혜주의 가슴이 일렁였다. 그의 확신은 혜주에게 결심할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를 사랑한다. 함께하고 싶다.

단순한 그 열망이 순식간에 끓는점에 도달했다.

사랑에 모든 걸 걸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언젠가, 누군가 그들의 앞에 거대한 장벽이 되어 나타나더라도 그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확실해.”

힘주어 말하는 그에게 대답해주고 싶었다.

꾹 다물려있던 그녀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