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나야말로 돌겠다, 혜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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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나야말로 돌겠다, 혜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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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나야말로 돌겠다, 혜주야
2023.03.26.
“생각해 볼게요.”
그건 혜주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였다.
나라면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주원과 달리, 그의 곁에 서면 작아지는 그녀는 그가 내민 손을 선뜻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디 가서 빼고 그런 캐릭터가 아닌데…….’
술자리에서 건네는 술 한 번 뺀 적 없는 혜주로서는 자꾸 자신감을 상실하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주원의 얼굴을 한 번 보면 납득이 되고.
“남자 애간장 녹이는 스킬이 장난 아니네.”
이해한다는 듯 시선으로 쓰다듬던 주원이 덥석 혜주의 허벅지를 안아 들었다.
“꺄악! 갑자기 뭐 하는 거예요?”
“결혼을 고민해야 할 정도로 매력 없는 놈이었네, 내가.”
성큼 소파에 그녀를 내려놓은 그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매력 발산 좀 하려고.”
마디 고운 손가락이 툭툭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내렸다.
첫 번째 단추가 풀리자 살짝 핏대가 선 목선이, 두 번째 단추가 풀리자 쭉 뻗은 쇄골이 드러났다.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남자의 몸은 신전에서나 볼 법한 완벽한 균형을 자랑했다.
잡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에 정확하게 커팅된 근육.
가슴이 웅장해진 혜주의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오늘 너 울릴 거야.”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왜 울려요오…….”
“잘못이 왜 없어?”
세 번째 단추가 풀리는 순간 주원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멀쩡한 놈을 집착남에 똥멍청이로 만들었으면 혼나야지, 혜주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자기 혼자 똥멍청이인 줄 아나……!”
항변은 입안으로 먹혀들어 갔다.
혜주의 턱을 쥔 채 그대로 키스한 주원이 흐트러진 스커트를 움켜쥐었다.
소파 위에 엉킨 둘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흘렀다.
사이사이 겹쳐진 허벅지의 은밀한 마찰에 혜주는 금세 달아올랐다.
‘오빠…….’
위에서 움직이는 그를 혜주가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뭔가에 집중할 때면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그의 얼굴이 미치게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안는 것처럼 굴다가도 망가트리려고 거칠게 달려드는 그가, 침대 위에서만 들을 수 있는 낮은 신음이, 오롯이 나만 볼 수 있는 흐트러짐이 좋았다.
그는 혜주 때문에 똥멍청이가 되었다 말하지만, 정작 똥멍청이가 된 건 혜주 자신이었다.
온종일 강주원 생각만 나고 오직 그만 보였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은 수심을 측정할 수 없는 해저처럼 깊었다.
그가 장난스러운 눈매로 ‘결혼할까?’ 물어오면 홀랑 넘어갈 뻔한 순간이 몇 번이고 있었다. 아니, 거의 항상 그랬다.
하지만 덥석 그의 손을 잡을 수 없는 마음 역시 진심이었다.
너무 사랑해서 겁이 난다는 말이 참 바보 같다고 느꼈었는데 이제는 알겠다. 그가 없이는 살 수가 없어서 가지기가 겁이 났다.
주원은 제대로 된 연애를 처음 해본다고 했다. 그건 혜주도 마찬가지였다.
타오르는 건 경험을 해 봤지만 불꽃이 꺼지는 순간은 경험해 보지 못했다.
어디서 들으니 사랑의 유효기간이 3년이라는데 적어도 그만큼은 사귀어보고 싶었다.
그럼에도 서로가 변하지 않는다면 조금 확신이 들려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그에게 안기는 순간이 좋았다.
그와 몸이 닿을 때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족쇄가 그와 자신을 묶은 듯했다.
주원이 흘린 땀방울이 입술 위로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쓰윽 혜주의 입술을 닦은 주원이 강하게 혜주를 밀어붙였다.
“조금만 더.”
혜주는 두 손으로 주원의 등을 꽉 안았다. 축축이 젖은 그의 살결이 손바닥에 착 감겼다.
“돌겠다, 혜주야.”
침대에서 듣는 그의 목소리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달콤했다.
혜주야. 하고 이름을 부를 때면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오빠……”
혜주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시트가 툭 아래로 떨어졌다.
어느덧 방 안엔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꽉 끌어안은 몸이 깊은 충족감으로 떨렸다.
*
개발팀과 미팅이 끝난 후 주원이 회식 장소로 이동한 그 시각.
승원은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오늘은 회식 참석하지 마.
개발팀 팀원들과 회사를 떠나기 전 주원이 조용히 승원을 불렀다.
왜? 되물으려는데 주원의 손가락에서 낯선 반지가 반짝였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그 반지를 보는데 왜인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적당히 핑계 대고 빠지라고.
주원이 승원의 어깨를 꽉 쥐었다 놓았다.
그건 분명 미안해하는 손길이었다. 배려였고 위로였고 보살핌이었다.
오늘 회식 자리에서 일어날 일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상냥한 배려. 형이 동생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매너였다.
‘반대로 말하면 오늘 회식 자리에서 무슨 일이 반드시 일어난단 소리겠지. 반지 낀 걸 보니 연애 사실을 공개하기라도 할 생각인가?’
승원은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실제로 혜주와 다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기대는 접었다.
그런데 희망이 사라졌다고 해서 마음까지 깨끗이 접히는 건 아니었다.
시시때때로 시선이 가고,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긴 터널을 지나는 그에게 혜주는 유일한 가로등이었다. 꽉 막힌 답답한 속을 털어놓고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되겠지.’
혜주가 만나는 남자가 주원이 아니었다면 글쎄. 한 번쯤은 더 매달려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혜주의 옆자리를 차지한 건 다름 아닌 그의 형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 다음으로 사랑하는 아빠 다음으로 사랑하는 형.
때론 친구로, 때론 원수로, 때론 경쟁 상대로 한평생을 나누었던 그의 형제.
누구보다 주원이 행복하길 바랐다. 형의 앞을 가로막는 바위가 있다면 몸이 부서져라 치워줄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그 바위가 자신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디로든 사라져버려야 하나.’
주원의 반지를 보고 놀라버린 자신에 자괴감을 느낀 승원은 퇴근하는 것도 잊은 채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마음은 대체 어떻게 접는 거야. 마음 접는 방법 알려주는 학원이 있으면 월급을 통째로 꼬라박아서라도 다닐 텐데.’
오혜주는 이 어려운 걸 대체 어떻게 해낸 거냐.
“돌아버리겠네, 진짜……,”
책상에 얼굴을 대고 누워 있는 잇새로 한숨이 흘렀다.
마치 바다 위를 표류하는 것 같았다.
목적도 없이 둥둥 떠다니다 예쁜 섬 하나를 발견했는데 아무리 헤엄쳐도 닿질 않아.
팔이 부서져라 가보고 싶은데 어느새 날아와 앉은 갈매기가 떡하니 섬을 차지하고 눈을 부라리는 것 같았다.
그만 꺼져, 승원아. 이미 게임 끝났다니까?
“후…… 집에 가서 배틀이나 때리자.”
술도 안 마셨는데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집에는 가야 하는데 일어나기는 싫고, 게임은 하고 싶은데 움직이기는 싫은 그런 상황.
한없이 무기력한 그의 눈에 깜깜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영이 보인 건 그때였다.
‘누구지?’
발소리를 죽이고 들어온 그림자가 불 꺼진 사무실을 둘러보는 듯했다.
승원은 기척을 낼까 하다가 괜히 아는 직원에게 붙잡혀 술자리에 끌려갈까 싶어 그만두었다.
‘회식 끝나고 가방이나 챙기러 왔겠지.’
있던 대로 책상에 머리를 푹 파묻고 눈알만 깜빡이는데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소리 없이 열렸다 닫히는 눈꺼풀에 낯익은 뒷모습이 비쳤다.
‘……천다희?’
승원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몸을 더 깊게 파묻었다. 그가 직접 공수해 온 게임용 의자는 등받이가 길고 넓은 편이라 몸을 숙이면 밖에선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희가 나갈 때까지 되도록 들키지 않을 작정이었다.
오늘 사업팀 회식이 있다고 들었다. 보나 마나 술 한잔 걸쳤을 테고, 운 나쁘게 마주치면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몰랐다.
차라리 원망이면 낫지, 다시 시작하자고 매달리기라도 하면…… 생각만으로도 골이 아팠다.
몸을 거의 구기다시피 해 의자에 파묻혀 있는 승원의 귓가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어지는 듯했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그러다 다시 멀어진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혜주의 자리에 우두커니 선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쟤 저기서 뭐해?’
개발팀과는 거리가 멀어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귀신처럼 서 있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다희는 이내 등을 돌려 사라졌다.
사무실 문이 완전히 닫힌 후에야 승원이 고개를 들었다.
“뭐야, 진짜.”
그는 다희가 사라진 자리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대체 혜주 자리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승원은 두리번거리며 혜주의 자리를 찾아갔다. 얼핏 보기에 달라진 점은 없는 것 같았다.
워낙 정리정돈과 거리가 먼 성격이라 책상 위는 예상처럼 너저분해서 딱히 가져갈 것도 없어 보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선 그때였다.
“너 거기서 뭐 해?”
“어억!”
등 뒤에서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에 승원은 기겁했다. 돌아보니 다희였다.
나간 줄 알았는데 언제 다시 돌아온 거지?
“뭐가 궁금한 건데. 왜, 내가 혜주한테 나쁜 짓이라도 했을까 봐 그래?”
다희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빈정댔다. 승원은 식겁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너 오늘 회식하는 날 아니야? 왜 여기에 있냐.”
“끝났어.”
“벌써?”
“다 끝났다고!”
다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데없는 고함에 어안이 벙벙한 승원의 귀로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라고!”
“뭐?”
“너만 아니었으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어. 내가 너 때문에 오늘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 때문에 그 수모를 당하고, 너 때문에 회사 생활도 못 하게 생겼잖아!”
“왜 그래, 다희야. 알아듣게 설명을 해.”
“설명하면 알아듣기는 해?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 주제에! 나 좀 봐달라고,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 넌!”
“술 많이 취했다, 다희야. 일단 나가자.”
“가려면 너 혼자 나가! 그냥 죽어버릴 거야.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데 살 이유가 뭐가 있어. 아무도 날 믿어주지 않는데 뭐하러 사냐고! 우욱! 우우욱!”
승원의 가슴을 때리며 울부짖던 다희가 격하게 헛구역질을 했다.
“야, 천다희, 괜찮아?”
깜짝 놀란 승원이 다희의 등을 두드렸다.
“저리 가. 네가 제일 나쁜 놈이야, 우우욱……!”
한참이나 몸을 웅크린 채 헛구역질을 계속하는 다희의 옆에서 승원은 안절부절못하고 서성였다.
‘스트레스가 많긴 했나 보네. 무슨 헛구역질을 임산부처럼…….’
“!”
속으로 생각하던 승원의 척추에 오소소 살얼음이 꼈다.
불현듯 떠오른 어떤 밤의 기억. 대충 날짜를 계산해보니 가슴이 쿵 곤두박질친다.
승원은 입을 틀어막고 괴로워하는 다희의 어깨를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너 지난달에 생리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