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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미친 건 너지, 천다희 (87/121)


#87. 미친 건 너지, 천다희
2023.03.30.



 
다음 날 아침.

주원과 혜주는 아침부터 티격태격이었다.


“내 차 타고 같이 가자니까.”

“둘이 나란히 출근하면 밤새 같이 있었단 얘기밖에 더 돼요? 회사에 눈이 몇 갠데 오빠 차 타고 가다가 들키면 어쩌라고요.”

“지금쯤이면 회사에 소문 다 퍼졌을 거야. 숨길 거 있어?”

“숨기자는 게 아니라 정도를 지키자는 거죠. 회사에선 남남으로 삽시다, 제발.”

“커플링도 나눠 낀 사이에 야박하네.”

죽어도 따로 가겠다는 혜주의 고집에 주원의 미간에 빗금이 쫙 생겼다.

아니, 멀쩡한 차 놔두고 왜 버스를 타냐고.

어제 회식 자리에서 사귄다고 공표했으니 이미 회사엔 소문이 쫙 퍼졌을 터였다.

이제 굳이 숨길 이유도 없는데 어째서 마다하는지 주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오늘 너랑 출근하려고 타이도 맸어.”

“같이 출근하는 거랑 넥타이랑 무슨 상관이죠?”

“갖춰 입었다고. 너 우쭐하게 해주려고.”

“아니, 그러니까 오빠가 넥타이 맨 거랑 내 우쭐이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이 정도면 자랑할 법하지 않아?”

잘난 얼굴을 치켜들며 하는 말에 혜주는 웃음이 터졌다.


‘갈수록 귀여워지네. 조만간 우유 냄새 날 거 같아.’

사촌 조카가 티니핑 원피스 입었을 때 그렇게나 으스대던데 딱 수준이 똑같았다.


“오빠의 멋진 모습은 나만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넥타이는 넣어 두고요.”

사촌 조카를 달랬던 경험을 떠올리며 쪽! 뺨에 뽀뽀를 날린 혜주가 냉큼 줄행랑쳤다.


“그럼 이따 회사에서 봐요!”

“굿바이 키스는!”

“몇 분 있다 어차피 다시 만날 건데요, 뭘.”

“진짜 간다고?”

달칵. 타악!

……진짜로 갔네.

쪼옥도 아니고 추웁도 아니고 ‘쪽’이 뭐냐.

하나 마나 한 볼 뽀뽀만 남기고 내빼다니.


“오혜주 안 되겠네.”

손에 쥐었다 싶으면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도망가버리니 주원은 애가 타다 못해 전투 본능이 끓어올랐다.


“요새 내가 너무 풀어줬지.”

목에서 넥타이를 단번에 풀어버린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핥았다.

그렇게 내뺄 땐 적어도 립스틱 맛은 보게 해 줬어야지.

상큼한 자몽향이 날 것 같던 도톰한 입술을 떠올리며 주원이 고개를 툭툭 꺾었다.

그의 뇌리론 혜주를 대표실로 불러들일 구실이 열한 개쯤 떠다니고 있었다.

*

출근 태그를 찍고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주원은 낯선 광경을 목격했다.

평소 같으면 각자 자리에서 업무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공교롭게도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혜주의 자리였다.

혜주는 한창 버스를 타고 오고 있을 텐데.

자리에도 없는 사람 책상에 직원들이 모여 있다는 건 뭔가 이슈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주원은 몹시 찜찜한 기분으로 인파를 헤쳤다.


“여기 혜주 씨 금붕어가…….”

그중 한 명이 떨리는 손으로 어항을 가리켰다. 주원은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


“…….”

순간적으로 간담이 서늘해진 건 아무리 주원이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항 안엔 배를 까뒤집은 금붕어 두 마리가 둥둥 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저희도 모르겠어요. 아침에 출근해보니 이렇게 되어 있어서 다들 많이 놀랐거든요. 혜주 씨 옆자리 직원이 제일 먼저 발견했는데 보자마자 속이 안 좋다고 화장실로 달려갔어요.”

“비켜봐요.”

주원이 거리낌 없이 어항에 코를 가져다 댔다. 알싸한 소독약 냄새가 훅 끼쳤다.

살짝 어항을 흔들어보니 찰랑찰랑 물이 흔들렸다.


“점도는 없고 색도 없군. 냄새로 보면 구강청결제 같기도 한데.”

대담한 그의 행동에 주변 직원들이 술렁였다.

간담이 콩알만 한 몇몇은 차마 쳐다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대체 누가 이딴 짓거리를 한 거냐는 구태의연한 질문은 하지도 않았다. 이딴 짓을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주원은 서늘한 눈매로 다희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이 딴 세상 이야기인 양 그녀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분주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에 속에서 욕지기가 치밀었다.


“죽여버릴까, 진짜.”

음흉한 인간이란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혜주를 친구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방법으로 해를 끼치지는 않길 바랐다.

당장에 어항으로 뚝배기를 깨버리고 싶은 욕구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꾹 참은 주원의 두뇌가 여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했다.


‘저걸 어떻게 족쳐야 성에 차려나.’

이성적으로, 합법적으로, 그리고 뒤탈 없게 깔끔히 처리하기 위한 갖가지 시나리오가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문 쪽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 제 자리에서 다들 뭐 하세요?”

뛰어왔는지 조금 숨을 헐떡이는 혜주였다.

사람들 사이에 있는 주원을 보고 복사꽃이 만개한 듯 해사한 얼굴로 미소를 지은 그녀가 서둘러 표정을 정리하고 다가왔다.

주원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휙 어항을 가렸다.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혜주의 두 눈으로 확인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왜 다들 모여 있어요? 이게 왜…….”

자리에 다다른 혜주가 어항 위에 덮인 옷을 보고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보지 마.’

주원의 간절한 바람에도 혜주의 시선은 저절로 어항에 닿았다. 옷에 가려진 어항을 본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오혜주 씨.”

“괜찮아요. 그냥 두세요.”

앞을 가로막은 주원의 손을 혜주가 밀어냈다.

이윽고 목도한 상황에 혜주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흐읍……!”

옷으로 가려놓은 걸 보고 대충 상황은 짐작했지만 배를 까뒤집은 채 죽어 있는 금붕어를 보니 강한 충격이 왔다.

혜주의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언제부터 이랬어요?”

“그게 우리도 잘…… 아침에 와보니 죽어 있었어. 대표님이 방금 그러시는데 소독약 냄새 같은 게 난다고…… 안 보는 사이에 누가 약품 같은 걸 부었나 봐.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밝혀내야 할 텐데, 원.”

“밝힐 필요 없어요. 내가 아니까.”

성큼성큼.

혜주가 두 손으로 어항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다희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모니터를 보는 척하고 있던 다희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쏴아아아.

혜주가 어항 물을 다희의 정수리에 들이부었다.


“꺄아아아아악!”

 

 
다희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박찼다.

약품 냄새가 나는 물과 축 늘어진 금붕어가 그녀의 스커트를 타고 흘렀다.


“아, 어떡해!”

다희는 꼬리에 불이 붙은 여우처럼 혼비백산해 제자리를 방방 뛰었다.


“허억!”

“세상에!”

전대미문의 어항 테러에 직원들 모두 입을 틀어막았다. 이 정도면 직원 백여 명인 작은 회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중 최고봉의 스펙터클함이었다.

이 자리에서 놀라지 않은 건 주원 한 명뿐이었다.


‘나이스샷.’

지켜보던 주원의 입꼬리가 픽 말려 올라갔다.


‘오혜주 진짜 골 때린다니까.’

아까 잠깐 뇌리를 스쳤던 상상을 이토록 정확하게 실현시켜주다니, 역시 세상에 하나뿐인 여자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속이 뻥 뚫리는 기분에 주원은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야, 너 미쳤어? 이게 대체 무슨 행패야!”

어항 물을 흠뻑 뒤집어쓴 다희가 실성 직전의 상태로 고함쳤다.

혜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미친 건 너지, 천다희.”

뚝뚝 물을 흘리며 노려보는 다희를 향해 그녀가 씹어뱉듯 말했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 뒤에서 헛소리를 하고 다니든 이간질을 하든 참아줄 수 있다고. 하지만 생명을 죽이다니, 이건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었지. 너 나하고 원수졌니? 왜 이렇게까지 해?”

“내가 안 했어.”

“아니, 너야.”

혜주는 흔들림이 없었다.


“나 아니라고 했잖아! 나를 원수로 생각하는 건 너 아니야? 증거도 없이 사람을 막 몰아붙이고 그러는 거 범죄야! 내가 가만 있을 줄 알아? ”

“내가 증거도 없이 몰아붙였을까 봐.”

혜주가 시린 눈동자로 노려보며 무언가를 툭 던졌다.

그건 휴대용 구강청결제 뚜껑에 붙어 있는 비닐이었다.


“이게 왜 내 자리에 있을까?”

다희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차.’

그녀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비닐엔 제품의 로고가 고스란히 인쇄되어 있었다. 새 제품의 뚜껑을 열 때 반드시 먼저 제거해야 하는 비닐인데, 어두운 곳에서 뜯다 보니 그 자리에 흘린 모양이었다.


“이게 뭔데?”

다희는 염소처럼 목소리를 쥐어짰다. 끝까지 우기는 그녀를 혜주가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적혀 있네. 라브레스, 오렌지향이라고.”

“…….”

“너 입안 예민해서 구강청결제는 이거밖에 못 쓰잖아. 한국에서 안 파는 거라 해외 직구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나한테 대리 결제도 부탁했었잖아. 까먹었니?”

다희의 아래턱이 움푹 파였다. 얼마나 어금니를 꽉 깨물었는지 턱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에 조소 어린 혜주의 얼굴이 보였다.

예전의 어리바리하던 오혜주가 아니었다. 속이면 속아주고 가로채도 웃어주던 친구는 이 자리에 없었다.


“…….”

다희는 울먹이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적막이 송곳처럼 폐부를 찔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다희를 범인이라 단정 짓는 듯했다.

그녀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욱 팀장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 보니 절망감이 짙어졌다.


“난…… 나는…….”

땅으로 꺼지고 싶다는 기분이 이런 거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외딴 섬처럼 고립된 그녀는 끊임없이 “나 아니야…….”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그때 뒤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승원이 나섰다.


“그만둬, 혜주야. 다희 아니야.”

“……뭐?”

갑자기 튀어나온 그를 보고 혜주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이 타이밍에 강승원이 왜 튀어나와?


“내가 어제 회사에 있었어. 그 시간에 다희가 온 건 맞는데 네 자리 근처엔 가지도 않았어.”

혜주는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구강청결제 비닐을 가리켰다.

승원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대꾸했다.


“일과 중에 떨어뜨렸을 수도 있잖아. 둘이 같은 팀이니까 서류도 오갔을 테고. 그사이에 끼어 있던 걸 수도 있지.”

“야, 너…….”

“일단 나가자, 다희야.”

승원이 다희의 손목을 붙잡았다.

돌발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 이제야 편이 생긴 다희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나 너무 억울해. 진짜 나 아니야, 승원아…….”

“나오라고.”

승원은 표정 없이 다희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주위의 술렁임이 커졌다. 승원은 주변 반응에 아랑곳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걷는 길을 따라 홍해처럼 인파가 갈라졌다.

다희의 손을 끌고 사무실을 나서려는 그때.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작 그만.”

그때까지 팔짱을 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주원이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창틀에서 스르륵 엉덩이를 뗀 그가 뚜벅뚜벅 걸어와 승원의 앞에 섰다.


“니들 쌍으로 뭐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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