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결심했어. 나 흑화할 거야
(88/121)
88. 결심했어. 나 흑화할 거야
(88/121)
#88. 결심했어. 나 흑화할 거야
2023.04.02.
주원은 지금껏 회사에서 단 한 번도 승원을 사적으로 대해본 적 없었다.
두 사람이 형제 관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해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늘 선을 유지했다 자부했다.
그런 그가 내뱉은 싸늘한 실소에 승원의 걸음이 멈춰 섰다.
“……형.”
주원은 승원을 똑바로 노려본 채 모두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욱 팀장, 어제 출퇴근 기록지 프린트해서 가져와요. 명환 씨는 CCTV 돌리시고.”
“저, 대표님. CCTV 돌려봐야 소용없지 않나요? 우리 회사 CCTV는 출입구만 찍혀 있어서 범인이 찍히지는 않았을 텐데요.”
“출입구만 찍고 있다고 누가 그래.”
쭈뼛대는 명환에게 주원이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바꿔놨는데.”
다희의 눈물이 뚝 멈추었다. 승원이 손을 잡았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바꿔놨다고요? 대체 언제…….”
“사무실에서 두 사람 사진이 발견된 날.”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눈빛이 다희를 직격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질 떨어지는 자. 작. 극. 이라니.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다시 일어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다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 주원의 말은 어항에 구강청결제를 부은 걸로 모자라 예전의 치부까지 모조리 들춰내는 것이었다.
승원과 다희의 열애 사실이 알려진 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사진이 그저 다희의 실수인 줄로만 알았던 직원들이 입을 가리고 수군거렸다.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내가 그런 거 아니야!”
끝까지 발악하며 범행을 부인하던 다희는 명환이 CCTV 메모리 칩을 주원에게 건넨 무렵 거의 실성했다.
“거짓말을 한 건 내가 아니고 오혜주예요! 강주원이랑 짜고 나를 골탕 먹이는 거라고요. 처음부터 강승원 좋아해 놓고 아니라고 우기고 나만 미친X 만들고! 쟤가 어제 회식에서 했던 말 다 거짓말이라고요! 잘못은 쟤가 했는데 다들 나한테 왜 그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다희가 울부짖으며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CCTV를 까보기도 전에 범인임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었다.
다희의 행동에 모두가 충격에 빠져들었다.
자멸이었다.
*
주원은 대표실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했다.
커다란 모니터엔 명환이 건네준 CCTV 화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9시 23분, 천다희 출입. 9시 31분, 천다희 강승원 동시 퇴근.”
그가 입술을 굴리며 내용을 곱씹었다.
CCTV에 찍힌 장면은 모두 앞에서 공언한 것과 달리 출입구만 찍혀 있었다. 애초에 CCTV 카메라를 사무실 안쪽으로 돌려놓았다는 말은 거짓이었으니 당연했다.
‘좀만 더 버텼으면 그쪽이 이기는 게임이 될 수도 있었는데. 천다희 인내심이 얄팍할 줄 알았지.’
주원은 CCTV가 사무실 안쪽까지 비추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난번 사진 자작극 이후 바꿔 놓을까 생각도 했지만 직원들 동의 없이 진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독단적으로 결정했다간 대표가 업무 시간을 염탐한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고.
장고 끝에 잠시 보류했던 일을 이렇게 꺼내 쓴 건 다희의 심리적 압박감을 교묘히 공략한 계략이었다.
명환이 CCTV 메모리 칩을 꺼내오는 순간부터 주원은 시시각각 변하는 다희의 표정을 관찰했다.
노트북을 가져오라 말한 후 메모리 칩을 꽂고 파일을 여는 일련의 작업을 일부러 느리게 진행하며 다희의 똥줄을 타게 했다.
‘이쯤 되면 무너질 때가 됐는데.’
서서히 일그러지던 다희의 얼굴은 주원이 메모리 칩을 받아든 순간 완전히 무너졌다. 절규하며 마지막 발악을 하는 그녀를 보며 확신했다.
‘이겼군.’
어찌 보면 모험이라고 할 만했다. 만약 다희가 CCTV가 재생된 순간까지 버텼다면 망신을 당하는 건 주원이었다.
만약 그 자리에 있는 게 다희가 아니라 승원이었다면 주원은 절대 같은 방법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신중하고 우직하고, 그만큼 굼뜬 승원이라면 끝까지 버텼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건 다희의 성급함을 믿고 던진 패였다.
완벽히 적중한 계략에 짜릿함을 느낀 것도 잠시, 주원은 급격히 고민에 빠져들었다.
저걸 어떻게 자른담.
주원이 사칙이 명시된 서류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성격 같아서는 바로 잘라버리고 싶은데 사칙을 검토해보니 다희의 행동이 권고사직의 요건에 충족하지 않았다.
사칙에 명시된 권고사직 요건은 회사의 이익에 반하거나 중대한 손실을 발생시킨 경우, 혹은 형사 처벌을 받을 만큼의 중대한 비위로 한정하고 있어, 다른 직원의 금붕어를 훼손시킨 정도로는 자를 수가 없었다.
‘정부의 투자를 받는 기업으로 구설수에 오를 수는 없는 노릇인데.’
행여 섣불리 잘랐다가 다희가 문제를 제기라도 하면 문제가 심각해질 터였다.
그렇다고 시커먼 다희의 속내를 목도해놓고 손 놓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괘씸한 걸로 모자라 언제든 혜주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위험한 존재를 혜주 근처에 두기 싫었다.
“골치 아프네. 그나저나 강승원 이 미친놈은 갑자기 웬 삽질이야?”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짧게 한숨을 내쉬던 주원이 문득 승원을 떠올렸다.
아까 승원이 다희의 편을 들며 나서던 순간 내색하진 않았지만 속으론 가슴이 철렁했다.
에어컨 빵빵한 데서 더위를 먹었을 리도 없고, 없던 애정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도 없고.
승원의 성격상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끼어들었을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난데.
‘이 X끼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거 아니야?’
불현듯 승원이 걱정스러웠다.
주원은 심란한 표정으로 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었다. 그리고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
여러모로 복잡한 저녁.
주원은 소파에 길게 누워 하품을 했다.
“아…… 간만에 피곤하네.”
다희의 문제도 그렇고 승원의 문제도 그렇고, 생각할수록 골치가 지끈거렸다.
특히 승원을 떠올리면 넥타이를 꽉 조인 것처럼 목이 답답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한데, 하나 있는 동생이란 놈이 하늘 같은 형님의 전화를 몇 통이나 씹는 건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 X끼 진짜 뒤지게 패주고 싶네.’
주원은 쿠션을 승원의 등짝이라도 되는 양 주먹으로 퍽퍽 두드렸다.
“얘는 또 왜 이렇게 안 와.”
주원은 열 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보며 눈썹을 힐끗 올렸다. 퇴근 후 집에 들렀다가 오겠다던 혜주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많이 놀랐을 그녀를 달래준다는 핑계로 집으로 불러들이는 건 성공했는데 밤이 늦도록 함흥차사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옷만 갈아입고 온다더니 뭔 옷을 지어 입고 있나.’
방 한구석에서 누에를 칠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슬슬 들 때쯤 혜주가 도착했다.
“뭐 하고 왔어? 심심해 죽을 뻔했잖아.”
오매불망 기다리던 님에게 쪼르르 달려가 덥석 껴안는데 생각보다 덩치 차이가 큰지라 혜주가 휘청했다.
“다행히 안 죽었네요. 둥이랑 둥둥이 묻어주고 왔어요.”
“그게 뭔데.”
“내 금붕어요.”
그것도 모르냐는 듯 혜주가 눈을 흘겼다.
주원은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새 이름도 지은 줄은 몰랐네.”
“큰 애가 둥이, 작은 애가 둥둥이에요.”
“똑같은 크기로 샀는데.”
“자세히 보면 조금 달라요.”
조금 울었는지 혜주의 눈가가 그늘져 있었다. 퇴근 무렵까지 씩씩해 보이기에 괜찮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깟 금붕어 다시 사면 되지. 수족관으로 도배해 줄 수도 있어.”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예요?”
혜주의 미간에 빗금이 두 개나 그려졌다.
어…… 저거 위험한데.
주원은 눈치를 살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취향에도 없는 수족관으로 집을 도배해주겠다고까지 하는데 왜 성질을 내냐.
잘 모르겠을 때는 침묵이 상책이다.
“수족관으로 도배를 해도 둥이랑 둥둥이는 없잖아요. 그게 너무 화가 나요.”
혜주가 등을 웅크리며 씁쓸히 중얼거렸다.
고작 금붕어 두 마리.
주원에게 고작이었던 그것이 혜주에겐 꽤 애틋한 의미였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그걸 보며 주원을 떠올렸고, 닮은 구석을 찾아내려 애썼고,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행복했으니까.
주원은 속상해하는 혜주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내 가슴이 다 아프다.”
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둥이, 둥둥이의 마지막이 무척 고통스러웠을 거라 생각하니 아직도 마음이 아팠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천다희 나쁜 계집애.’
생각할수록 무서운 사람이었다. 친구일 때는 몰랐던 그녀의 시커먼 속내가 이제는 똑똑히 보였다.
주원이 여러모로 방법을 강구하곤 있지만 당장 자를 수는 없다고 한다.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도 없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담.
한참을 시무룩하게 앉아 있던 혜주가 불현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결심했어. 나 흑화할 거야.”
“후카?”
순간적으로 주원은 물담배를 떠올렸다. 유학 시절 학교 앞에 유명한 인도 음식점이 있었는데 그곳에 가면 다들 항아리를 하나씩 끼고 후카를 했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담배를 떠올리냐. 안쓰러워 죽겠네, 우리 혜주.
“왜 웃어요?”
“답지 않게 별 걸 다한다 싶어서.”
“왜요, 나는 뭐 흑화하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어요?”
“안 어울리니까 그렇지. 그렇게 하고 싶어?”
“무조건이요. 나 진짜 오늘 너무 열 받았다고요. 어항 들이부은 걸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요!”
잠시 고민하던 주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랍을 뒤져 한참 피우지 않던 담배를 꺼낸 그가 툭 케이스를 두드려 한 개비를 꺼냈다.
“정 답답하면 하나 피우든가.”
아닌 밤중에 봉창도 유분수지, 갑자기 웬 담배?
혜주의 동공이 좌우로 진동했다. 뭔가 커뮤니케이션에 오류가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대신 딱 하나만이야. 건강에 해로워.”
나는 아주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남자라는 듯 어깨를 우쭐하는 모습에 거대한 충격이 밀려온다.
“……설마 흑화 뜻 몰라요?”
진짜 설마설마했는데.
“안다니까. 대학 다닐 때 자주 했었어.”
……망할 놈의 세대 차이만 확인했다.
“그래서 흑화 뜻이 뭔데요?”
흑. 화. 를 똑똑히 발음하자 주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모르긴 몰라도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