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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그럼 몸으로 때워 (89/121)


#89. 그럼 몸으로 때워
2023.04.06.



“그래서 흑화 뜻이 뭔데요?”

짧은 시간, 치열한 갈등이 머릿속을 휩쓴다.

신조어 같은데 모른다고 하면 비웃음을 살 것 같고, 안다고 했다가 틀리면 쪽팔릴 것 같고.


‘그래도 비웃음을 사는 것보다야 쪽팔린 게 낫지 않나? 아니다, 사나이 체면에 쪽팔리는 건 참을 수 없지. 아니야, 아니야, 모른다고 하면 100퍼센트지만 일단 아무거나 던져보고 맞으면 땡 잡은 거잖아.’

확률은 반반이다. 가자, 강주원!


“그걸 왜 몰라.”

마음의 결정을 내린 주원이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시크하게 대꾸했다.


“검은 꽃이잖아. 일명 흑장미.”

“미친!”

혜주는 배꼽을 잡고 소파를 뒹굴었다.


“큭큭, 흑장미가 뭐야. 와, 오빠 때문에 하루 치 근심 걱정이 사라지네.”

“아니야?”

“그럼 맞겠어요?”

그 와중에 정답을 확신한 듯 자신만만한 태도가 더 웃겼다.

바닥을 치며 눈물이 날 정도로 웃던 혜주가 손바닥을 내밀었다.


“폰 줘봐요.”

“폰은 왜.”

“2G 폰인가 보게.”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놀리자 드물게 주원의 목덜미가 벌게졌다.


“유학파라 그래.”

“뉘에뉘에, 그러시겠죠.”

“이게 까분다.”

“까불긴요. 흑화한 건데요. 흑. 화!”

이쯤 되니 흑화가 흑장미가 아닌 것쯤은 알겠다.

뉘앙스에서 풍겨오는 진한 복수의 느낌에 대충 뜻을 알아차린 주원이 혜주의 발목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야, 너 이리 와.”

“싫은데요. 도망가면 어쩔 건데요.”

“잡히면 너 진짜 가만 안 둬.”

발바닥을 파닥거리며 벗어난 혜주가 얼른 안방으로 내뺐다.

문을 잠그고 본격적으로 놀려보려는데 아뿔싸, 문틈 사이로 커다란 손이 턱 들어왔다.


“헉.”

“숨는 게 미숙하네, 우리 혜주.”

하필이면 침대 있는 쪽으로 도망치다니.

주원이 으스스한 눈으로 혜주를 쳐다보았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혜주는 잘못 걸렸다는 걸 알았다.


“흑화는 너만 하는 줄 알아?”

한 발.


“진정한 흑화가 뭔지 보여줄게, 혜주야.”

또 한 발.

정확히 두 걸음 만에 당도한 그가 혜주를 번쩍 안아 올렸다.


“꺄악!”

마른 장작처럼 침대에 던져진 그녀의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겹쳐졌다.

단단한 허벅지로 옴짝달싹 못 하게 혜주를 가둔 주원이 타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대충 이런 상황이 흑화 맞지?”

“잘못했어요…….”

매번 느끼는 거지만 근육으로 무장한 남자의 몸은 그저 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다.

이 남자가 나를 해할 것도, 다치게 할 것도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가 움직이는 순간 아무 저항도 먹히지 않을 거란 사실을 새삼 실감하는 탓이다.


‘괜히 놀렸어…….’

먹잇감을 눈앞에 눈 포식자처럼 입맛을 다시는 그를 보며 혜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오늘 밤도 쉽지 않겠네.

십 년 넘게 체력을 단련한 주원에 비해 그녀의 체력은 너무나 비루했다. 한 번 하면 기절하기 일보 직전까지 몰아치는 그를 떠올리니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정말 잘못했어?”

“네!”

낮은 목소리로 묻는 말에 혜주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꼬리가 유려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럼 몸으로 때워.”

커다란 손이 혜주의 두 손을 그러쥔 채 머리 위로 찍어 눌렀다.

뭐라고 항변하려던 혜주의 입술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듯 그의 입안으로 먹혀들어 가고, 작게 움직이던 허리가 그의 허벅지 사이에 꽉 붙들렸다.

주원은 놀림당한 값을 단단히 받아내려는 듯 거침이 없었다.

뜨거운 살결에 입술이 마찰했다. 그가 지나칠 때마다 예민해진 피부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잔뜩 융기된 솜털 위로 진득한 숨결이 내려앉았다.

손가락부터 발가락까지, 드러난 모든 곳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봉긋한 살갗에도, 푹 들어간 쇄골에도, 날씬하게 뻗은 종아리에도.

그가 예민한 곳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혜주의 숨이 점점 짧아졌다.


“이건 흑화가 아닌데요, 오빠…….”

전율이 일 정도로 녹진한 손길에 순식간에 온몸이 나른해졌다.

가느다란 팔로 목을 감아오며 채근하는 듯한 몸짓에 주원의 허벅지가 단단해졌다.


“좋아?”

울먹이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찌푸린 그 얼굴이 나를 미치게 한다는 걸 알까.

오혜주 모든 게 예쁘지만 침대에서 보는 저 표정은 정말이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주원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꺾어 쥐고 싶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돌아누워.”

주원이 혜주의 허리를 쥐고 단숨에 그녀를 돌려 눕혔다.

은은한 조명 아래 드러난 아찔한 곡선을 따라 음미하듯 입을 맞춘 그가 날개뼈 부위를 살짝 깨물었다.


“아!”

 

 
아까완 확연히 다른 쾌감이 짓쳐 들었다.

이불을 꽉 쥔 채 신음만 흘리는 혜주의 엉덩이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제 혼나야지, 혜주야.”

주원이 버클을 풀며 혜주의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이내 혜주의 잇새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

깊은 새벽.

혜주는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


“아, 목이 왜 이렇게 칼칼해.”

밤새 이어진 주원의 ‘흑화’에 하도 울먹이다 보니 목소리가 쉬어버렸다. 혜주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잠든 주원을 흘겨보았다.


“하여간 적당히를 모른다니까.”

물을 마시려고 몸을 꼼지락거리니 주원이 어깨를 꽉 껴안았다. 잠결에도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참 대단했다.

혜주는 가슴에 끌어안긴 채 주원을 올려다보았다.

낮게 내쉬는 숨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더욱 뚜렷한 윤곽이 보였다.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 날카롭게 뻗은 콧날, 지난밤의 만행이 고스란히 각인된 도톰한 입술.

새벽녘인데도 붓기 하나 없는 이목구비가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손을 뻗어 가만히 만져보니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조각상이 숨을 쉬네.’

혜주는 살짝 웃으며 주원의 뺨을 어루만졌다. 하얗고 깨끗해 차갑기만 할 것 같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남다른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곁에서 자고 있는 이 현실이 믿기지 않다가도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체온을 어루만지면 실감이 났다.


‘이 남자가 내 남자구나. 오혜주 진짜 땡 잡았네.’

믿기지 않는 행운은 어느덧 일상이 되었지만 가끔 이렇게 들여다보면 한없이 가슴이 벅찼다.

그의 모든 게 좋았다.

이야기할 때 “응.” 하며 눈을 맞추고 귀 기울여주는 것도,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것도, 그냥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좋았다.

다음 생에는 더 빨리 만나서 손 꼭 잡고 같은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혜주는 조금 찌푸린 주원의 미간을 곧게 펴준 후 살금살금 침대에서 나왔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시고 나니 잠이 조금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가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평일엔 그렇게 알람을 맞추고 자도 일어나기 힘든데 주말만 되면 왜 이렇게 눈이 빨리 떠지는지.

다시 잠을 청할까 잠시 고민한 혜주가 발코니 문을 열고 나갔다.

발코니에서 보는 아침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저 멀리 구름을 뚫고 동이 터오는 하늘 아래로 샹들리에처럼 불이 켜진 빌딩들이 보였다.


“아, 좋다.”

혜주는 발코니에 놓인 하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혔다. 푹신한 등받이에 기대니 온몸의 근육이 편안히 이완되었다.

창가에 걸어둔 허브 주머니에서 나는 상쾌한 향기와 적당히 들려오는 차량 소음.

주말 아침을 즐기기에 더없이 완벽한 장소였다.


‘승원이가 살 땐 완전 돼지우리라서 몰랐는데 이 발코니 진짜 끝내주네.’

이 집에 주원이 들어오기 전, 일명 ‘아지트’였을 때 이곳은 창고나 다름없었다. 모니터며 겨울옷이며 겹겹이 쌓인 물건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지.

해가 바뀔 때마다 종종 발코니를 치워주긴 했는데 여름이 지나면 어김없이 돼지우리가 되었었다.

지금은 옛일이 되어버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강승원 뭐가 좋다고 그렇게 따라다녔는지 모르겠네. 완전 우렁각시가 따로 없었어.’

승원을 좋아했던 한때의 감정은 어느새 추억이 되었다. 그렇게 오래 좋아했는데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저만치 밀려난 감정이었다.


“자다가 왜 나왔어.”

어느새 잠에서 깬 주원이 까치집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나왔다.

강주원의 모든 게 사랑스럽지만 저렇게 부스스한 모습은 정말이지 꽉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나만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더 애착이 가는 건가?


“물 마시고 싶어서요. 오빠는 왜 나왔어요?”

“옆구리가 허전해서.”

주원이 발코니 문을 열고 털썩 의자에 앉았다.


“앞으론 물 마시고 싶으면 나 깨워. 혼자 나오지 말고.”

“피이, 여기가 위험한 데도 아니고 물 정도는 혼자 마실 수 있거든요?”

“위험한 데가 아니라고 누가 그래.”

하긴, 그것도 그렇네.

간밤의 여파가 남은 울긋불긋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혜주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승원인 아직 연락 없죠?”

“응.”

“회사엔 나올지 모르겠네요. 걔 잠수 타면 답 없는데.”

“아주 더럽게 얽힌 것 같아. 이유 없이 그럴 놈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죠. 다희한테 약점이라도 잡힌 건 아닐까 걱정이네요.”

문득 주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너.”

“네?”

“왜 해도 뜨기 전부터 강승원 걱정하냐.”

혜주는 말문이 턱 막혔다.


“와……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이건 강승원 걱정이 아니라, 어, 그래, 오빠 가족이잖아요! 오빠 가족이니까 걱정하는 거죠!”

“내 가족이라 걱정한 거다?”

“당연하죠!”

“이게 어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이게 말이 아니면 뭔가요. 아니, 질투도 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는 거지, 뭐 이런 걸로…….


“안 되겠다, 딴 놈 생각 못 하게 달달 볶아줘야지.”

벌떡 일어난 주원이 뒤에서 혜주를 꽉 껴안았다.

난간에 두 손을 올리고 창밖을 구경하던 혜주는 단단한 것이 허리를 찌르자 화들짝 놀라 손을 휘둘렀다.


“뭐야, 이건?”

“윽!”

주원이 그대로 고꾸라지는 걸 보고서야 혜주는 그것이 주원의 신체 일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헉, 오빠, 괜찮아요?”

세상에나. 사람 몸이 저렇게 단단해질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네.

마치 등을 공격당하는 기분이었어…….


“……오혜주. 불만 있으면 말로 해라.”

주원이 새우처럼 등을 구부린 채로 싸하게 혜주를 노려보았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거든요? 새벽 댓바람부터 그 상태일 줄은 몰랐죠…….”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내 열정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

“열정이 참 과하시네요…… 그나저나 괜찮아요?”

“아파.”

주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능이 멀쩡한지는 사용을 해봐야 알겠는데.”

“!”

본능적인 위기감에 혜주가 뒷걸음질을 쳤다.

평화로운 주말 아침을 깨부수는 짐승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하자, 기능 점검.”

그가 씩 웃는 순간 혜주는 덫에 걸렸다는 걸 깨달았다.

간밤에 쉬어버린 목이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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