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두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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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두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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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두 줄이야
2023.04.09.
다희에게 혜주는 빛이었다.
좋아 보이고, 따뜻해 보여서 기를 써서라도 가까이하고 싶은 빛.
그러나 다가갈수록 제 어둠이 더욱 초라해져 기어이 주저앉아버리게 하는 빌어먹을 빛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날, 그리고 금붕어를 죽인 범인이 자신이란 게 들통난 날. 다희는 더욱 처절히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넌 늘 빛으로 둘러싸여 있어. 뭘 해도 되는 놈은 된다고 너는 가만히 있어도 주위에서 도와주려고 안달이지. 하지만 나는…….’
이제 무슨 낯짝으로 회사를 다녀야 할지 앞날이 깜깜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베리아에서 합격 메일이 왔을 때 간다고 할걸.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해보니 이미 다른 사람을 뽑았다고 한다. 취업난이 이렇게나 극심한데 당장 회사를 그만두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너 지난달에 생리했어?”
그래서 승원이 물어본 그 한마디가 다희에겐 중요했다.
어항에 구강청결제를 들이붓고 돌아서던 밤, 사무실에서 마주친 승원은 헛구역질을 하며 오열하는 다희에게 그렇게 물었었다.
‘이건 기회다.’
순간적으로 다희의 뇌리가 번뜩였다.
생각해 보니 몇 달째 생리를 건너뛰었다. 원체 생리 주기가 들쑥날쑥해 그러려니 했는데, 어쩌면 임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승원이랑 나랑 잔 게 몇 달 전이더라? 그때부터 생리를 안 한 거 같은데…….’
다희의 두뇌가 여느 때보다 재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니, 안 했어.”
“……안 했다고?”
“응.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안 했어.”
승원의 표정이 무너지는 걸 보니 묘한 쾌감이 들었다.
다희는 처연한 표정으로 연기를 계속했다.
“생각해 보니 진짜 그렇네. 요 며칠 속도 안 좋고 살도 많이 빠졌어…… 왜 그렇지?”
그러면서 그의 입에서 오직 한마디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너 혹시 임신한 거 아니야?”
바로 그 말을.
다희는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딱 한 번 잤다고 바로 임신하는 게 말이 돼?”
“그건 그렇지만…….”
덜컥 겁을 집어먹는 듯한 승원의 태도에 더욱 오기가 생긴 건지도 모른다.
“에이, 아닐 거야. 나 원래 좀 들쑥날쑥해. 그런데 이렇게까지 안 한 적은 없었는데…… 하아, 그래도 아닐 거야.”
승원은 그녀의 예상대로 착실히 움직여주었다.
“일단 테스트기부터 해보자. 아니, 병원 먼저 갈까?”
“내가 알아서 할게…….”
“네가 뭘 알아서 해! 우선 테스트기부터 해보자고. 알았지?”
“지금 약국 문도 다 닫았어. 내일 해보고 알려줄게.”
새파랗게 질린 승원을 보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반드시 임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음 날 만나기로 약속을 해놓고 다희는 아침부터 테스트기를 세 개나 샀다. 차례로 해본 결과는 모두 한 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분명히 두 줄이어야 하는데?’
엄마가 분명히 그랬다. 올해 결혼 운이 들어와 있다고.
어제 승원의 입에서 ‘임신’ 소리가 나오는 순간, 본능적으로 이게 결혼의 기회란 걸 알았다.
한 번도 틀린 적 없는 엄마의 신점이니 이번에도 틀리지 않을 거고, 임신만 되면 무조건 결혼에 골인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왜 한 줄이야……?’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다희는 망연자실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대로 기회를 날려버릴 수는 없어. 일단 임신했다고 하자. 나중에 유산했다고 해도 되고…… 어쨌든 중요한 건 이참에 승원이 마음을 돌리는 거야!’
굳게 마음을 먹은 다희는 오후 늦게야 초췌한 얼굴로 나타났다.
“어떻게 됐어?”
승원이 채근하듯 물었다. 밤새 한숨도 못 잔 듯 흰자에 실핏줄이 가득했다.
다희는 인터넷에서 구한 두 줄짜리 테스트기를 내밀었다.
“두 줄이야.”
“두 줄이면…….”
“그래, 맞아. 임신이야. 네 애를 가졌다고.”
승원의 평정심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가 다희가 내민 테스트기를 들고 이마를 감쌌다.
“맙소사.”
하늘이 무너지면 저런 표정일까.
인생이 쫑난 것처럼 절망하는 모습에 다희의 표정이 표독해졌다.
“한숨부터 쉬고 너무한 거 아니야? 나라고 지금 상황이 좋은 줄 알아?”
“미안…… 너무 놀라서…….”
선명한 두 줄짜리 테스트기를 쳐다보던 승원이 말했다.
“이거 확실한 걸까? 다시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세 번이나 해 봤어! 세 번 다 결과가 같았다고, 흑…….”
다희는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에 약한 승원에게 그보다 더한 협박은 없다는 걸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다, 진짜…….”
“어떻게 할 거야?”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책임은 어떻게든…… 질게.”
다희는 고민하는 것처럼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말을 할까 말까 몇 번이나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끝내 내놓은 답은 승원을 더욱 절망으로 몰아갔다.
“난 이 아이 포기할 생각 없어.”
“……낳을 거라고?”
“그럼 생명을 죽여? 네 아인데?”
승원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병원부터 가자. 일단 진료부터 보고 얘기해.”
“테스트기 보고 놀라서 병원도 다녀왔어. 벌써 15주래. 조금 있으면 배도 나오기 시작할 거야. 나 어떡해, 흐윽…….”
다희가 진료확인서를 구겨 승원의 얼굴에다 던졌다.
“미안해, 다희야. 정말 미안해.”
오열하는 그녀를 달래느라 승원은 자세히 들여다볼 틈도 없었다.
산부인과 정기검진이라 쓰인 진료확인서를.
*
다희의 패악으로 둥이와 둥둥이가 무지개 다리를 건넌 후 혜주는 다희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기왕이면 그녀 스스로 회사를 그만둬줬으면 했는데, 주원에게 들으니 회사의 사직 권고를 거부했다고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머리채라도 휘어잡고 싶은데 지고하신 대표님 여친이라고 소문까지 난 마당에 그럴 수도 없고.’
멀쩡한 모습으로 회사에 출근하는 다희를 보며 혜주의 분노는 더욱 쌓였다.
‘끝까지 버티겠다 이거지? 네가 버티겠다면 내가 흔들어줄게.’
흑화할 거란 혜주의 선언은 허언이 아니었다.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어 참고 또 참았는데 뭣 모르는 신입사원들 살살 꼬드겨서 밥을 먹으러 나가는 모습을 보니 열불이 났다.
저게 또 밥 먹으면서 무슨 헛소리를 지껄일지.
회식 자리에서 개망신을 주긴 했지만 어디까지 사업팀 회식이어서, 직접 보고 들은 사람이 아닌 이상 또다시 다희의 세 치 혀에 놀아날지도 몰랐다.
하루 빨리 다희를 회사에서 몰아내는 게 상책이라 판단한 혜주는 그때부터 눈을 부릅뜨고 다희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그녀가 회사에 한 줌 먼지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공식적이고 합법적으로’ 회사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했다.
다행히 그 증거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서베리아 면접 자료?”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나간 시각, 뭐 수상한 거 없나 기웃대던 혜주의 시야에 쭈굴쭈굴해진 채 널려 있는 서류 뭉치가 보였다.
어항 물을 다희에게 들이부었던 날 그녀의 책상에 꽂혀 있던 서류 대부분이 물에 젖었다.
다희는 구시렁대며 젖은 서류를 본인의 뒷좌석 여유 공간에 널어놓았는데 혜주가 발견한 건 그중 하나였다.
“얘 이직하려고 했었나? 서베리아면 완전 우리 경쟁사잖아. 이직 안 한 거 보면 떨어진 건가.”
중얼거리며 힐끗 서류를 보는데 왠지 익숙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 질문 1. 기존 회사에 근무할 때 진행한 사업 중 성공적인 경험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질문에 대한 답변 : 저는 데이터스 코리아의 사업팀에 4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최근 진행한 사업 중에서는 태양식품과 협업한 것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요. 저는 모바일 리서치 경험이 전무하던 태양식품 측에 여러 번 메일을 보내 계약을 따냈고, 현재 태양식품이 직면한 국내 매출 부진의 원인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마케팅부와 협업을 통해 태양식품의 신제품을 구상 중이며…….]
뭐야. 이거 내 아이디어잖아?
혜주는 정수리에서 분화구가 들썩이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껏 다희가 제 것을 따라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친구라서 그냥 넘겼다. 하지만 이제는 친구도 뭣도 아니었다.
“이게 진짜 해보자는 거지?”
혜주는 서류를 들고 당장 주원을 찾아갔다.
다희가 면접 때 혜주의 아이디어를 훔쳐서 얘기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에 주원의 눈동자가 낮게 침잠했다.
불같이 흥분한 혜주에 비해 그는 가라앉은 호수 같았다. 말없이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잘됐네.”
의외의 반응에 혜주의 눈이 커졌다.
“잘 됐다고요? 걔가 내 아이디어를 훔쳐서 면접을 봤을지도 모르는데 뭐가 잘 됐어요?”
“만약 천다희가 진짜로 면접 때 네 아이디어를 써먹은 거면 회사에 중대한 손실을 초래한 행위에 해당돼. 제 손으로 무덤을 판 거지.”
아……! 두 수를 내다보는 주원의 혜안에 혜주가 감탄을 내뱉었다.
누군 아이디어를 뺏긴 것이 분해 방방 뛰기만 했는데, 누군 그 사실을 이용해 자를 궁리까지 하다니.
괜히 대표가 아니군 그래.
“면접 때 진짜 이 얘기를 했는지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요? 그쪽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아는 사람 있어.”
“오, 진짜요? 누구요?”
“서베리아 대표.”
“와…….”
“MBA할 때 동기야.”
“역시 잘난 남자는 인맥도 남다르네요. 별게 다 쓸모 있는 남자라는 게 허언이 아니었어!”
혜주가 엄지를 착 치켜들었다.
“당장 전화해봐요. 서류 보니까 임원 면접 자료인 거 같던데, 대표면 임원진 면접에도 들어갔을 거 아니에요.”
“나중에 해볼게.”
“왜 나중에 해요? 지금 해 봐요, 얼른!”
혜주의 채근에 주원이 난색을 표했다. 칭찬에 도취된 나머지 그쪽 대표와 사이가 나쁘다는 얘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그룹 과제에서 만나 일주일 정도 썸을 타다가 주원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린 탓에 남은 학기 내내 그녀가 뒤에서 욕을 하고 다녔다는 것도.
“뭐해요? 당장 전화 안 걸고?”
내키지 않지만 오혜주가 시키는데 별수 있나.
주원은 꾸역꾸역 서베리아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가 웬일이야?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싸늘한 음성에 주원은 낭패감을 느꼈다.
……제기랄. 뭘 또 한 번에 받고 그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