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표정만 보면 거의 천국 갔다 온 거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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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표정만 보면 거의 천국 갔다 온 거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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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표정만 보면 거의 천국 갔다 온 거 같던데
2023.04.13.
주원은 아직 그녀가 제 전화번호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일차로 놀랐고, 냉기가 뚝뚝 묻어나는 차가운 말투에 이차로 놀랐다.
생각해 보니 본의 아니게 여자들에게 미움을 많이 사긴 했다.
주원의 입장에선 사귈 만큼 마음이 가지 않아서 그런 거지만, 상대방 입장에선 사귈 것처럼 굴다가 하루 아침에 내뺀 걸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구는 거겠지만.
‘뭐 어때. 전화 한 번 건 게 죽을죄도 아니고.’
강주원, 쫄지 말자. 혜주가 지켜보고 있다.
속으로 파이팅을 외친 주원이 배에 힘을 주고 물었다.
“천다희라고 알아?”
안부도 건너뛰고 훅 들어온 본론에 상대방 여자가 실소했다.
-몇 년 만에 전화해서 다짜고짜 여자 얘기를 하네. 너 제정신이니?
“여자 얘기가 아니라 우리 직원 얘기야.”
-내가 대답해줄 이유 있나? 너한테 차이고 학점 나락가서 졸업장도 한 학기나 늦게 받은 나인데.
“…….”
주원의 휴대폰에 귀를 바짝 대고 있던 혜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아는 사람이라더니 옛 여자친구였어? 인맥 대단하다고 칭찬한 게 오 분 전인데 내가 이 남자 여성 편력을 칭찬한 거구나. 응, 그런 거였어.’
입은 웃고 있는데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화가 난 게 틀림없다.
주원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우리 회사 직원이 최근 너희 회사에 면접을 봤다고 들었어. 면접 시 우리 회사에서 진행 중인 사업 얘기를 흘린 거 같아서 묻는 거야.”
-글쎄.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있었다고 해도 맨입으로 말해주고 싶진 않은데?
“뭐, 그럼 밥이라도 떠먹여 줘?”
-밥은 됐고 술 한 잔 사.
과거에 그렇고 그럴 뻔한 사이였다는 게 밝혀진 것도 유감스러운데 이제는 대놓고 유혹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내 여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이런 수작에 넘어갈 수는 없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한 잔으로 되겠어?”
주원은 시베리아 벌판 같은 혜주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표정을 보니 청정하고 순결한 남친 되긴 글렀고.
‘여기서 당황하면 X되는 거야. 급할수록 전략적으로 간다.’
뜨거워진 귀를 휴대폰으로 꾹 누르며 주원은 느긋하게 대꾸했다.
“유학 시절 못되게 군 거 갚는 셈 치고 이참에 진하게 한 잔 살게.”
한 손으로 혜주의 허리를 끌어당기면서.
‘뭐 하는 거예요. 신성한 대표실에서!’
순식간에 주원의 허벅지 위로 올라간 혜주가 입 모양으로 항변했다.
주원은 턱과 어깨 사이에 휴대폰을 끼운 채 느릿하게 혜주의 등을 어루만졌다.
‘쉿. 지금부터 내가 입으로 내뱉는 말은 아무것도 믿지 마.’
손가락으로 입술을 누른 채 장난스레 윙크한 그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긴 목선을 핥아 내리는 숨결이 진득했다.
-진짜 급하긴 한가 보네. 콧대 높은 강주원이 이렇게 나오는 걸 보면.
수화기 건너의 상황이 이런 줄도 모르고 상대편 여자가 콧소리를 흘렸다.
“간만에 보고 싶기도 하고.”
주원은 다정하게 대꾸하며 손가락으로 혜주의 입술을 헤집었다. 촉촉한 아랫입술을 지나 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손끝이 유영했다.
-보고 싶어? 네가 나를?
“왜. 그러면 안 되나?”
비스듬히 기운 콧날이 혜주의 얼굴에 겹쳐졌다.
도톰한 입술이 찰기 있게 맞물렸다 떨어졌다. 혜주는 벌게진 얼굴로 주원의 손등을 찰싹 때렸지만 주원의 손놀림은 점차 과감해졌다.
-뭐……. 안 될 건 없지? 하긴, 그때 상황이 그래서 헤어지긴 했지만 너도 나한테 좋은 감정이 있었을 테니까 지금 이러는 것도 이해는 돼.
홀랑 넘어간 여자가 주절주절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흘린 말 중엔 그녀가 직접 다희의 면접을 봤다는 것과, 다희가 떠들어댄 혜주의 아이디어가 실제로 사업화 중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네 직원이라기에 좀 솔깃했던 것도 사실이야. 대학원 다닐 때 날 개망신 줬던 남자 밑에서 일하던 직원을 빼 오면 어떨까, 강주원 표정 볼 만하겠네.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 얘기가 진행될 때쯤 혜주의 숨은 거의 턱 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목덜미를 미끄러지듯 내려온 손가락이 등을 지나 스커트 아래로 밀려들었다.
쫀쫀한 스타킹 위를 느릿하게 드나들던 못된 손이 점점 깊은 숲을 찾아들었다.
“응.” 짧은 대꾸가 주원의 입술에서 흐를 때마다 혜주는 숨을 할딱였다.
주원은 혜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간간이 입술만 움직였다. 어느덧 뻐근해진 허벅지에 통화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얘기 고맙다. 날짜는 조만간 잡아보자.”
상대방 여자가 뭐라고 말을 붙이며 통화를 이어나가려 했으나 주원이 칼같이 정리했다.
내내 지분대던 못된 손에 거의 함락된 혜주는 그가 귀에서 휴대폰을 떼자마자 힘이 풀린 듯 소파에 내려앉았다.
“하아......”
헝클어진 매무새를 가다듬고 숨을 고른 그녀가 붉어진 얼굴로 주원을 쏘아보았다.
“진짜 이러기예요?”
주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비스듬히 웃었다.
“표정만 보면 거의 천국 갔다 온 거 같던데.”
“누, 누가 천국을 갔다고 그래요? 이 사람이 진짜 막 누명 씌우고 있어!”
“좀 아쉽긴 했지? 소리를 못 내서.”
주원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다시 갈까.”
붉은 입술은 어째서 볼 때마다 야해지는지 그의 입술이 닿았던 목덜미가 홧홧한 기분이었다.
멈추었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혜주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회사라고요. 정신 차립시다, 대표님!”
주원은 무척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셨다.
그래도 나름 양심이 있는 터라 더 이상 보채지는 않았다.
“아무튼 덕분에 중요한 정보는 많이 얻었네요. 서베리아와 협업 중인 식품 회사에서 1인 가구를 위한 김을 출시할 예정이라고 했죠? 우리 쪽 아이디어 회의가 유출된 정황이 분명하니 그쪽에 얘기해서 중지시켜야겠죠?”
“그냥 둬.”
“왜요?”
“어차피 그 회의는 미완이었어. 출시하자마자 망할 거야.”
엥? 혼밥김이 망할 거라고요?
의외의 대답에 혜주의 눈이 커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대체 왜? 어째서?
“너도 알다시피 2차 회의에서 제일 문제가 됐던 건 포장 패키지야. 천다희가 면접에서 써먹은 건 1차 회의에서 논의한 결과뿐이지.”
“아아.”
혜주는 그제야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차 회의에서 마케팅팀이 제일 우려했던 건 과대포장 이슈였다.
혼밥족을 위한 신제품은 기본적으로 다섯 장의 김을 한 포장지에 패킹한 제품이었다.
고작 다섯 장짜리 김 한 봉지에 플라스틱과 비닐과 실리카겔까지 들어간다는 건 비용 절감에 불리할뿐더러 환경 문제에 민감한 20대 혼밥족에게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 터였다.
마케팅팀이 가장 우려한 부분도 그거였다.
최종회의 결과에 따라 태양식품은 현재 혼밥김을 위한 획기적인 포장재를 개발 중이었다.
“서베리아 측에선 그런 부분까진 고려하지 못한 모양이죠?”
“태양식품에서 신제품을 출시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 하니 깊이 고민할 시간이 없었겠지.”
“그렇군요.”
“아무튼 잘 됐어. 잘만 하면 이걸로 천다희를 눈앞에서 치울 수도 있겠어.”
주원의 눈빛이 여느 때보다 냉정했다.
독한 남자라는 건 알았지만 이럴 땐 더없이 든든하다.
“그건 그렇고.”
혜주는 습관처럼 찌푸린 주원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살살 펴주며 말했다.
“미남계를 작정하고 쓰더라고요? 못됐어, 정말.”
“사업 기술이야.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어야지. 그래서 싫었어?”
“아뇨. 잘난 얼굴 팔아서 중요한 정보 캐냈으면 남는 장사죠. 저 그렇게 속 좁은 여자 아니에요.”
“싫었던 거 맞네.”
혜주가 질투할 때가 제일 기분이 좋은 주원은 괜스레 웃음이 났다.
쪼끄만 게 질투도 할 줄 알고 귀엽다니까.
“약속 지킬 거잖아요. 오빠가 빈말할 성격도 아니고 술 사준다고 했으면 진짜로 사줄 거잖아.”
“혼자 나간단 소리는 안 했잖아.”
주원이 씩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혜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같이 가자, 혜주야.”
말끝에 살짝 귓바퀴를 핥자 혜주의 발끝이 찌릿해졌다.
“여우 같아, 진짜.”
붉게 물든 귓가를 손으로 문지르며 혜주가 눈을 흘겼다.
그 모습이 미치게 귀여워 주원은 양심을 팔아먹기로 작정했다.
‘까짓거 회사면 어때. 옷만 안 벗기면 되지.’
혜주의 턱을 잡아당긴 그가 진하게 입술을 베어 물었다.
블라인드가 쳐진 대표실 안은 금세 축축하게 마찰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
퇴근 후.
빌딩을 나온 혜주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치게 되었다.
“오춘택, 네가 회사까진 무슨 일이야?”
지난번 병원에서 헤어진 후 처음 만난 필립이었다.
가벼운 뇌진탕 증세로 하루 입원했다가 퇴원했는데 며칠에 한 번씩 머리가 아프다며 약 사 먹을 돈을 뜯어내던 그였다.
“아, 춘택이 아니고 필립이라고. 머리가 금붕어야 뭐야, 왜 사람이 말을 하면 자꾸 까먹어?”
“금붕어 얘기하지 마라…….”
“금붕어가 왜!”
“아무튼 하지 말라고!”
며칠 전에도 오만 원을 부쳐준 혜주는 회사까지 찾아온 그가 달갑게 보이지 않았다.
춘택이 자신을 찾아올 이유는 오직 돈밖에 없는데 회사까지 찾아온 걸 보니 어지간히 급한가 싶어서.
“누나, 나…….”
“싫어.”
“아직 말도 안 꺼냈는데?”
“꺼내지 마. 한마디도 꺼내지 말라고! 누군 땅 파서 돈 버는 줄 아니? 하루 온종일 사무실에서 뺑이 쳐서 겨우겨우 벌어 먹고사는 사람한테 왜 자꾸 돈을 달래?”
“와, 우리 누나 용하네. 말도 안 꺼냈는데 할 말을 막 맞춰버려.”
“너랑 사흘만 붙어 있어도 알게 되는 사실을 지금껏 모르면 빠가사리지!”
혜주는 귀찮은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도 이젠 지쳤어. 돈 필요하면 아줌마한테 물어봐. 그 돈이 아빠 주머니에서 나오든 말든 신경 안 쓸 테니까.”
“안 그래도 주말에 천안 내려갔다 왔는데…….”
“뭐?”
이 돌대가리가 진짜.
혜주가 손을 올리자 필립이 휙 머리를 감싸며 피했다.
눈을 부라리는 혜주의 시선을 피하며 필립이 중얼거렸다.
“천안도 완전 초상집이야. 장사가 하나도 안 된대.”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파리 날리는 데 가서 용돈 달라고 할 수는 없었어.”
“그딴 것도 양심이라면 양심이다.”
혜주는 가열차게 비웃으며 필립에게 딱콩을 놓았다.
“아무튼 용건 다 봤으면 가. 나 이제 퇴근해야 해.”
“나도 쉽게 찾아온 거 아니다, 뭐.”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사지 멀쩡한 놈이 누나한테 빌붙기 쉬운 줄 알아?”
다시 딱콩을 놓으려던 혜주는 의외로 불쌍한 필립의 목소리에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
“기획사가 망해서 숙소에서 쫓겨났단 말이야! 누나가 모른 척하면 나 진짜 오늘 잘 데도 없어, 흐어어어엉!”
얘가 왜 울고 그래?
“진짜 내가 오죽하면 이래? 그동안 알바해서 모아놨던 돈은 데뷔 비용이라고 해서 기획사에서 가져갔단 말이야. 의상지원비며 연습실 사용비며 돈 들어갈 데가 많아서 기획사에서 가불했는데 이젠 그 돈도 갚으라고 한다고!”
“야, 그렇다고 길바닥에서 사내자식이 울고 그러면 어떡해? 꼭 내가 울린 거 같잖아!”
“천안도 심란하고 오갈 곳은 없고, 나도 미치겠다고!”
“너 여자친구 있잖아.”
“들키면 차일 것 같아서 그러지! 그리고 걔 여성 전용 오피스텔이야, 으허엉…….”
오뚝이처럼 선 채로 눈물을 닦는 필립을 주위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지나갔다.
우는 건 쟤인데 창피함은 왜 내 몫인가.
혜주는 당황해서 대충 필립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길바닥에서 이러지 말고 커피숍이라도 가자. 일단 진정 좀 해.”
어린애처럼 콧물을 훌쩍이는 필립을 끌고 어디로 들어갈까 두리번거릴 때였다.
“자기야…….?”
빌딩 입구에서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이쪽을 보고 있는 루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