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 벗고 자자, 혜주야 (92/121)


#92. 벗고 자자, 혜주야
2023.04.16.


같이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루비는 사태 파악이 되지 않는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건 혜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기야?”

루비가 왜 여기서 자기를 찾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생각해도 날 부른 건 아닌 거 같은데.

여기 루비 씨 자기가 어디 있다고…….


‘에이, 설마.’

훌쩍이는 필립을 힐끗 바라본 혜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비가 아무리 맑은 영혼의 소유자라고 해도 저런 똥멍청이를 주워다 입히고 먹여줄 만큼 바보는 아니…… 어야 하는데.


“자기가 왜 언니랑 같이 있어?”

……맙소사.

필립에게 그대로 직진하는 루비를 보며 혜주는 현기증을 느꼈다.

하나님, 여기 두 명의 바보가 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 하여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했던 제 아둔함을 용서하여 주소서.


“자기야, 우리 누나랑 아는 사이야?”

눈을 질끈 감은 혜주의 귓가로 여전히 멍청한 필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삼 초 후.

사태 파악을 완료한 루비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언니의 그 한량 동생이란 사람이 필립이었어요?”

그래. 네 양아치 남친이 필립이었구나.

혜주는 실소를 지으며 “응” 짧게 대꾸했다.

*

필립에게 오만 원을 쥐여 주고 억지로 돌려보낸 후.

혜주는 루비와 포장마차에 마주 앉았다.


“필립이 언니 남동생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필립이 소속사에서 사기를 당했으며 당장 갈 곳이 없어 돈을 빌리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연신 훌쩍거렸다.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그런 줄 알았으면 필립이 커피 산다고 할 때 말릴 걸……. 흐윽!”

“루비 씨.”

“맨날 밥 얻어먹는 거 미안하다고 커피는 자주 사줬단 말이에요. 하룻밤 지낼 곳도 없는 개털이면서 누가 누구한테 커피를 사준 거야!”

“루비 씨?”

“우리 자기가 돈이 없어서 그렇지, 마음은 진짜 착하거든요. 언니도 알죠? 부르면 부르는 대로 댕댕이처럼 달려오고 기분 울적하면 꼬리도 흔들어준다고요. 데뷔하면 나한테 호텔 뷔페 사준다고 꼭 약속했는데 그 착한 애 뒤통수를 치다니, 이 나쁜 놈들!”

하아. 대충 예상은 했지만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루비가 직업도 없는 한량과 사귄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이제 보니 아예 푹 빠져서 사리 분별이 안 되는 것 같다.


“루비 씨, 정신 차려. 오춘택 그 자식 지금까지 루비 씨한테 많이 얻어먹었지? 가끔 돈 떨어지면 용돈도 받아가고.”

“그건 그렇지만…….”

“여자한테 돈 뜯어 가는 남자 중 착한 애는 없어.”

“하지만…….”

“헤어져. 루비 씨를 위해 진지하게 해주는 조언이야.”

혜주의 따끔한 한마디에 루비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어떻게 그래요? 나 진짜 필립 사랑한단 말이에요.”

“그럼 평생 쭉쭉 빨리며 살래?”

“누가 그런대요? 데뷔만 하면…….”

“정신 차려. 데뷔만 하면, 그 소리 지겹지도 않니? 그 정도 재능이 있었으면 어디에서든 진즉에 모셔갔겠지. 루비 씨, 그 자식 작사 노트는 본 적 있어?”

루비가 입술을 앙 다물었다.


‘봤네, 봤어.’

라임만 맞추면 장땡인 줄 아는 그 끔찍한 작사 실력을 봤다면 데뷔란 단어가 얼마나 필립과 먼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을 거다.

[엄마는 나의 하늘, 노을이 짙게 물든.]

[매일 까던 마늘에 손끝 밑이 물든.]

[엄마의 손을 볼 때마다 내 눈가는 물들어.]

[마더 콜미 마이썬, 마더 이즈 마이 썬.]

엄마한테 마늘 한 접 사다 준 적 없는 놈이 뭘 그렇게 엄마를 찾는지.

그걸로 끝이면 다행이게?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이 고팠지, 난.]

[엄마의 자랑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난 엄마의 자랑 아닌 벼랑.]

[그 벼랑 끝에 매달려 또다시 엄말 부르네, peace.]

알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의 자조적인 가사 실력에 식겁해 노트를 던져버렸던 기억이 난다.

왜 하필 재능이 없는 분야에 그렇게 성실한지 혜주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몇 번이나 다른 적성을 찾아보라 에둘러 말했지만 고집 센 필립이 말을 들어 먹을 리 없었다.


‘지 인생 지가 알아서 하겠지.’

해보다 안 되면 어련히 그만두겠지 싶어 신경 끄자 생각했다.

그러나 루비에게 딱 붙어 있는 한량이 필립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젊고 예쁜 나이에 그런 한량을 만나서 지갑이나 털리는데, 어떻게 그냥 둬?’

사실상 배다른 남매와 다름없는 필립보다 혜주는 루비에게 더 마음이 쓰였다.

필립이야 지금껏 그래왔듯이 어디든 빌붙어 살 수 있겠지만 루비는 달랐다.

의리 갑에 순정파인 루비는 쉽게 필립을 버리지 못할 거고, 정에 끌리다 보면 필립이 삽질해둔 구덩이에 딸려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할아버지가 금지옥엽의 머리털을 빡빡 밀어버린 이유가 납득이 되네.’

혜주는 독하게 마음먹고 쓴소리를 장전했다.


“신월도에서 루비 씨만 걱정하는 가족을 생각해 봐. 더 깊어지기 전에 정리하는 게 모두를 위한 일이야. 막말로 춘택이가 앞으로도 사고 치지 않는다는 보장 있어?”

“정신 차리고 산다고 했어요…….”

“그 말을 믿어? 정말 믿는다면 나도 더는 말 안 할게.”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좋아, 거의 넘어왔어.


“그 자식, 루비 씨보다 내가 본 시간이 훨씬 길다? 정신 차릴 놈이면 진즉에 차렸어.”

“…….”

“그리고 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야 홀로 설 수 있는 성격이야.”

“그래요?”

“비빌 언덕이 되어 주면 안 돼.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우리 마음 독하게 먹고 춘택이가 홀로서기 할 수 있게 도와주자. 응?”

루비는 헤어질 생각만으로도 슬픈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내가 헤어지는 게 필립을 도와주는 거라는 얘기죠?”

“응. 확실해.”

그로부터 꼬박 한 시간을 고민한 루비가 이윽고 필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그만 헤어져.]

딱 일곱 글자가 담긴 매몰찬 이별 문자를.

연락처 차단까지 하는 것을 보고야 안심이 된 혜주가 가엾은 루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어, 루비 씨.”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실의에 잠겨 있던 루비가 고개를 홱 쳐들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춘택이, 춘택이 그러세요? 오필립이라는 멋진 이름 놔두고!”

……얘 아직 미련 못 버렸네.

큰일이다, 정말.

*

자기가 차 놓고 마치 실연당한 것처럼 오열하는 루비와 한 잔, 두 잔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테이블이 가득 찼다.


“사장님 여기 딱 한 병만 더요!”

“어휴, 아가씨 둘이 술을 많이도 마셨네. 그만들 하고 이제 어여 가~”

포장마차 아주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여자는 술병을 놓지 않았다.

늦게까지 야근하고 퇴근하던 주원의 눈에 인사불성이 된 둘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디서 오혜주 환청이 들리나 했더니, 쯧.’

주원은 뚜벅뚜벅 걸어와 두 사람을 스산하게 내려다 보았다.


“무슨 깡으로 이렇게 마신 거야? 누가 업어가면 어떡하려고.”

“누가 업어가긴! 강주원이 업어가겠죠오오.”

“그다지 안전한 선택은 아닐 텐데.”

“오빠는 안전해. 강주원은 안전하다아아아.”

“사리 분별이 안 되는 모양이네. 이 정도면 술이 너를 먹은 거 아니냐.”

“얘는 입 없지롱.”

술병을 가슴에 안은 혜주가 배시시 웃었다.


 
평소에 잘 하지도 않는 콧소리까지 내며 애교를 떠는 걸 보니 어이가 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주원은 씰룩거리는 입가를 꾹 누르며 등을 내밀었다.


“몸에 힘 빼. 업을 테니까.”

혜주는 순순히 목에 팔을 두르고 팔짝 뛰어올랐다.


‘웃.’

몸에 힘 빼라고 했지 누가 점프하랬냐.

순간적으로 허벅지가 뜨끔한 주원이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일어났다.

한 손으로 혜주의 허벅지를 받친 채 지갑을 꺼낸 그가 물었다.


“얼맙니까?”

“십육만 사천 원이요.”

“…….”

대충 보니 안주는 두 개밖에 안 시킨 것 같은데 대체 얼마나 마신 거냐.


“덤터기 씌우는 거 아니에요! 이 아가씨들이 술을 어마어마하게 마시더라니까?”

“알고 있습니다.”

주원은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느라 입꼬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런 뒤 막 나서려는데.


“대표님, 저는효?”

뒤에서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을 인 자를 세 번 새긴 주원이 흘깃 루비를 돌아보았다.


“너는 알아서 집에 가라.”

어차피 내일 되면 기억 못 할 테니 반말해도 되겠지.


“집 주소가 기억이 안 나효.”

“서울 하늘 아래 어딘가엔 있겠지.”

“하늘이 너무 넓어효.”

“동물도 귀소본능은 있는 법이니 눈 뜨면 집에 가 있을 거야. 잘 가라. 살아서 도착하면 메시지라도 한 통 보내놓든지.”

냉정하게 돌아선 순간 두 여자의 타박이 서라운드로 울렸다.


“너무해! 이 잔인한 남자!”

“히잉, 우리 루비 버리지 마요오오오. 우리 불쌍한 루비 버리고 가면 나도 집에 안 가아아아아.”

……하. 둘 다 버리고 갈까.

그 자리에서 십 분을 고민한 주원은 결국 두 여자를 이고 지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여자라지만 인사불성이 된 인간 둘을 챙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손님방에 루비를, 안방에 혜주를 눕혀놓고 나오니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내 이것들을 진짜.’

내일 일어나면 기필코 오늘 흘린 육수 값을 받아내리라 다짐한 주원이 탁 방문을 닫고 나왔다.

*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니 혜주는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걸어간 주원이 침대에 벌렁 누웠다.


“……빡센 하루였다.”

회의만 일곱 시간을 했는데 일 끝나자마자 도합 백 킬로그램을 옮기고 나니 힘이 쭉 빠졌다.

주원은 팔을 괴고 누워 혜주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


“술 좀 적당히 마시랬더니 말 참 안 듣지.”

뺨이 쭉 밀가루처럼 늘어나는데 혜주는 미동도 없었다.

오늘 제대로 만지지 못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 주원은 그녀의 얼굴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뺨을 움켜쥐었다가 콕콕 찔렀다가 찐빵처럼 만들어보았다.

톡 튀어나온 입술이 붉었다.


“이 와중에 예쁘네. 억울하게.”

낮게 중얼거린 그가 이번엔 말랑말랑한 콧방울을 쥐었다 놓았다.

조금 귀찮은 듯 혜주가 “우웅” 소리를 내며 몸을 뒤집었다.


“누가 등 돌리고 자래.”

기어이 그녀의 몸을 자라처럼 다시 뒤집어 놓은 그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도롱도롱 숨소리가 났다.

감은 눈 아래로 드리워진 속눈썹이 짙고 풍성했다.

각진 곳 하나 없는 얼굴선은 자꾸만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부드러워 보였고, 이마는 뽀뽀하기 딱 좋게 둥글었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다.


“이래서 얼굴 보고 사귀어야 한다니까. 얼굴이 예쁘니까 모든 게 다 용서되잖아.”

주원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얼굴이 예뻐 보이니 아까 했던 개고생도 운동으로 느껴졌다.

회의가 늦어져 운동을 거른 나를 위해 몸소 아령이 되어 준 거지. 심지어 중량까지 늘려서.


“우음……. 더워…….”

혜주가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더워?”

주원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벌떡 일어나 에어컨 리모컨을 찾았다.

어두운 탓인지 보이지 않았다.


“리모컨이 안 보이네. 아쉽게도.”

하나도 안 아쉬운 얼굴로 그가 차선책을 찾았다.


“벗고 자자, 혜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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