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오빠는 짐승이지만 아무 때나 물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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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오빠는 짐승이지만 아무 때나 물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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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오빠는 짐승이지만 아무 때나 물지는 않아
2023.04.20.
주원이 천천히 혜주의 블라우스를 풀어 내렸다.
하늘색, 어깨에 러플 장식이 들어간 쉬폰 블라우스.
쫙 찢으면 한 줌에 불과할 것처럼 작고 여리고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였다. 목 아래에부터 일자로 달려 있는 단추는 동그란 진주 모양이었다.
‘입으로 똑 따면 쉬울 것 같은데.’
속도가 중요한 작업이 아닌데 왜 이렇게 조급해지는지 모르겠다.
주원은 자꾸 차오르는 숨을 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안 돼. 정신 차려.”
취한 여자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만 몹쓸 짓을 하고 싶어진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가슴에 얼굴을 묻고 뽀얀 피부에 잇자국을 남기는 상상, 벌린 잇새를 마구 휘젓고 싶은 상상, 술기운에 더욱 뜨거워진 그녀와 맞닿는 상상, 그리고…….
“안 된다, 주원아. 이 몹쓸 놈아.”
주원은 짙게 한숨을 내쉬며 뇌리를 가득 채운 불순한 상상을 지웠다.
적당히 취했으면 어떻게 시도라도 해보겠는데 인사불성이 되어 업혀 온 애한테 그러면 범죄다, 범죄.
“오……빠…….?”
혜주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아직 반쯤 자고 있는 듯 몽롱하게 풀린 눈을 보고 주원은 심장을 부여잡았다.
‘억, 왜 섹시하지?’
물론 오혜주가 섹시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녀의 팔 할을 차지하는 건 사랑스러움과 귀여움과 엉뚱함이지 이런 치명적인 섹시함은 아니다.
대체 넌 왜 지금 섹시하냐고, 왜? 왜!
주원은 아우성치는 엉덩이 근육을 손바닥으로 탁탁 잠재우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어, 왜?”
“어이구, 이뻐라. 우리 주원이.”
“!”
뜨거운 손바닥이 두 뺨을 감싸 쥐었다.
갖가지 상상으로 더럽혀진 그에겐 거의 치명적인 스킨십이었다.
“……오혜주, 자라.”
“보고 또 봐도 예뻐죽겠어.”
쪽쪽.
키스는 더 위험하고.
어느 포인트에서 그렇게 예뻐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주원은 이성의 끈을 붙들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알겠으니까 그냥 자.”
“고마워요, 오빠.”
“뭐가.”
“웅……. 나 업어 줘서?”
주원은 입술의 감각을 떨쳐내려 노력하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업은 거 기억은 나고?”
“너무 흔들려서 토할 뻔했거든요. 이것 봐요. 혀도 살짝 깨물었어.”
입술 사이로 쏘옥 나온 혀끝이 붉다.
앙증맞은 그것은 빌어먹게도 촉촉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똑 따 먹으면 앵두처럼 상큼하겠지.
주원의 목젖을 타고 갈증에 찬 숨이 꿀꺽 넘어갔다.
‘참아라, 강주원. 앵두는 내일 먹으면 돼.’
필사적으로 참는 남자의 속도 모르고 그녀가 웃는다.
“보기와 다르게 하체가 부실한가 봐, 헤헤.”
“그거야 이루비까지 챙기느라고…….!”
“자고로 밑동 굵은 나무는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법이라고 아빠가 그랬어요오오오.”
아, 이건 못 참겠는데.
빠직. 자존심에 금이 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당장 보여주고 싶다.
내 밑동이 얼마나 굵은지, 얼마나 튼실한지, 그 놀랄 만큼의 위엄과 위용을 떨치고 싶다.
혜주의 베개를 꽉 붙잡고 진짜 백 번은 고민했다.
‘이걸 덮쳐, 말아?’
한 가닥 남은 이성을 간신히 부여잡은 그가 돌아누웠다.
“됐다. 자라.”
돌아눕는 동시에 후회도 했다.
점잖은 놈도 아닌 게 왜 이럴 땐 유교남이 되는가.
만취한 여자에게 그럴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온갖 유혹을 참아낸 주원의 허벅지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
등 뒤에서 옷깃을 살짝 잡아당기는 느낌이 났다.
“왜, 또.”
“안아줘요. 등 보고 자기 싫어.”
혜주가 가물가물한 눈으로 배시시 웃었다.
주원은 할 수 없이 돌아누웠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막상 안으니 그것 자체로도 좋아서 주원이 부드럽게 등을 쓸어주자 혜주가 눈을 감은 채 웅얼거렸다.
“술을 이기려고 먹나. 맛있어서 먹지.”
자기가 말해놓고도 민망한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자 보드라운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복숭앗빛 뺨과 가지런한 치아, 반달 모양으로 접힌 눈꼬리가 얼마나 남자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지 넌 모를 거다.
“목은 안 말라?”
“조금…….”
“축여줄게.”
이 정도는 괜찮겠지.
깊게 입술을 베어 물자 말캉하게 얽혀 오는 그 살결이 미치게 부드럽다. 살짝 헐떡이는 숨도, 반쯤 감긴 눈꺼풀도. 곳곳이 그에겐 밟지 말아야 할 지뢰나 다름없는데.
“으응…….”
무심결에 내뱉은 그녀의 숨소리에 그만 이성이 탁 끊어졌다.
갖고 싶다. 하고 싶다. 덮치고 싶다.
꾹 눌러 온 욕망이 일제히 아우성치며 주원을 괴롭혔다.
아까부터 시동을 걸던 용 한 마리가 벌떡 기지개를 켰다.
주원은 혜주의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묻은 채 더욱 진하게 키스했다.
축축이 젖은 그녀의 입술을 살짝 깨물고 내려온 숨결이 목덜미를 따라 선을 그렸다.
하나, 둘, 아까 풀어둔 단추를 따라 내려오자 크게 오르내리는 가슴이 보였다.
“난 분명히 키스로 끝낼 작정이었어.”
투둑.
진주알 단추가 힘없이 시트 위로 떨어졌다. 하늘색 블라우스를 젖히자 동그란 어깨가 드러났다.
언제 봐도 예쁜 우리 혜주 어깨.
하얀 살결에 길게 입을 맞추자 혜주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숨 막혀요오……. 어지러워…….”
“그만해?”
마음에도 없는 말로 허락을 구해본다.
“오늘은 그냥 재워줄까?”
오빠는 짐승이지만 아무 때나 물지는 않아.
“네가 정말 원한다면 참을 수 있어.”
물론 내 허벅지가 아작나긴 하겠지만.
“……오빠.”
혜주는 속눈썹 그늘이 짙게 깔린 눈으로 주원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살갗에 마찰한 그의 입술이 피처럼 붉었다.
안달 난 게 빤히 보이는데 안 그런 척을 하는 것도 빤히 보여서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주원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어쩌지. 이젠 내가 못 참겠어.”
혜주가 두 팔로 목을 감는 순간 주원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잔뜩 달아오른 두 개의 입술이 격렬히 얽혔다. 마른 하늘에 빗방울 하나가 똑 떨어진 것처럼 두 사람은 정신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젖은 입술에 배인 알코올 향이 주원에게 스몄다. 손끝은 꽃잎처럼 부드러웠고 섞인 숨은 달콤했다.
사각사각.
몸이 부딪힐 때마다 이불이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의 몸에서 나온 열기가 더해져 공기가 금세 후끈해졌다.
“사랑해, 혜주야.”
어떤 말은 입술 끝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다. 혜주를 내려다보는 지금이 딱 그랬다.
“나도요.”
웃으며 화답하는 그녀를 가득 채울 때에야 비로소 완전해진 느낌이 들었다.
*
회사 점심시간.
다희는 홀로 햄버거를 씹고 있었다. 딱 점심시간이라 가게엔 사람이 많았지만 혼자 온 사람은 그녀 하나뿐이었다.
“시끄러워 죽겠네. 다들 밥 먹으러 와서 왜 저렇게 떠드는 거야?”
다희는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을 흘겨보며 기계처럼 턱만 움직였다.
구내식당에 못 간 지는 꽤 됐다.
어항에 구강청결제를 부은 일로 직원들 앞에서 개망신을 당한 후로 모두가 그녀를 피했다.
원래 사교성 좋은 성격은 아니라 승원, 혜주 빼면 딱히 어울린 사람도 없었지만 욱 팀장마저 그녀를 외면할지는 몰랐다.
“하여간 그 기회주의자. 내가 오혜주 정보 떠들어줄 때는 신나서 갈구고 다니더니 불리해지니까 싹 외면하네? 지가 언제부터 샐러드 먹었다고 도시락을 싸 오고 난리야. 재수 없어, 진짜.”
혼자 먹으니 소고기 패티인지 찰흙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맛이 없었다.
다희는 눈물을 꾹 삼키며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그래, 맞아. 임신이야. 네 애를 가졌다고.
아이를 가졌단 얘기를 하자마자 새파랗게 질리던 승원의 얼굴.
그래, 그것까진 좋아. 많이 놀랐을 테니까 이해할 수 있어.
한데 낳겠다는 말에 거의 실신 직전까지 간 그를 보니 마음이 상하는 걸 넘어 분노가 치밀었다.
‘애는 나 혼자 만들었나? 사고는 지가 쳐놓고 사람을 왜 미저리 보듯 해?’
있지도 않은 아이지만 불쌍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승원은 연신 그 말만 되풀이하다 일어났다.
생각이 정리되면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기고서.
그 후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그는 잠수 상태였다. 하루 종일 휴대폰이 꺼져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회사에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번 사진 사건으로 잠수를 탔을 땐 그나마 휴가 신청이라도 했지.
지금은 말 그대로 무단결근이었다.
회사 차원에서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였고 결근이 길어지면 해고까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얜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잠수를 탄 거야? 회사는 그만두더라도 나하고는 상의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뱃속에 지 애가 있다는데 무책임하기 짝이 없어, 정말!’
다희는 납작한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속으로 욕을 했다.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자꾸 생각하다 보니 정말로 배가 부른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냐. 차라리 잘 됐어. 강승원 성격상 느리긴 해도 한번 결정하면 밀어붙이는 성격이잖아. 그렇게 착한 애가 아이를 죽이자고 할 리 없어. 책임진다고 했으니까 기다려보자.’
어떻게 보면 승원의 잠수는 다희에겐 잘된 일이었다.
그 사이 다희는 자신이 임신이라는 걸 증명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으니까.
인터넷에서 구한 초음파사진과 태아의 심장 소리, 가짜로 꾸민 병원 서류와 앞으로의 계획까지.
단돈 십만 원에 구한 증거를 무기 삼아 다희는 승원을 가질 생각이었다.
‘배가 나올 시기가 되면 유산했다고 둘러대면 돼. 그때쯤이면 결혼식이 끝난 후일 테니까 유산했다고 결혼을 무르진 않겠지.’
생각을 정리한 다희가 휴대폰을 보며 콜라를 홀짝일 때였다.
지잉- 지잉- 지잉-
욱 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뭐야? 손절한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웬 전화?”
다희는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무슨 일이세요?”
-다희 씨 왜 이렇게 카똑을 안 봐? 지금 바로 회사로 들어와요. 긴급회의 소집이야!
뚝.
제 할 말만 하고 뚝 끊어버린 욱 팀장에 다희가 구시렁대며 햄버거를 내려놓았다.
“긴급회의? 우리 회사에 그런 게 있었나?”
지금껏 4년 넘게 근무하며 긴급회의란 것은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급한 안건이 있을 땐 예고 없이 회의를 하기도 했지만 그래 봐야 깜짝 회의, 게릴라 회의 등이 전부였다.
“별일이네.”
어쨌든 긴급이라니 가긴 가야 했다. 다희는 먹던 그릇을 치우고 설렁설렁 회사로 향했다.
도착하니 대회의실엔 이미 서른 명 가까운 인원이 모여 있었다.
사업팀과 마케팅팀, 그리고 데이터스 코리아의 임원진 전부가 모여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회의실 앞에는 주원이 소매를 살짝 걷어붙인 채 비스듬히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 밑의 임원들이 들락날락하며 그에게 귀엣말을 전달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선 혜주가 오늘 발표할 PPT를 준비하며 노트북에 빔을 연결 중이었다.
‘뭐지?’
격식을 갖춘 자리는 아니지만 중요한 사람은 모두 모인 자리.
그게 뭘 의미하는 걸까?
문득 서류를 쳐다보던 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늘 그렇듯 차갑고 인간미 없는 눈동자가 무심하게 주위를 훑었다.
그런데 그 눈이……. 왜 나를 보고 웃는 거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