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 십다희 (94/121)


#94. 십다희
2023.04.23.



 
경쟁사에서 예상보다 빨리 신제품이 출시되었다.

해당 업체는 “(주)양지푸드”로 최근 서베리아와 손을 잡고 리서치를 진행한 기업이었다.

태양식품과 경쟁 관계에 있는 양지푸드는 국내 김 시장을 꽉 잡고 있는 선두주자였다. 다만 십여 년 전부터 수출 실적이 태양식품에 밀려 전체적인 규모로 따지면 비등비등했다.

오늘, 양지푸드에서 ‘뚝딱김’이 출시된 후 데이터스 코리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거 우리가 태양식품이랑 준비하던 프로젝트 아니야?”

“그러게! 한 팩에 다섯 장 들어 있는 거랑 혼밥족을 겨냥한 것까지 똑같아. 이 정도면 어디서 말이 새어나간 거 같은데?”

영문 모르는 직원들의 술렁임이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는 건 오직 이 모든 사태를 주도한 강주원뿐이었다.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었군.’

뚝딱김 출시 소식은 홍보팀을 통해 오전부터 알음알음 사내에 번지고 있었다.

주원은 일부러 직원들이 오전 내내 떠들도록 놔두었다.

그의 선에서 적당히 해결해버리면 직원들은 사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을 거다.


‘심각성을 모르면 이번 일로 천다희를 찍어낼 때 부당하다고 헛소리를 해대는 인간들이 나오겠지.’

잡음이 없게 처리하려면 어느 정도의 혼란은 감수해야 했다.

정오가 되어 ㈜양지푸드에서 첫 공식 기사를 배포했다.

대표실에서 보고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주원은 때를 노리고 있던 맹수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슬슬 사냥을 시작해볼까.’

그는 즉시 회의를 소집했다.

이 사안과 관련된 사업팀과 마케팅팅, 그리고 임원진 전부가 회의실에 꽉 들어찼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다희가 안절부절못하며 손톱을 물어뜯는 모습이 보였다.


‘제 무덤 찾아왔네.’

주원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힐끗 보았다.

마침 허공에서 눈이 딱 마주치자 그녀가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주원은 사실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즐거웠지만 겉으론 엄숙한 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긴급회의를 소집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들 알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가 높은 책상에 걸터앉은 채 좌중을 둘러보았다.


“간단히 한 번 정리해드리죠. 오늘 양지푸드에서 뚝딱김이 출시되었습니다. 태양식품과 우리 마케팅팀이 손을 잡고 개발한 신제품 출시가 고작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시기에 말이죠.”

“안 그래도 그 이야기로 전사가 떠들썩합니다. 대체 어떻게 새어나간 걸까요?”

“프로젝트 진행 중 정보가 새어나가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일명 산업스파이라고 하죠.”

그의 시선이 다희의 정수리에 꽂혔다.

노골적인 시선에 다희는 급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내가 알기로 해당 사안은 사업팀과 마케팅팀의 공동회의에서 나온 얘기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네.”

대답은 욱 팀장이 대신했다.


“회의 참여 인원이 총 열세 명. 어렵지 않은 숫자군요.”

들통나면 꽤 많은 걸 잃게 될 텐데 용기가 가상하네.

들릴 듯 말 듯 덧붙인 말에 다희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여기서 섣불리 나섰다간 범인으로 찍히기 십상이라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저기, 대표님.”

침묵이 흐른 회의실에서 명환이 가만히 손을 들었다.


“꼭 그 회의에서 내용이 새어나갔을 거란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우연히 아이디어가 겹쳤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최근 서베리아 측에서 중요한 정보를 하나 넘겨받았는데.”

서베리아 라는 말이 나오자 다희의 어깨가 움찔했다.

주원은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전 반응을 보려는 듯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쪽 직원 한 명이 그쪽에 면접을 본 모양이더군요.”

“예에?”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수군대기 시작했다.

다희는 자신이 범인이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버텼다.

그러나 욱 팀장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하는 말에는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희 씨, 자기 아니야?”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전에 모니터 고장 났을 때 잠깐 본 거 같은데! 서베리아 어쩌고 하는 메일이 와 있는 거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쑥덕대는 목소리였으나 욱 팀장의 음성이 워낙 커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확 몰렸다.

예상치 못한 팀킬에 다희가 쌍심지를 켰다.


“광고 메일이었어요! 확실한 사실도 아닌 걸 사실처럼 떠들어대는 걸 보니 욱 팀장님이 찔리는 게 있는 거 아닌가요?”

“무슨 소리야! 나는 우리 회사에 뼈를 묻기로 작정한 사람이라고!”

“확실하지 않으면 엄한 사람 범인으로 몰지 마세요. 불쾌하니까!”

그들의 싸움을 중재한 건 노트북 앞에서 가만히 손을 든 혜주의 한마디였다.


“만약에요.”

그녀의 음성은 잔잔했지만 힘이 실려 또렷했다.

혜주는 들으라는 듯 다희를 한 번 쳐다본 후 주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 회의에서 아이디어가 유출된 거면 어떻게 되는데요?”

“권고사직 정도면 후한 처사일 겁니다. 회사 차원에서 소송이라도 걸면 개인이 감당할 수 있을까.”

주원은 냉소적인 눈으로 힐끗 다희를 쳐다본 후 답을 내렸다.


“난 아니라고 보는데.”

똥줄이 탄 다희가 냉큼 손을 들고 외쳤다.


“시, 실수로 그런 걸 수도 있잖아요. 지인과 밥을 먹다가 흘러나온 말일 수도 있고.”

“실수인지 고의인지가 중요한 시점은 아니죠. 회사에 명백한 손실을 입힌 이상 책임은 져야지.”

“책임이라니…….!”

“물론 나는 내부 기밀을 밖으로 빼돌린 파렴치한의 사정을 봐줄 만큼 너그러운 인간은 아닙니다.”

탁.

서류철을 내려놓은 주원이 천천히 좌중을 가로질렀다.

그가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양 옆의 직원들이 쫙 갈라졌다.

런웨이 못지않은 근사한 워킹에 감탄하지 못하는 건 다희뿐이었다. 그녀에겐 주원이 꼭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이윽고 그가 눈앞에 당도했다.


“천다희 씨. 할 말 없습니까?”

쿵쿵, 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다희는 쥐새끼처럼 눈알을 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스무 쌍도 넘는 눈이 오롯이 자신을 향한 가운데 오직 혜주만이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쟤 뭐 하는 거야?’

뭔가를 틀려고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다희는 짧은 순간 머리를 굴렸다.


‘저번에 금붕어 사건 때도 CCTV에 내가 찍힌 것처럼 거짓말을 했잖아. 알고 보니 CCTV에 찍힌 건 아무것도 없었고. 저것도 날 낚기 위한 수작이겠지? 하긴, 증거가 있었다면 날 떠보려는 행동은 하지 않았겠지.’

있지도 않은 증거를 있는 척하느라 애쓰네, 바보들.

다희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주원을 노려보았다.


“할 말 없는데요? 제가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요?”

“아까 욱 팀장이 한 얘기가 사실이라면.”

“제 모든 명예와 재산, 아니, 제 성을 걸고 맹세해요. 전 아니에요!”

“확실합니까.”

“만약 제가 서베리아에 정보를 팔아넘긴 인간이라면 오늘부터 전 천다희가 아니라 십다희입니다!”

픽. 주원의 입가에 조소가 떠오르는 듯하더니 혜주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동시에 대회의실 전체에 쩌렁쩌렁 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천다희 씨가 서베리아에 면접을 본 건 사실이야. 최종 합격까지 했는데 마지막에 돌연 입사를 안 하겠다고 하더라고.

그게 서베리아 대표의 목소리임을 알아들은 다희의 낯빛이 새카맣게 죽었다.

영문 모르는 직원들을 위해 혜주는 커다란 스크린에 “서베리아 대표 음성 녹취 파일”이라는 문구를 띄웠다.

서베리아와 양지푸드에서 이쪽 아이디어를 훔쳐 쓴 것을 문제 삼지 않는 대가로 주원이 얻어낸 증언이었다.


-면접 때 너희 회사에서 진행 중인 사업에 관한 얘기를 하긴 했지. 혼밥족을 위한 김을 만든다던가. 아주 신이 나서 떠들던데? 마침 우리 사업파트너 중에 양지푸드가 있다고 했더니 안 물어본 내용까지 술술 말하더라.

딸깍.

음성이 그쳤다.

주원이 두 손으로 다희의 책상을 짚었다.


“자, ‘십’다희 씨.”

기꺼운 듯 올라간 입꼬리가 유려하게 호선을 그렸다.


“이제 그쪽이 건 것들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볼까?”

 

 

*



“으흑!”

압박감을 참지 못한 다희는 얼굴을 감싸고 대회의실을 뛰쳐나왔다.

사방에서 짓쳐 드는 분기 어린 시선들,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보라는 듯 채근하는 눈빛에 덜컥 겁이 났다.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었다.

증거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깔끔하게 자백했을 텐데, 괜히 당당한 척 굴다가 만인 앞에서 ‘십’다희가 되었다.

누가 볼세라 얼른 엘리베이터에 오른 다희가 연거푸 1층 버튼을 눌렀다.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얼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흐윽……. 망했어……. 쪽팔려서 어떡하냐고!”

흐느끼던 다희가 막 로비를 빠져나갈 때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화들짝 놀라 돌아본 그녀의 눈에 그보다 더 놀란 승원이 보였다.


“왜 울어? 무슨 일 있어?”

막 잠적을 끝내고 회사로 복귀하던 승원이 회의실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흑, 승원아, 나 어떡해?”

다희는 승원을 붙잡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주변을 한 번 살펴본 승원이 얼른 다희를 데리고 차로 돌아왔다.


“왜, 무슨 일인데?”

승원의 채근에 하는 수 없이 다희가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어차피 숨길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승원은 기가 찼다.


“대체 그런 짓을 왜 했어?”

“내가 일부러 그랬어? 면접자한테 들은 얘기를 마음대로 써먹은 그쪽이 잘못이지, 내가 뭘 잘못했는데!”

다희가 훌쩍이며 고함을 질렀다.


“강주원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 백 프로 징계 먹을 거라고!”

“그건 네가 우리 형을 잘 몰라서 그래.”

“징계 안 받을 수도 있다고? 감봉 안 당해도 되는 거야?”

“징계가 아니라……. 아니다, 됐다. 휴우.”

내가 아는 형이라면 너 그냥 X 된 거야.

승원은 그 말을 끝내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 빠른 다희는 승원이 숨긴 뒷말을 기가 막히게 알아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랑 헤어지지만 않았어도 이직 생각할 일은 없었고, 면접만 안 봤어도 내가 회사에서 잘릴 일은 없었잖아!”

“…….”

“나 이제 어떡해. 임신해서 다른 데 취업도 안 될 텐데 뭐 먹고 사냐고!”

“안 그래도 그 얘기 하러 왔어.”

승원이 잔뜩 흥분한 다희의 어깨를 잡았다.

평소와 다른 진중한 분위기에 다희는 울음을 멈추고 승원을 바라보았다.


“책임질게, 다희야.”

“……정말?”

“결혼하자.”

다희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말인가!

조금 전 대회의실에서 당한 망신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늘 이 프러포즈를 받기 위해 그렇게 운수가 사나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다희는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승원을 바라보았다.

이제 무슨 말을 하려나? 프러포즈까지 할 생각이었으면 선물도 있을까? 난 반지 받고 싶은데.


“그 전에 산부인과엔 같이 갔으면 좋겠어.”

“!”

이내 들려온 승원의 한마디는 다희의 기대를 무참히 깨뜨렸다.

다희는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너 나 못 믿니? 설마 내가 이런 걸로 사기라도 칠까 봐 그래?”

“네가 그랬잖아. 실수가 반복되면 고의고 습관이라고.”

승원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뜻을 전했다.


“더는 실수 안 하고 싶어. 그러니까 같이 가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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