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확인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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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확인해 봐
2023.04.27.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다희가 얼굴을 감싸며 뛰쳐나간 후.
주원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회의를 속행했다.
“이제 어떡하죠, 대표님? 회의 내용이 유출된 걸 알면 태양식품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요.”
역시 데이터스 코리아의 인재들은 프로였다.
당장 범인을 찾아낸 것에 안심하는 대신 곧장 대응책을 찾아내려는 모습에 주원은 깊이 만족했다.
그가 눈짓하자 혜주가 스크린에 화면을 띄웠다.
“양지푸드에서 이번에 출시한 신제품입니다. 이걸 보면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이 듭니까?”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화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흐음.”
이번에 양지푸드에서 내놓은 김은 평소 그들이 사용하는 포장 패키지에서 부피만 줄인 모습이었다.
다섯 장씩 포장돼 있다 보니 부피는 조금 작아졌지만 포장 자체는 기존과 똑같았다.
“한 묶음에 총 열여섯 봉이네요. 도시락 김 80장을 포장하는데 저 정도면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임원진 중 한 명이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자 너도나도 생각한 바를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게요. 김 다섯 장마다 개별포장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과대포장인 느낌이 있어요.”
“우리가 회의에서 지적한 부분도 딱 저거였죠.”
“제품을 저렇게 출시할 경우 비용도 만만치 않았을 거예요. 현재 뚝딱김 가격이 얼마로 책정되었죠?”
“보통 도시락 김과 별 차이가 없네요.”
“그럼 메리트가 없지 않나?”
저마다 목소리를 달랐지만 지적하는 부분은 똑같았다.
제품의 과대포장과 그로 인한 가격경쟁력의 하락.
주원은 그들 모두의 의견을 귀담아들은 후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여러분 의견이 모두 맞습니다. 태양식품보다 한발 앞서 신제품을 출시하려는 욕심에 양지푸드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죠.”
주원은 손가락으로 스크린을 탕탕 튀기며 말을 이었다.
“MZ세대는 환경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습니다. 에코 패션, 음식을 찾아다니는 것은 물론 용기내 챌린지, 플로깅, 그린워싱 등을 통해 자발적으로 환경 문제에 동참하기도 하죠. 흔히들 가치 소비라고 하죠. 그들은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저버린 제품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감으로 반짝였다.
홀린 듯 그의 연설을 보고 있던 직원들은 이번 사건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될 거라 확신했다.
“양지푸드의 신제품은 조만간 조용히 시장에서 사라질 겁니다. 혼밥족의 진정한 니즈에 맞춘 혼밥김은 그때 세상에 나올 겁니다.”
지켜보고 있던 직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면 아이디어를 뺏긴 게 아니라 그냥 내어준 수준이 아닌가!
면접자의 아이디어를 훔쳐 쓴 서베리아와 양지푸드에 대한 경고, 혹은 참교육.
그 대단한 걸 지금 강주원이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경쟁사의 갑작스러운 신제품 출시로 태양식품 쪽에서 많이 당황했을 거 같은데.”
주원이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하며 말했다.
“유선상으로 설명 드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직접 만나 뵙고 회의 결과를 공유하는 게 나을 듯싶어.”
“제가 가겠습니다!”
혜주가 구석에서 번쩍 손을 들었다.
“오혜주 씨가요?”
“제가 담당자이니 직접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오후 반차 쓰고 바로 신월도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주원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준 후 회의를 마쳤다.
“회의 끝났으니 모두 해산합시다.”
*
회의가 끝난 직후 혜주는 홀로 신월도로 향했다.
주원이 전화로 상황 설명을 했다고는 하지만 마음이 심란했다.
‘어쨌든 우리 쪽에서 아이디어가 유출된 탓에 양지푸드에게 선수를 빼앗긴 건 사실이잖아. 우릴 믿고 마케팅 협업까지 진행했는데 신뢰를 잃었을지도 몰라.’
이보석 사장을 비롯한 태양식품 삼 형제와 우호적인 관계이긴 하지만, 비즈니스에서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까지 눈감아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40년 넘게 가업을 이어오며 사업에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 대충 정으로 이번 일을 무마해주진 않을 성싶다.
‘뭐 어쩌겠어. 손에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싹싹 빌어야지.’
정작 일을 저지른 천다희의 지문은 멀쩡한데 내 지문만 닳아 없어지는 건 좀 억울하지만, 어쨌든 이번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자신이었다.
혜주는 마음을 굳게 다지며 배에 올랐다.
이보석 사장의 거처는 태양식품 본관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주택이었다. 소박한 성격에 걸맞게 이 층으로 단출하게 지어진 목조 건물이었다.
살짝 열린 대문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 혜주가 벨을 눌렀다.
“사장님, 저 오혜주입니다. 안에 계세요?”
할아버지라고 부를까 사장님이라고 부를까 수없이 고민했으나 일단 일로 찾아온 거니 호칭을 바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잠시 후 안쪽 현관을 열고 보석이 등장했다.
“오 대리 왔능가?”
아, 아니, 왜 버선발로 나오시고 그러세요.
반가운 표정으로 걸어 나오는 보석을 보고 혜주가 조금 주춤거렸다.
이거 분위기가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배 타고 오느라 고생혔어. 바람도 솔찬히 부는데 어여 들어와.”
얼떨떨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가니 응접실에 큰 상이 놓여 있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밥상에 혜주는 울컥 목이 메는 듯했다.
“할아버지, 저는 사과를 드리러 왔는데…….”
“사과할 게 뭐 있당가. 오 대리도 맴 고생 심했을 턴디 우선 식사나 들어.”
집안엔 금석, 은석, 동석 형제가 모두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편안한 얼굴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경쟁사에 아이디어를 빼앗겼는데 이렇게 태평할 수가 있다고?
혜주의 의문은 머지않아 풀렸다.
“젊은 대표가 노련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더군.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회의를 몇 번이나 했나 몰러.”
보석이 그간 주원이 틈틈이 보내온 메일을 보여주었다.
그 안엔 양지푸드의 동태, 신제품의 출시 예정일과 향후 예상 매출 분석에 관한 자료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어떻게 꼬드겼는지 출시도 안 된 신제품의 포장 디자인까지 구했더구먼. 하여간 대단한 젊은이야.”
훔친 아이디어로 신제품을 구상 중이라는 양지푸드의 동태를 전해 듣고 보석과 삼 형제는 처음엔 크게 노했다.
대체 직원 관리를 어떻게 하기에 이 사달을 내냐고 당장 계약을 파기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주원은 꾸준히 보석을 설득했다.
-어차피 망할 제품입니다. 던져줘도 됩니다.
혼밥김을 제안할 땐 언제고 이제는 제품이 망할 거라니, 보석은 어이가 없어도 단단히 없었다.
그의 생각이 바뀐 건 주원이 보내온 ‘뚝딱김 포장 디자인’을 본 후였다.
“요즘 세상에 누가 이런 과대포장을 헌당가? 박 사장 그 늙은이가 시대를 못 따라가는구먼, 쯧쯧.”
아니나 다를까. 뚝딱김은 출시와 동시에 신명나게 욕을 먹는 중이었다.
꼴랑 김 다섯 장을 포장하기 위해 자원 낭비를 얼마나 하는 거냐며 빈정대는 댓글은 물론, 한 누리꾼은 한 팩을 다 뜯어놓고 한 줌에 불과한 김의 양에 비해 포장지가 이만큼이나 된다며 쓰레기통을 가득 채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출시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과대포장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뚝딱김은 양지푸드의 명성에도 흙탕물을 끼얹었다.
국내 김 제조 업체의 양대산맥이었던 양지푸드에 닥친 불행은 반대로 태양식품에겐 호재가 되었다.
“박 사장 그 늙은이, 국내 매출은 지가 꽉 잡고 있다며 거들먹거리더니 이참에 정신 좀 차려야제.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구먼, 껄껄!”
눈엣가시를 뽑은 듯 만족스러워하는 보석의 모습에 혜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월도에 오는 내내 원망을 들을 걸 각오하고 왔는데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니 다행이었다.
‘역시 우리 오빤 다 계획이 있었구나.’
새삼 내 남자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데 잠깐!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 얘기해주지 않은 거야?’
문득 서베리아 대표와 주원이 통화하던 내용이 떠오른다.
주원에게 차여 학점이 빵꾸 났다던 그 여자.
생각해 보니 보통의 회사에선 신제품 출시일이 되기 전까지 출시일과 포장 디자인 등을 비밀리에 부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강주원은 그 모든 정보를 어디서 얻었을까?
‘강주원, 나 모르게 지금까지 그 여자랑 계속 연락을 주고받은 거야? 이런 카사노바 같은…….!’
어디 연락만 주고받았겠어? 온갖 달콤한 말도 뿌려댔겠지!
‘지난번에 보니까 여자 꼬시는 덴 아주 도가 텄더구만. 대체 뭔 말로 꼬드겼기에 목소리만 들어도 냉기 펄펄 날리는 여자가 온갖 정보를 갖다 바친 거야?’
결국 그 여자한테 얻은 정보이기에 혜주에게도 철저히 숨긴 걸 거다.
합리적인 의심이 확신이 되자 혜주는 강주원의 순결과 순정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내가 첫 여자라더니 뭐가 저렇게 능수능란해? 머리털 나고 여자 꼬실 일 한 번도 없었다면서 순 구라쟁이!’
“둘이 좋아 지내는 사이제?”
“콜록! 콜록!”
갑작스러운 보석의 물음에 혜주는 입에 물고 있던 미역을 뿜을 뻔했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 혜주가 새빨개진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오 대리 잘못이 아니라고 메일 말미마다 어찌나 강조를 하던지 달달 외우게 생겼당께. 그걸 보고도 눈치채지 못 허면 당장 관 짜야제.”
다 알고 있다는 듯 보석이 씩 미소를 지었다.
혜주는 대답 대신 두 뺨만 불그스레 물들였다. 방금 속으로 주원을 욕했던 걸 보석에게 들킨 기분이라 민망했다.
“좋은 남자여, 꽉 붙들어.”
흐뭇한 미소로 당부한 보석이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에휴, 우리 루비도 그쪽 애인만치 좋은 남자를 만났어야 허는디.”
혜주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막돼먹은 오춘택. 너는 왜 이 누나를 쪽팔리게 하는 걸로도 모자라 양심의 가책까지 느끼게 하는 거냐.
쓸모라고는 파리채보다 없는 자식.
“루비 씨도 좋은 남자 만날 거예요. 좋은 사람 곁에는 그만큼 좋은 사람이 함께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루비, 그 한량 놈하고 헤어졌당가?”
에둘러 말한 것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보석이 반색했다.
“전 말 못 해요. 그런 건 나중에 루비 씨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그라지 말고 얘기 좀 해봐. 그 막대기같이 삐쩍 마른 건달하고 헤어진 거 맞제?”
“전 입이 무거운 사람입니다.”
“안 되겠구먼. 야, 똥석아! 삼십 년 묵은 산삼주 좀 가져와라!”
곧이어 혜주의 입을 열기 위한 술 공격이 시작되었다.
왜 먹을수록 입이 가벼워지는지, 참 이상한 산삼이란 말이지.
*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어느새 배가 끊겼다.
보석이 내어준 루비의 방에서 잠깐 잠이 들었던 혜주는 자정이 될 무렵 홀로 바닷가에 나왔다.
“바람 좋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는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하늘을 반쯤 가린 구름 사이로 흐르는 달빛에 젖은 물결은 고요했고 철썩철썩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잔잔했다.
혜주는 평상에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하늘을 구경했다.
술도 적당히 취했겠다, 마음도 가볍겠다, 이보다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잠시 바닷바람을 맞던 혜주의 귀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무심코 돌아보니 저 멀리 가로등 아래로 걸어 내려오는 조각 같은 실루엣이 보였다.
아니, 가로등 불빛으로 아무리 늘여도 저 정도 비율이 나오긴 쉽지 않을 텐데. 이런 코딱지만 한 섬에 강주원 버금가는 비율을 가진 남자가 또 있을 수가 있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툭툭,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고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강주원이다!’
꿈인가 생시인가 볼을 꼬집어 보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일어났다.
“오빠!”
혜주는 슬리퍼를 꿸 새도 없이 쪼르르 달려가기 시작했다. 밤바람에 젖은 모래가 사각사각 발바닥에 밟혔다.
이윽고 그의 앞에 도달한 혜주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진짜 강주원 맞아요? 나 지금 꿈꾸는 거죠?”
바닷바람을 닮은 입술로 그가 싱긋 웃었다.
“확인해 봐.”
두 팔을 활짝 벌린 그의 품으로 혜주가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