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예의는 있지. 참을성이 없을 뿐이지
(96/121)
96. 예의는 있지. 참을성이 없을 뿐이지
(96/121)
#96. 예의는 있지. 참을성이 없을 뿐이지
2023.04.30.
그의 품에서는 쌉싸름한 풀향기가 났다. 잘 가꾼 숲에서 날 법한 싱그러운 냄새.
바다 내음이 조금 섞인 그 향기는 혜주에게 현실을 일깨워주었다.
“꿈 아니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저거 타고.”
주원이 뒤쪽 선착장을 가리켰다.
멀리 보이는 선착장에 통통배 한 척이 떠 있었다.
“저거 타고 온 거예요? 헉, 설마 여기 오려고 배를 빌렸어요?”
“물론 이 몸엔 요트 같은 게 더 어울린다는 거 알아. 근데 지금 빌릴 수 있는 게 저거밖에 없었어.”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욕도 칭찬으로 알아듣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남자의 등을 혜주가 찰싹 때렸다.
“내일 아침이면 나갈 건데 왜 헛돈을 쓰냐고요.”
“윽. 오혜주 손찌검이 나날이 는다?”
“안 아프잖아요.”
“넌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네 손맛에 자부심을 가져.”
“…….”
말없이 째려보자 주원이 딴청을 부렸다. 모래사장을 툭툭 발끝으로 건드리던 그가 삐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헛돈 아니게 해주면 되잖아.”
“뭐라고요?”
“아주 가치 있는 지출이 되게 만들어 달라고. 오혜주 네가.”
어, 뭔가 잘못 걸린 거 같은데.
생각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주원이 목덜미를 확 끌어안았다.
“뭐, 뭐예요? 어디 가는데?”
“내 지출을 보람되게 만들어 줄 곳.”
“힉!”
“돈값 해야지, 혜주야.”
그래서 배 빌린 값이 얼만데요오오오오…….
혜주의 부르짖음은 바닷바람에 아스라이 흩어졌다.
오늘 잠은 다 잤다.
*
“여기가 루비 씨 방인가?”
“네. 여자 방은 여기밖에 없다고 내어주셨어요.”
혜주와 주원은 고양이걸음으로 안채에 들어섰다.
보석의 이 층 집은 1층 남자가, 2층은 여자가 사용하고 있었다.
북적북적한 1층에 비해 2층은 루비 혼자 단독으로 사용하는 공간이어서 아무도 없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주원을 홱 돌아보며 혜주가 경고했다.
“루비 씨의 소중한 추억이 묻어 있는 신성한 곳에서 막 덮치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 정도 예의는 있죠?”
“예의는 있지. 참을성이 없을 뿐이지.”
“…….”
“농담이야, 바보야.”
주원이 혜주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소파에 앉았다.
“회의 마치고 바로 달려와서 나도 좀 피곤하네.”
그의 음색에서 피곤함이 묻어났다.
혜주는 기껏 여기까지 온 사람을 타박만 한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어깨 좀 주물러 줄까요?”
“아니. 네가 건드리면 예의 못 지킬 거 같아.”
미안하단 거 취소다.
“방에 만화책이 많네. 루비 씨 만화 좋아하나 보네.”
“그러게요. 루비 씨가 좀 소녀 감성이잖아요. 와, 십 년 전 유행했던 만화책은 다 있네요?”
“죄다 로맨스네. 지루해.”
“로맨스 안 좋아해요?”
“남의 연애를 좋아할 이유가 있나. 내 연애 신경 쓰기도 바쁜데.”
하여간 시크한 내 남자.
하지만 이유를 들어보면 또 묘하게 납득이 된단 말이지.
“아, 너무 좋다. 오빠랑 이렇게 남의 집에 있어 본 건 처음이네요.”
혜주가 팔걸이에 앉으며 주원의 품을 파고들었다. 하루 종일 긴장을 해서 그런지 그의 품이 더 아늑하게 느껴졌다.
혜주는 주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손으로 그의 복근을 살살 매만졌다.
어릴 땐 남의 살을 만지면 기분이 편안해지곤 했다. 그런데 이 남자 살은 왜 안 그렇지?
‘물컹해야 할 자리가 단단해서 그런가.’
괜히 침샘이 자극되는 느낌이다.
“루비 씨 방이라 그런지 편안하기도 하고 나름 스릴도 넘치는데요?”
“스릴 넘칠 만한 짓은 안 했는데. 설마 뭘 기대하고 있어?”
“기대 개뿔 안 하거든요?”
“조금만 참아, 혜주야. 집에 가서 많이 예뻐해 줄게.”
쓱쓱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혜주는 진짜 아무것도 기대 안 했다고 항변하려다 그만두었다. 사실 아무것도 기대 안 한 건 아니었으니까.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만화책을 보았다.
혜주가 고른 책은 [인어는 눈물이 없다]라는 로맨스 만화였다. 주원은 뭘 골랐나 궁금해 슬쩍 훔쳐본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더티 나잇?’
와, 이 오빠 취향 참 한결같네.
19금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제목에 혜주는 풉 웃음을 터뜨렸다. 남의 연애에 관심 없다는 주원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진풍경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한참 각자 책을 읽다가 혜주가 먼저 완결을 찍었다.
만화책 마지막 페이지를 탁 덮은 혜주는 그때까지 레이저를 쏘고 있는 주원의 무릎에 냉큼 머리를 기댔다.
“로맨스는 지루하다던 사람 어디 갔더라.”
“말 시키지 마라. 중요한 순간이야.”
“싫은데? 말 시킬 건데?”
그녀가 손장난을 치며 주원의 허벅지를 간지럽혔다.
“쓰읍, 오혜주. 막권까지 읽으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주원은 엄숙하게 경고했으나 거듭된 장난질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책을 덮었다.
‘더티 나잇이 얼마나 더티했는지 딱 보려던 순간인데 아쉽군.’
어차피 돌아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주원은 읽던 책을 책꽂이에 꽂아놓곤 혜주를 꽉 껴안았다.
“아, 집에 가기 싫다.”
“설마 먼저 나가야 해요?”
“응. 내일 아침 미팅이 있어서.”
“지금 배도 없을 텐데.”
“아까 타고 온 거 있잖아.”
아아, 고작 얼굴 한 번 보려고 이 먼 거리를 달려왔다니.
혜주는 가슴이 뭉클했다.
“겨우 두 시간 있다 갈 거면서 뭐하러 여기까지 와요. 힘들게.”
“그렇게 비효율적인 것도 하게 만드네, 네가.”
매일같이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한순간도 빠짐없이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남자. 일할 땐 한없이 계산적이다가도 내겐 늘 손해만 보는 남자.
그 남자가 내 남자라서 좋았다.
혜주는 시큰한 눈시울을 그의 가슴팍에 비볐다.
주원은 부드럽게 뒤통수를 쓰다듬다가 혜주를 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낯선 데서 혼자 자려면 무서울 것 같아서 왔어. 재워주고 갈게.”
어…… 무서운 척을 해야 하나.
사실 혜주는 밤을 무서워하는 편이 아니었다.
자취한 지 몇 년이나 지나 혼자 자는 것에 익숙하기도 했고, 타고나길 귀신도 때려잡을 강심장이기도 했다.
그러니 주원에게 귀신이 붙었을 때도 걱정은 했을지언정 무서워하진 않았겠지.
“바람 소리가 좀 으스스하네. 나 없었으면 혼자 어쩔 뻔했어.”
……그래. 까짓거 무서운 척해주자!
“꺄악, 오빠, 바람 소리가 꼭 귀신 소리 같아요. 너무 무서워요.”
“하여간 심장은 콩알만 해서는.”
“아잇, 깜짝이야! 섬이라 그런지 바람이 너무 많이 부네요. 꼭 누가 휘파람 부는 거 같아요.”
덜컹덜컹.
때마침 창문이 흔들렸다. 혜주는 잔뜩 겁에 질린 척 주원의 품을 파고들었다.
“방금 저 소리 들었어요? 아이코, 무서워라…….”
“걱정 마. 오빠 특전사 갈 뻔한 남자야.”
“갈 뻔한 남자는 뭐예요?”
“가고는 싶었어.”
“결국 못 간 거죠?”
“갈 뻔했다니까.”
그 후로도 혜주는 간간이 무서운 척을 하며 주원을 뿌듯하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등이 축축이 젖는 건 왜인가.
*
다희가 사표를 제출했다.
일이 커지기 전에 튀려고 부리나케 사직서부터 제출한 모양새였다.
직원들은 그걸 두고 뒷말을 쑥덕거렸다.
대충 질투심에 눈이 멀어 혜주를 엿 먹이려다 스스로 자멸했다는 그런 얘기들이었다.
평소 뺀질거리던 다희의 근무 태도까지 입방아에 올라 한동안 회사에서 천다희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주원은 회사 법무팀에 다희에 관한 문제를 일임했다. 애초에 사직서 한 장 달랑 받고 보내 줄 마음이 없었기에 본격적으로 책임 소지를 물을 작정이었다.
사직서까지 낸 마당에 무슨 소송까지 하냐고 말이 나올 법도 한데 아무도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의아한 건 승원의 태도였다.
다희가 사직서를 제출한 날 그도 사표를 썼다.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고 잠적해버린 바람에 회사에선 자동으로 퇴직 처리가 되었지만 주원은 신경을 끌 수가 없었다.
‘이 자식 진짜 버릇을 더럽게 들였네.’
그는 자신과 정반대인 승원의 성향을 존중하고 아꼈지만 골치 아픈 일만 생기면 잠수부터 타는 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큰 사내놈에게 무슨 일이 있기야 하겠냐마는 다희가 회사를 그만둘 때 함께 사표를 던지고 나간 게 찜찜했다.
“오늘도 강승원 연락 없죠?”
“어. 그나마 휴대폰은 켜져 있는데 아예 받지를 않네.”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직 3주 남았어.”
“네?”
“강승원 역대 최장 가출 기간이 한 달이야. 그때 어머니가 경고하셨거든. 가출이고 잠수고 너 알아서 할 일이지만 한 달 넘기는 순간 죽을 줄 알라고.”
선우연 여사가 화나면 집안 공기 자체가 시베리아가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승원이라면 한 달 안에 기어들어 올 거라고 주원이 설명했다.
“하긴, 걔 은근히 똥고집인데 엄마 말은 무진장 잘 듣더라고요. 오빠 말대로라면 3주 안에는 들어오겠네요.”
혜주는 걱정을 지우며 주원의 팔짱을 꼈다.
“퇴근합시다, 대표님.”
나란히 퇴근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업무량 때문에 주원과 혜주는 서로 바빠 얼굴 볼 시간도 없었다.
회사에서 마주쳐도 주변 눈치 때문에 손 한 번을 잡을 수 있나, 퇴근 시간이 다르니 온전히 데이트를 할 수가 있나 이래저래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오랜만에 함께 퇴근하는 게 좋아서 주원은 혜주의 손을 꽉 쥐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내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통에 혜주는 화장을 고칠 새도 없었다.
혜주의 집 앞에 차가 멈춰 섰다.
내리기 싫은 혜주와 보내기 싫은 주원은 손을 꽉 붙잡고 가만히 라디오를 들었다.
차 안에 낮게 깔린 피아노 소리는 마침 내리기 시작한 비와 어우러져 운치가 있었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오늘은 더 헤어지기 싫다.”
혜주가 주원의 어깨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주원의 뇌리에 많은 말이 떠올랐다.
‘나도 같이 내릴까? 자고 갈까? 오빠 집으로 갈래?’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선뜻 고르지 못한 건 그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결혼할까?’
언젠가 한 번 찔러보았다가 무참히 튕긴 그 말.
‘혜주야, 결혼하자.’
언제고 꺼낼 수 있게 가장 얄팍한 곳에 묻어둔 그 말.
혜주가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말을 꺼내기 위해 호시탐탐 때를 보던 주원은 지금이 바로 기회라는 걸 알았다.
때는 이때다.
깊게 심호흡을 한 그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결혼하자, 오…….”
“오춘택?”
“아니, 오춘택 말고-!”
“오춘택이 이 시간에 웬일이지?”
……나 누구랑 대화하냐.
벌컥 차 문을 열고 나간 혜주의 뒷모습에 주원이 어금니를 바스라져라 깨물었다.
홀로 차에 남겨진 주원의 눈에 비에 홀딱 젖은 가마니 같은 게 보였다.
‘뭐야, 저 거지는.’
탁.
주원이 몹시 짜증 나는 표정으로 차 문을 열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