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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얘랑 같이 산다고? (97/121)


#97. 얘랑 같이 산다고?
2023.05.04.



 
춘택의 꼴은 가관이었다.

며칠 노숙을 한 듯 지저분한 몰골은 둘째치고 어디서 깐족대다 얻어터진 듯 얼굴 곳곳이 멍이었다.

매일 하고 다니던 금목걸이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목 주변이 휑했다.


“누나, 나 좀 살려줘. 흐엉!”

차에서 내리는 혜주를 보자마자 필립이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남은 것이 미운 정뿐이라지만 저 모양 저 꼴로 나타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 꼴이 왜 그래? 또 누구랑 쌈박질했어?”

“쌈박질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거야.”

“누구한테?”

“조폭. 류 사장 개X끼, 아아아아악!”

조폭은 뭐고 류 사장은 또 뭐야?

혜주는 당황스러웠지만 차분히 필립을 달랬다.

육두문자 섞인 울음을 한참이나 토해내던 필립이 털어놓은 사정은 이랬다.

약 일 년 전, 그는 같이 데뷔를 준비하던 래퍼 지망생의 소개로 한 소속사에 몸을 담게 되었다.

소속사 사장은 류 모 씨로 별로 유명하진 않지만 과거에 래퍼로 활동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돈이 얼마나 많은지 인기도 없는데 앨범을 네 장이나 냈다는 그는 필립의 가능성을 칭찬하며 연습생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래퍼로서의 꿈을 필립을 통해 이루고 싶다나 뭐라나.

초록 창에 류 사장의 이름을 검색해본 필립은 그가 진짜 네 장의 앨범을 낸 래퍼라는 걸 알게 되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정도는 아니어도 이 정도면 공인인데 설마 나한테 사기를 치겠어?’

이번에야말로 데뷔의 기회라고 생각한 필립은 그 길로 곧장 그의 소속사로 합류했다.

류 사장은 틈만 나면 재력을 과시하곤 했다. 래퍼로선 실패했지만 사업가로선 대단한 성공을 거둔 듯 보였다.

그는 필립이 묵을 숙소를 구해주고, 연습실을 제공하고, 녹음실도 마음껏 이용하게 해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계약을 맺은 의류업체에서 마음껏 옷을 구매할 수 있게 해주고, 카메라 마사지를 받기 전 일단 좀 가꿔놔야 한다며 마사지며 헤어메이크업도 제공했다.

피부과 시술은 물론 생활비 카드까지 턱하니 내어주니 필립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횡재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필립의 기대는 1년 만에 박살이 났다.

며칠 전 그의 숙소로 온몸에 용을 그린 조폭 몇 명이 나타났다.


-어이, 네가 오춘택이냐? 돈을 빌렸으면 제깍제깍 갚아야지 여기서 뭐하고 있니, 꼬마야?

-누구세요?

-너한테 돈줄 대준 사람.

-잠시만요. 일단 저희 사장님께 전화를…….

-류 사장이 너한테 받아내라고 하던데 어디서 딴소리야! 남의 돈인 줄 알고 쓸 땐 좋았지?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거저먹는 법만 알아서, 쯧! 너 이제 인생 X 된 거야. 알았냐?

 
그들은 당황한 필립을 끌고 가 계약서를 들이댔다.

류 사장 회사에 들어갈 때 작성했던 계약서를 보고 필립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연습생 신분으로 지출한 모든 비용은 연습생 본인에게 청구한다. 연습생은 채무 변제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하며 이를 갚지 못할 경우 채무에 대한 모든 권리는 프린세스 캐피털에 양도한다.]


‘그땐 분명 이런 부분 없었던 것 같은데…….!’

계약서 말미에 깨알 같이 적힌 글씨는 보고도 선뜻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했다.

몇 번이나 그 문장을 훑어본 후에야 필립은 생각했다.


‘X 됐다.’

필립으로부터 사정 설명을 들은 혜주가 이마를 짚었다.


“딱 봐도 사기잖아. 그걸 믿으면 어떡해?”

필립이 돌대가리인 줄은 알았으나 이 정도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줄은 몰랐다.

손때가 타지 않은 아역 배우나 아이돌 연습생을 대상으로 저런 사기가 빈번히 일어나는 건 유명한 일이었다.

연습생이 회사만 믿고 펑펑 사용한 돈을 두 배, 세 배로 뻥튀기해 돌려받는 수법으로 매스컴에 소개된 적도 있었다.

데뷔가 절실한 청춘의 꿈을 저당잡아 사기를 치는 일당이 있단 얘기를 들었을 땐 참 나쁜 놈들이라 생각만 했는데, 피해자가 춘택이고 보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리 미운 동생이라도 남이 쥐어박으면 기분이 나쁜 법인데 애를 아예 피떡을 만들어놨으니.


“그래서 빌린 돈이 얼만데?”

“사천…….”

헉 소리 나는 금액이었으나 그 정도면 막을 수 있다. 나름 직장을 몇 년을 다녔는데.


“알았어. 일단 그 돈은 내가 마련해줄게. 적금 깨면 그 정도는 될 거야.”

“아니, 누나…….”

“그냥 해주는 거 아니니까 잔말 말고 받아. 조폭한테 쫓기면서 살 수는 없잖아.”

“아니, 그게 아니고…….”

“달에 백만 원씩이라도 꼬박꼬박 갚아. 젊은 몸뚱이 놀릴 생각하지 말고 물류 센터에서 상하차를 하든 공사장에서 노가다를 하든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그게 아니고 누나!”

필립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빌린 돈만 사천이라고!”

“뭐……?”

“갚아야 할 돈은 그 배가 넘어. 이자가 미쳤다고 진짜…… 어허엉!”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필립을 보는데 육두문자를 빼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꽉 쥔 주먹이 움찔거렸다.


“경찰에 신고는 했어?”

“신고하면 죽인다고 했어. 그 X끼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오늘 경찰서 찾아가는 길에 딱 걸려서 한 시간 넘게 얻어터졌다니까?”

필립이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혜주의 다리를 붙잡았다.

주원의 눈썹이 팍 구겨졌다.


“누나, 나 좀 살려줘. 돈 달라는 얘긴 하지도 않을게. 나도 염치라는 게 있지.”

너한테 그런 숭고한 단어는 어울리지 않아. 집어치워.


“그냥 며칠만 집에서 재워주라, 응? 누나 집에 있으면서 일 구해서 어떻게든 빚은 갚아볼게. 내가 일 열심히 하는 모습 보이면 그쪽에서도 함부로 하진 않을 거야. 누나 집에서 딱 한 달만 있다가 월급 받자마자 나갈게. 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줘, 흐어엉…….”

혜주는 눈물 콧물 빼는 필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멍투성이가 된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잇새에서 한숨이 샜다.


‘하아, 이 애물단지를 어떡하니, 진짜.’

제일 쉬운 방법은 미옥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었다. 미옥이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필립의 빚을 갚아줄 테니까.

하지만 혜주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며칠 전 수철과 통화를 할 때 요즘 부쩍 손님이 줄어서 장사가 안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때문에 쓰던 직원도 자르고 미옥과 수철 둘이서 가게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고.

그런 중에 필립의 일로 또 골머리를 썩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 내 집으로 들어와.”

“……진짜?”

“대신 조건이 있어.”

필립이 울음을 뚝 그치고 혜주를 바라보았다.


“네가 빌린 돈은 네 힘으로 갚아. 미옥 아주머니에게 손 벌리지도 말고 내 통장 털어갈 생각도 하지 말고 무조건 네가 벌어서 갚는다고 약속하면 한 달 동안 살게 해줄게.”

“약속할게! 내가 노가다를 해서라도 무조건 갚을게!”

“이번 주 안으로 알바든 뭐든 무조건 일 구해.”

“당연하지! 소처럼 일하고 개처럼 벌게!”

“약속 어길 시 다시는 너 안 봐.”

끄덕끄덕.

구세주를 만난 필립이 정신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였다.


“잠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주원이 황당한 얼굴로 필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얘랑 같이 산다고?”

아, 오빠 아직 안 갔구나.

필립의 몰골에 놀라 주원이 옆에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던 혜주가 뒤늦게 그를 쳐다보았다.

흠칫.

그러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주원의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한 시간 후.


“와, 형 집 진짜 좋네요! 무슨 대궐이 따로 없네요. 여기 몇 평이에요? 70평? 80평? 히익, 설마 백 평 넘어요?”

옆에서 종알대는 필립의 목소리에 주원은 뒤늦게 현타가 왔다.


‘망할 강주원, 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버린 거냐.’

혜주 집에 사내놈을 재울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필립을 제집으로 들이고 말았다.

……미친 거지.

필립이 혜주의 동생 비스무리한 존재라는 사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래퍼 지망생으로 다니던 대학도 휴학하고 빈둥거리고 있다는 것도. 종종 혜주에게 용돈을 삥 뜯어 간다는 것도 익히 알았다.

종합하자면 그는 주원이 제일 싫어하는 유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을 제집에 들인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아, 그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요. 얘 몰골 보니까 안 재워주면 큰일 날 것 같아서.

-너 호구야?

-……저 쟤한테 호구 잡힌 지 꽤 됐어요.

 
어쩌냐. 내 여자가 호구라는데.

차마 필립을 내치지 못할 혜주의 성격을 아는 주원으로서는 마냥 내쫓으라고 말할 수만은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역시 필립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혜주가 양평에 있는 귀녀의 신당을 찾아갈 때 필립이 동행했다고 들었다.

그때 필립이 같이 가주지 않았더라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고는 한 번은 만나서 고맙단 얘기를 하려 했었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길거리에서 얼어 죽든 말든 눈썹 하나 까딱 안 했을 텐데.’

아니, 혜주가 사는 집이 딱 방 두 칸만 됐어도 필립을 제집으로 데려오는 삽질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원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매만지며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넌 저쪽 손님방을 쓰면 돼.”

“오, 손님방도 있어요? 예스, 좋아요!”

“화장실도 거기 있는 걸로 쓰고. 거실 화장실은 건드리지 마.”

“그럼요. 저도 그 정도 예의는 있는 놈입니다.”

말이나 못 하면.

당근밭을 발견한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져서 이곳저곳 둘러보는 필립을 보니 평화로운 시절은 다 간 듯싶었다.


‘아마도 난 태어나서 제일 큰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솔직히 주원에게 가장 쉬운 건 필립의 돈을 그냥 갚아주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원한다면 살 집을 구해줄 수도 있었다.

예전에 선우연 여사가 했던 말처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그에게 가장 쉬운 일이었고, 혜주의 가족이라 생각하면 그 정도 돈을 쓰는 건 아깝지도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은 건 혜주가 그걸 원하지 않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부담스러워 결혼도 망설이는 애가 돈 주겠다고 하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더 부담감이 심해져 도망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치열한 고민 끝에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삽질이었다.


-잠 정도는 내가 재워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 말을 뱉는데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기분이었다.

아니, 진짜로 돋았다.


“형, 혹시 화장실에 탈모 샴푸 있어요? 요새 탈색을 자주 했더니 머리가 좀 빠져서, 헤헤.”

해맑게 묻는 필립을 보며 주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걸 죽여,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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